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국면 --> “황자비 전하께선 전통적인 금발에 녹안이시니까요, 역시 주조는 흰색과 녹색이 어울리겠죠? 진주와 에메랄드, 페리도트...연녹색과 짙고 어두운 녹색까지 그라데이션 된 리본이라든가.”
“녹색이 잘 어울리시긴 하지. 하지만 장밋빛도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 한번에 정해버리는 건 아쉽네. 산호와 호박을 섞는 것도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드레스의 모양도 아직 정하지 않은 거지?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데...안나, 상인 오베이로부터 카탈로그 들어온 건 업데이트가 되었니?”
“어제 저녁에 오베이가 급히 가지고 들어왔어요. 일단 어젯밤에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한번 훑긴 하셨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하셔서…’더 아름다운 것으로 가져와라, 내 비에게 어울리는 것으로.’라며 카탈로그를 집어던지셨거든요.”
“이런 이런. 오베이가 올린 거라면 가격 자체도 엄청날 텐데.”
“비용을 신경쓰실 분은 아니시죠.”
결혼식은 준비할 것이 엄청나게 많다. 개인의 결혼식도 그런데, 이건 황위 계승이 유력한 황자의 결혼식이었다. 성인식과 계승식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어 시간은 끔찍하게 촉박했다. 그간 꾸준히 내무부의 도움을 얻어 시종장 호보프가 물밑 준비를 해왔지만 보석과 드레스, 식장의 데코레이션 등은 식장과 일정이 확정되기 이전에는 준비할 수가 없었다. 내무부의 대신회의가 간신히 일정을 확정한 뒤에 머리가 희끗한 시종장은 정말 코피가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 오후. 시종장 호보프와 시녀 안나, 레이디 휘에리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정작 결혼 당사자인 세리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호로록 차를 마셨다. 그녀 역시 드레스를 입게 된 뒤로 아름다운 보석과 섬세한 레이스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아직 안나와 레이디 휘에리의 공력에 따라갈 수는 없었다. 둘은 평소에도 한시간씩 패션과 보석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대로부터의 복식사와 오래된 보석에 얽힌 정치역사, 현재 사교계의 트렌드까지, 정말 방대한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세리나는 약간 주눅이 든 상태로 앉아있곤 했다. 전략과 검술의 요체에 대해서야 잘 알았지만 이런 류의 상식과 교양에는 그녀가 아예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시종장 호보프가 오베이의 보석 카탈로그를 천천히 넘겼다.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관을 만들어놓자고 하셨습니다. 황자 전하의 것은 황금으로 만들고, 황자비 전하의 것은 백은으로 만들자고요.”
휘에리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거 근사하네요. 에스트레드 전하의 은발과 세리나 전하의 금발에 딱 반대로 어울리겠어요.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장식해서 가능한 화려하게 하면 좋겠군요….아, 계승식 전이라 크기가 큰 건 착용이 안되시겠네.”
말끝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왕 왕관을 만드는 바에야 거대하고 호화로운 왕관을 만드는 게 낫겠다고, 레이디 휘에리는 자신의 취향이 담뿍 담긴 생각을 했다. 하지만 로마니엔의 관습 상 제위를 계승받기 이전의 황자가 일정 크기 이상의 관을 쓰는 것은 관례가 아니었다.
“아뇨, 그게...전하께서 가능한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의아한 얼굴이 된 안나와 휘에리를 향해 호보프는 조심히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지금 이 거실에는 그들 밖에 없었지만.
“어차피 계승식에 쓸 거니 그에 맞게 만들라고요.”
“어머나…”
레이디 휘에리가 미소를 지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그녀는 사교계를 휘어잡는 귀부인이었다. 이런 류의 야망을 지닌 남자는 능력만 따라준다면 언제든 환영이었고, 그래서 에스트레드는 그녀에게 무척 호감가는 남자였다. 안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눈만 굴렸다.
제위 계승은 말 그대로 황제가 제위를 넘겨주는 것이다. 정식 계승이 있기 전까지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눈을 깜박거리는 안나를 보면서 호보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세리나 전하와 에스트레드 전하의 두상을 정확히 재야할 것 같습니다. 온갖 보석과 백은, 황금으로 치장될 관이니 여하간에 하자가 있어선 안되니까요. 미래의 황제와 황후 폐하, 두분 외에는 쓸 수도 없는 관을 만들 것입니다.”
호보프가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이미 그는 금속세공의 장인을 불러들여 황자궁에 들여놓은 상태였다. 어쩐지 알 수 없는 부담에 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전하?”
시종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자비의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를 한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아니, 뭐...별 건 아니고.”
한정된 미래 속의 자신이 생각 나서 그녀는 손을 만지작 거렸다. 지금 두 사람을 위한 금은의 왕관이 만들어진다 한들, 그녀가 관을 쓸 기회는 계승식 한번 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만을 위한 관을 미리 만들어두는 건 낭비일 것 같았다.
세리나는 미소를 짓고 세사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궁 밖을 나섰다. 봄 답게 입었던 분홍빛의 얇은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그녀의 곁에는 전 부관이자 현 호위기사인 하드레드가 따라붙었다.
“잠깐 산책 겸 승마나 할 거야. 자넨 왜 따라오는 거지?”
세리나가 성가신 얼굴로 하드레드를 보았다. 덩치 좋은 청년은 움찔 하다가 입을 내밀었다.
“밀렌 바스트 경께서 명하셨습니다. 두분이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전하를 호위하라고요.”
“밀렌이?”
세리나 리엔, 제1황자의 전 수호기사이자 현 황자비는 혀를 끌끌 찼다. 밀렌이? 라는 단순한 문장 뒤에 네가 나를 호위해? 라는 뜻도 숨어있어서 하드레드는 순간 울컥하려다 참았다. 사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위험할 정도의 공격이면 자네는 이미 죽어있을 텐데.”
라고 세리나는 굳이 사실을 말했다. 하드레드는 콧김을 조금 뿜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요즘 연습도 많이 안하셨고...몸이 예전같지는 않으실 텐데요. 벌써 한달도 훨씬 넘었으니까...하루만 연습을 게을리 해도 몸이 처진다고 하셨잖아요.”
하드레드는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쁜 버릇이라는 건 아는데 맞기 직전까지 입을 놀리는 건 영 고치지 못할 버릇이었다.
“...자네 요즘 기어오르는군?”
세리나는 눈썹을 모았다. 말끔하게 금발을 틀어올린 그녀는, 머리에 꽂은 호화로운 장식 핀만 아니라면 예전의 리엔 경이나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하드레드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세리나는 잠깐 주먹을 쥐었다가 지금 자신이 결혼을 앞둔 신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손을 폈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하드레드는 꾸짖음을 가장한 폭행이 없을 것 같자 조신하게 두손을 모으고 세리나의 뒤를 따랐다.
“에스트레드 전하께선 어디 가신 거지요?”
“수도 시찰을 나가셨다. 요즘 자주 다니시는데, 뭔가 일이 있으신 모양이야.”
에스트레드는 요즘 상당히 자리를 자주 비웠다. 덕분에 결혼식 준비를 하는 시종장 호보프는 희끗한 머리가 탈모까지 올 지경이었다. 무서운 황자에게 제대로 말은 하지 못하고 대신 황자비 세리나에게만 하소연을 했다.
황자의 행적을 세리나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밀렌 바스트와 둘만 훌쩍 떠나 수도를 암행 시찰하고 다닌다는 핑계였는데, 그녀는 대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세리나는 같은 수호기사였던 밀렌은 황자의 외유에 언제나 같이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간 자신만 소외된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않겠어? 네가 따라오면 일만 귀찮아져.”
“아뇨...안됩니다. 저는 밀렌 바스트 경으로부터 엄명을 받았습니다.”
엄명이 아니라 기합을 받았겠지. 세리나는 혀를 찼다. 결연한 하드레드의 얼굴을 보니 떼어놓긴 그른 것 같아서 그녀는 자비로운 척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세가지를 약속해. 그렇다면 데려가주지.”
“약속합니다. 데려가주시죠.”
멍청한...하드레드는 절대 협상이나 계약을 하면 안될 인종이었다. 조건도 듣지 않고 약속하겠다니 천하의 멍청이를 보았나. 세리나는 청년의 눈 앞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첫째, 지금부터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 말 것. 둘째, 내가 하는 일에 방해하지 말것. 셋째, 돌아온 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알아 들었어?”
“...예?”
“약속한다고 먼저 말했지? 자, 남자 입으로 두말 할 텐가?”
세리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가죽 장갑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하드레드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죠, 하고 말고요.”
“착하군.”
피도 눈물도 없는 전 상관은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날렵한 흑마가 그녀를 반기며 콧김을 뿜어냈다. 하드레드까지 말에 오른 뒤, 그녀는 안장 옆에 달린 짐주머니에서 허름한 로브를 꺼냈다.
“흠, 네 건 없는데…”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 정도 덩치가 로브를 뒤집어 쓴대도 꽤나 수상해 보일 것이다. 결국 하드레드의 호화로운 기사단 갑옷과 박차를 전부 압수하고 나서 천옷 상태가 된 그를 끌고, 황자비는 말을 출발시켰다. 레이디 도나 누앤을 보고 온 뒤로 이제 가만히 앉아서 에스트레드의 처분만 바라고 있을 생각은 사라졌다. 그녀는 일단 황자가 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황궁의 작은 문으로 빠져나온 둘은 수도를 향해 달려나갔다.
“어디로 갑니까?”
“닥치고 따라와. 벌써부터 첫번째 약속을 어기는군.”
하드레드의 얼빠진 질문에 세리나가 투덜거렸다. 황자비는 일단 상단 게오르그의 서부 수도 지부로 숨어들어가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