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국면 --> 비공식 일정일 때 에스트레드의 행선지는 여럿이다. 수도 상단 본부는 물론 수도 방위군 영지나, 그것도 아니면 약초를 연구하는 의술사에게 가기도 했다.
하지만 밤에 갈 곳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황자비는 자신이 며칠 간 염탐한 곳을 택했다. 허탕을 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세리나는 말을 달려 게오르그의 서부 지소로 향했다. 조용히 성내를 빠져나온 날렵한 검은 말이 밤처럼 날쌔게 달렸다. 그녀는 검은 밤하늘 아래를 달리며 고민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을 만난 뒤, 세리나는 처음으로 내침 당한 반려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황자비의 호칭과 누리던 지위는 당연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잃은 모습. 물론 에스트레드야 레드포 로마나처럼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냉정하고 차갑지만 동시에 공과를 적절히 가려 상과 벌을 주는 남자였다.
‘나는 과연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인가….’
에스트레드의 기사였을 때, 그녀는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황자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기사는 주군의 장기말로 쓰인다. 장기말이 전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는 문제였다.
지금 역시 그런 복종의 미덕이 필요할 때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의 마음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복잡해진 머리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와서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반려이고 싶었다. 연기가 아닌 진짜 반려. 평생을 함께 할 존재. 저토록 차갑고 냉정한 남자라도 둘만 있을 때는 더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사람. 그 자체가 허상이라는 걸 아는데도 세리나는 그 허상을 잡고 싶었다.
“안되지, 안돼.”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애초에 세리나 리엔은 로마나 황족의 혈통을 조금도 받지 못했고, 심지어 혼혈이었다. 혼혈은 대놓고 잡종 소리를 듣는 로마니엔에서 세리나는 결코 제위에 오를 에스트레드의 앞길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황자 전하의 마음 속에 내 자리가 있긴 한걸까.’
말도 안되는 소리다. 황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부하이자 기사인 자에게 전략적인 역할을 요청한 것 뿐이었다. 결약의 유지를 위해 매일 몸을 섞는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이성적인 뇌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다정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이성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그녀에게 말했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달아오른 가슴에 곧 이성이 돌아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황자는 지금 제위를 계승받기 위해 전투에 들어선 상태고, 그녀는 황자의 전략적인 장기말이다.
‘난 지금 전하의 전략을 알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전쟁을 위해선 정보를 알아야 하니까.’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녀는 자신을 위해 변명을 만들어냈다. 세리나는 머리를 털어내버리고, 곧 당도한 게오르그 서부지소 앞 여관으로 조용히 걸어들어갔다.
졸고 있던 주인이 후드득 놀라는 것을 손을 올려 진정시키며 그녀는 며칠 숙박비를 미리 내놓은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주인은 밤 늦게 찾아온 손님을 멀뚱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일단 선불 고객이므로 아무런 불평 없이 다시 졸기 시작했다.
2층에 올라온 세리나는 창가 의자에 걸터앉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여관도 거리도 고요했다. 온통 검고 조용한 상단 지소 3층에 자그마한 불이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에스트레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조용히 건물을 지켜보았다.
‘잠입을 해야하나…’
사실 여기서 이렇게 앉아있다고 해서 뭘 알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좀 거리껴졌다. 군인으로 암습이나 가장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황자의 근처로 잠입이라니 꺼림칙했다. 주군을 의심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의 명을 정반대로 역행하는 기분이었다.
세리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흩뿌려져 있었다. 가만히 밖만 내다보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손에 든 건 내려 놓는 게 좋아.”
발소리가 거의 없이 그녀에게 접근하던 그림자가 멈칫했다.
“쥐새끼처럼 움직인다고 모를 거라고 생각은 하지 마라.”
세리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순간 그림자로부터 공격이 터져나왔다.
등 뒤를 엄습하는 검격에 세리나는 소매 속의 나이프를 꺼내 검기를 폭발시켰다. 둥근 방패 모양으로 터져나간 푸른 검기에 등을 쪼갤 듯한 기세로 육박하던 검격이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방안의 공기를 찢는 검기의 기세에 그림자가 뒤로 뛰어 피했다.
세리나는 나이프를 둥글게 돌리면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인영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한 그는 1층에서 졸고 있던 여관의 주인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는 한없이 사람이 좋아보였지만 사실 꽤 인상이 험악한 남자였다. 하드레드와 첫 방문때 호의적인 모습도 상당한 연기였군, 하면서 세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이곳 여관도 게오르그의 영역이니 당연히 상단의 관리 하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세리나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오리고기를 잘 굽는 주인까지도 용병을 쓸 줄은 몰랐군. 아니 하기사 당연한 일인가. 상단 주변이야 호위를 잘 해야 하니까.”
“이건 이야기가 다른데.”
주인 남자가 투덜거렸다.
“그냥 검 좀 쓸 줄 아는 멍청한 여자라고 대장이 말했는데, 검기까지 쓸 줄 안다니 본격적인 검사잖아?”
“대장?”
세리나는 며칠 전 보았던 용병대장을 떠올렸다.
“수도의 용병대장, 벡스 말인가?”
“대장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벡스 레넌 그 용병대장놈이 나에 대해서 한 말이 검 좀 쓸 줄 아는 멍청한 여자라고 했다 이거지. 검 좀 쓸 줄 아는 멍청이가 도대체 누군인데? 그녀는 뭔가 울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싱긋 웃었다.
“최소한 그쪽보다는 잘 알지.”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고 세리나는 혀를 찼다. 그녀는 한개씩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상대의 기도도 볼줄 모른다면 용병 조직 안에서 결코 상급은 아닐 테고, 공격하는 꼴도 보아하니 특별히 특기도 없는 모양이고, 그쪽이야말로 벡스와 말을 나눌 수는 있는 위치인가? 아, 오리고기 굽는 게 특기라 그의 전속 요리사 쯤 되는 건가?”
“뭐? 이 계집이…!”
주인이 벌컥 화를 냈지만 여자는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 벡스 레넌이 세리나가 누군지도 말해주지 않은 것을 보면 결코 위치가 높은 용병은 아니다. 중급도 간신히 턱걸이일지도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벡스 레넌이나 잡아다 물어볼까.'
세리나는 다소 심술궂은 마음으로 생각했다.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보고는 직접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지 황자가 지금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아는 것 뿐이었다. 벡스 레넌은 며칠 지켜보는 동안 계속 상단의 곁을 배회하고 있었으니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동부 내란 시기에 자신의 사병이 없어 용병 조직을 이끌고 싸웠던 에스트레드 덕분에 세리나는 보통의 기사들보다 용병에 대해 잘 알았다. 동부 내란 삼년간 등을 맞대고 싸웠던 사이. 그녀와 용병대장 벡스 레넌은 전우이면서 전우가 아닌 기묘한 관계였다.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함께 생사를 넘나들어 묘한 유대감이 있었던 사이.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일이다. 그녀는 검기를 거둔 나이프를 손바닥에 톡톡 쳤다.
“상단 지소의 호위 정도에 벡스 레넌 같은 거물이 그냥 나올 리야 없지. 최상급 용병은 돈 뿐 아닌 의뢰의 무게감에 따라 움직이니까. 그런데 그쪽한테는...물어봐야 답을 알고 있을 리도 없군.”
그녀는 혀를 찼다. 순간 벽 쪽 어둡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 숨어있던 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단검으로 그녀의 허리를 노렸다. 동시에 반대편 커튼 속에서도 남자 한명이 그녀를 공격했다. 세리나는 손에 든 짧은 나이프로 단검을 방어하면서 남자의 콧대를 손날로 내려쳤다.
“크윽…!”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사이 세리나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인정사정 없이 걷어찬 로우킥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정강이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다른 사내의 단검을 막아낸 세리나는 가볍게 검기를 뿜어냈다. 단검의 날이 쩌적하고 금이 갔다. 그대로 몇초만 있으면 시퍼런 검기에 단검과 함께 남자의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미련하게 버티는 남자를 보고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빠르게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버렸다. 검기에 대항해 버티느라 힘이 빠져 꼼짝도 못하고 당한 남자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대로 팔을 잡아 뽑아 어깨를 탈골시켜 버리고, 세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쁘지 않았다. 그녀는 흐트러진 금발을 매만져 단정히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주인 남자가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리나는 간만에 움직여서 상쾌한 기분으로 어깨를 돌렸다. 좋아, 몰래 움직일 수 없다면 찾아간다. 잠입보다 이게 훨씬 더 세리나의 성미에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주인을 향해 턱짓했다.
“이봐, 헛수고 말고 벡스에게 안내나 해.”
“무, 무슨 소리야? 대장은 여기 없다.”
“네 대장이 여기 없으면 나는 재미가 없는데.”
주인의 귓가로 핑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스쳤다. 그는 자신의 귓바퀴가 갈라진 것을 깨닫고 고통과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검기를 작은 화살처럼 쏘아보낸 세리나는 나이프를 든 손목을 다시 둥글게 돌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자, 그래서, 벡스 레넌이 어디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