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37화 (37/142)

<-- 의뢰 -->                “여전히 거치시군요.”

출입문에 어느새 남자 한명이 서 있었다. 어떤 기척도 듣지 못했던 세리나는 평정을 유지하고 돌아보았다. 이 정도로 그녀의 주의를 끌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고 세리나는 여상한 얼굴로 손을 까딱했다. 부상 당한 남자들이 신음성과 함께 어기적거리며 기어서 그의 뒤로 숨었다. 기어가는 꼴을 보던 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은 머리에 장신, 여전히 경쾌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그녀는 의외라는 목소리를 냈다.

“직접 등장할 줄은 몰랐군, 벡스 레넌.”

“아아 이런.”

장신에 검은 머리의 남자, 용병대장 벡스 레넌은 고개를 숙였다.

“저를 알아보시다니 영광입니다, 황자비 전하.”

귀를 부여잡고 급히 벡스 레넌의 뒤로 피한 주인 남자가 황자비라는 호칭에 눈을 크게 뜨고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에 우윳빛 피부와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 어쩐지 보통 미모가 아니다 했다. 황자비라니 보통 사람은 평생 가야 한번도 보기 힘든 황족의 일원이다. 하지만 귀족가의 여인이 저런 무위를 지니고 있다고? 검기는 기사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쓸 수 있는, 소드마스터 직전의 자들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이다. 몇 달 전부터 수도 내에 파다하게 퍼지던 소문. 제1황자의 수호기사이던 여자가 황자비로 앉았다는 소문을 기억해내고 주인 남자의 시선이 경악으로 찼다.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 하면서 그녀는 눈썹을 모았다.

“오랜만이야. 하지만 몇 년 지났다고 해서 함께 내리 3년을 싸운 자네 얼굴을 기억 못할 만큼 내 머리가 나쁘진 않아.”

“저같이 하찮은 용병은 몇천이나 널려있잖습니까.”

“용병대장을 하찮다고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겠지?”

세리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이프를 손바닥에 대고 돌렸다. 용병대장은 이 넓은 로마니엔에 일곱 밖에 없는 존재다. 그 중 둘이 수도에 있고, 눈 앞의 벡스 레넌은 그 중 한명이다. 에스트레드가 전쟁 참여시에 도움을 요청할 만큼 중대한 인물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인사지? 요즘 용병대장은 일대다 암습으로 안녕을 묻는 건가?”

“그럴리가요. 단지 천하의 세리나 리엔 경이라면 이 정도 암습은 몸풀기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운동이라도 하시라고 대접해드린 거지요. 아, 이제 리엔 경이라고 부르면 안되겠군요.”

남자가 과하게 연극적인 동작으로 인사를 크게 했다.

“제1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 전하의 반려, 제1황자비 세리나 리엔 전하. 삼가 안부를 아뢰옵니다.”

“집어치워. 놀리는 것 같군.”

황자비는 냉정하게 잘랐다. 벡스는 난처함을 가장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놀리다뇨, 황자비 전하. 사실을 말할 뿐인데요.”

남자는 곧 표정을 바꿔 싱글거렸다. 용병대장이란 실력도 실력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이 계략에 능한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다. 모래알처럼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고 헐거운 조직을 관리하는 자리니까 사람을 잘 다루고 말을 잘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레드포 로마나 보다도 더 속이 시커먼 놈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모아져서, 벡스는 흥미롭게 그녀의 따로 움직이는 눈썹을 지켜보았다.

“항상 절 못마땅하게 보시더니 지금도 그러시네요.”

“알다니 다행이야.”

“알 수 밖에 없습니다만…”

세리나는 나이프를 천천히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팔목의 가죽밴드에 밀어넣고 나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상단 게오르그의 의뢰를 꽤 크게 받은 모양이군. 용병대장이 이 밤에도 여관을 배회하다니. 지금쯤이면 한참 번화가 술집을 휩쓸고 있을 시간 아닌가?”

“예, 뭐...어쩔 수 없죠. 고객의 의뢰는 중요하고 언제나 에스트레드 전하는 큰 손님이시니까요.”

벡스 레넌의 입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황자의 이름에 세리나의 안색이 변했다. 날카로워진 시선을 보면서 벡스는 즐겁게 미소를 띄웠다.

“요 며칠 이곳 여관을 배회중이신 황자비 전하의 소식을 에스트레드 전하께도 전해드렸습니다.”

“...”

“사실 굳이 숨기고 올 생각도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당신이 잠입을 자주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솜씨 없는 기사는 아니었죠.”

“그렇게 봐줬다니 다행이야.”

세리나 자신도 사실 알고 있었다. 하드레드는 아무런 의심도 표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렇게 허술하게 지켜보는 것을 들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망보는 그녀를 발견 해서라도 에스트레드가 마음을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다. 그녀를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것을 알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자리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

“사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으면 안돼요, 황자 전하께서 또 하나의 의뢰를 주셨거든요.”

“무슨 의뢰?”

“같이 가실래요?”

벡스 레넌이 불쑥 말했다. 세리나는 정말로 못마땅해져서 주먹을 쥐었다. 하드레드였다면 이미 한두대 쥐어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용병대장인 남자라 그녀는 한번 참았다.

“어딜?”

“어디든 상관 있으신가요? 지금 당장 가야해요.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주세요.”

빙글거리는 낯짝이 매우, 정말 매우 못마땅해서 세리나의 눈썹이 다시 한번 모아졌다. 미간에 굵게 주름이 가는 것을 보고 벡스가 킬킬댔다. 그는 손을 들었다.

“에스트레드 전하의 의뢰 건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의뢰인의 비밀을 지키지 않겠다 이건가?”

“비밀은 지켜요. 하지만..."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알고 싶으시죠? 황자비 전하.”

벡스 레넌은 가까이 걸어왔다. 방 정중앙, 세리나의 눈 앞에 서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밤의 달빛 속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연령도 의중도 모호한 용병대장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치 가면같은 얼굴에 씌워진 웃음이었다.

“그럼 저한테 의뢰를 하세요, 황자비 전하.”

그의 제안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길고 가늘게 찢어진 그의 눈 안,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상황을 알고 싶어서 여기 와 있는 거죠?”

벡스 레넌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트레드에게 대체 어디까지 들었을까.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세리나는 알고 있었다. 벡스 레넌은 결코 선하기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선하기만 해서는 용병대장을 맡을 수 없었고, 벡스는 그보다 조금 더 불필요한 선을 많이 제거해버린 남자였다.

“에스트레드 전하의 계획을 의뢰하세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도록 해달라고 하시면 그분의 일을 좀 변경시켜 드리죠.”

“...”

“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당신과는 달리 나는 황자 전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으니까.”

세리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에스트레드와 더 가깝다고 과시하는 것 같은 단어들이 거슬렸다.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고싶지 않아요?”

벡스 레넌의 말에 여자의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에 슬쩍 짜증이 어렸다.

“헛소리.”

그녀는 가죽장갑을 낀 손 끝으로 벡스 레넌의 각진 턱을 툭툭 쳤다.

“나이 먹더니 쓸데없는 게 늘었군. 낚시 하지 마. 거기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용병대장이 빙글거리며 물러섰다.

“아쉽네요, 진짜인데.”

“쯧.”

그녀는 혀를 찼다. 벡스 레넌은 용병대장이다. 하급의 용병이라면 몰라도 그쯤 되면 의뢰읜의 의뢰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낸다. 그에 관한 비밀의 유지에도 당연히 용병만의 윤리가 있었다. 나름 용병으로의 자부심이 있는 그가 함부로 입을 놀릴 리가 없었다.

마땅찮은 기색의 여자에게 벡스 레넌은 손을 들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 같이 가자는 건 진심입니다. 황자 전하의 의뢰에요. 궁금하시잖아요?”

세리나는 입술을 씹었다. 비록 삼년간의 전쟁에서 함께 싸웠다지만 그뿐인 인연이었다.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 역시 에스트레드의 명인가 싶었다. 의심하는 눈초리인 여자에게 벡스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황자 전하께선 당신이 이곳에 와 있다는 걸 모르시죠. 요 며칠 상단 지소 근처를 배회한다는 보고는 드렸지만요.”

“그래서?”

“에스트레드 전하의 명에 당신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전 전우였던 당신한테 호의도 베풀 겸, 같이 가자고요.”

“의뢰를 혼자 해내기 어려워서는 아니고?”

“설마 그럴리가요.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래 봬도 용병대장이에요. 내 이름이면 애들도 벌벌 떨어요.”

“....”

“아,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세요. 진짜라니까?”

“용병이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와 그런 말씀 좀 상천데.”

벡스는 과한 표정으로 상처받은 척을 했고 그녀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벡스 레넌의 제의에 세리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여자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남자가 초조하게 발바닥으로 땅을 두드리자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 일단 말이나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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