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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32화 (32/142)

<-- 새로운 국면 -->                수도 시찰에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온 에스트레드는 기묘한 위화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긴 은발을 뒤로 넘기면서 마중 나온 황자비의 앞에 섰다. 간소한 녹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세리나 리엔은 평소처럼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에스트레드는 거기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그녀에게서 뭔가 다른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다른 남자의 페로몬이.

세리나의 피부에서 온통 향초의 냄새도 나는 것을 보니 열심히 씻은 모양이었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세리나는 고지식한 기사다. 황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설마하니 다른 남자를 침대에 끌였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손가락과 손목에 얇게 감겨진 붕대를 보고 에스트레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밀렌과 대련이라도 한 건가?”

그는 거대한 원목 테이블의 의자에 앉으며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에스트레드가 그녀의 붕대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프겠는데.”

황자비는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리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녀가 에스트레드의 곁에 가까이 앉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변화였다. 이전에는 황자가 방 안에 있으면 그림자처럼 기척을 숨기고 주변을 방비하던 기사였다. 둘만 있을 때마저 그녀가 드레스 차림으로 무릎이 닿을만큼 가까이 앉는다는 건 세리나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신호였다.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흰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의 크고 따스한 손이 자그마한 그녀의 얼굴을 거의 한손에 담았다. 부드럽지만 군데군데 굳은살이 배긴 황자의 손바닥에 자신도 모르게 뺨을 비비면서, 세리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상냥해진 은청색 눈동자는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참담한 심정으로도 그의 체온을 더 느끼기 위해 몸을 더 가까이 굽혔다. 의자를 당겨 앉아 에스트레드는 아내를 끌어안아 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말하지 않겠다면 더이상 캐묻지는 않겠다는, 온건한 말투였다. 세리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쏟아지는 녹안의 시선.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얇은 눈꺼풀 위로 입을 가볍게 맞췄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오늘 레이디 도나 누앤...레드포 전하의 반려분을 뵈러 갔습니다.”

“...그 여자를?”

어째서냐는 눈빛의 에스트레드를 세리나는 조심히 관찰했다. 레이디 도나가 내뱉은 말들에 의하면 황후와 레드포 로마나는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었고, 거기에는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특히 세리나 리엔, 자신의 어떤 특징들이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잠시 그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었다. 세리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황자를 지켜보았고 사랑해 왔지만 단순히 표정으로 그의 의중을 읽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뭔가 알아낸 게 있었나?”

“고문을 당한 것 같더군요. 말도 어눌하고,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군.”

에스트레드는 비로소 세리나의 몸 전체에서 풍기는 낯선 수컷의 냄새가 레드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마치 수캐가 영역표시라도 하듯 그녀의 몸에 전부 자신의 체취를 뿌려놓은 꼴이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던 건가?”

“예. 레드포 전하는...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저를 들여보내 줬고, 나오는 것도 무사히 나왔습니다.”

거짓말.

레이디 도나 누앤이 상당히 중요한 증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에스트레드는 그보다 세리나의 몸 전체에 흩뿌려진 사내의 냄새가 더 신경쓰였다. 페로몬이란 씻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레드포가 자신의 아내에게 뭔가 음습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에스트레드의 감각으로 침범했다.

“에스트레드님.”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 구석을 꽉 쥐고 있던 그의 손등 위로, 세리나가 가만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어느새 에스트레드의 손끝에서 일직선으로 타고나간 얼음벽이 테이블 전체를 얼려놓고 있었다. 생전 처음 무의식 중에 분노를 표출한 그가 조용히 얼음으로 뒤덮인 자신의 손과 테이블을 내려다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세리나의 녹색 눈동자를 내려다 보면서 에스트레드는 이번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그녀는 굳이 오늘의 일을 그에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의사를 존중해주는 것이 옳을 테다.

“괜찮지, 물론.”

에스트레드는 그녀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황자비는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품 안에 깊이 기댔다. 세리나의 몸에 밴 기분 나쁜 향취를 지우려면 오늘 밤에도 긴 시간을 들여 안아야 하겠지만, 그는 아내를 그저 품에 안고 보듬어주기만 하고 있었다.

*****

결혼식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축제여야 했을 준비 기간은 오르젤 로마나의 죽음과 그에 얽힌 황족들의 물밑 정쟁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였다. 황궁 안 누구도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결혼식에 대해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 비할 만큼 큰 혼약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드포의 증언과 감찰단의 조사, 대공의 분노로 인해 레이디 도나 누앤과의 파혼이 결정되었다. 레드포 로마나의 다음번 혼담 상대는 사람들의 예측대로 슈엔 대공녀였다. 아들을 죽이고 딸을 바친다며 밸러스 대공에 대해 험담이 늘어갔지만 그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들이 죽은 뒤 대공은 뭔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평소 사람들의 입을 단속시키고 실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밸러스 대공은 간데 없었다. 그는 음울한 표정으로 유령처럼 황궁 안을 떠돌았다.

슈엔 대공녀는 불안한 얼굴로 동쪽 황자궁 앞에 서 있었다. 전 반려였던 도나 누앤은 이미 귀양을 가듯 실려 나가 감찰단 쪽의 감옥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아버지 밸러스 대공이 그녀의 손을 잡고 레드포의 황궁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내가 너를 위해 마련한 자리다. 레드포 전하를 성심껏 모셔야 한다.”

“제가 바란 자리가 아니었지요.”

슈엔은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녀는 분노를 감추느라 속에서 울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대공은 슷 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네가 바란 거지. 넌 황자비의 자리를 노렸잖느냐. 아주 어려서부터.”

“에스트레드 전하의 황자비였지요. 이곳이 아니라.”

“어찌 되었든 결과는 똑같아. 그리고 너는 황후가 될 테니까.”

대공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마저도 어딘가 정신이 이상해 보여서 슈엔은 입을 다물었다. 요즘 그녀의 아버지는 확실히 이상했다. 오르젤이 죽어서 그렇다기엔 평소 밸러스 대공은 오르젤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저렇게 사고를 치며 다니다가 결국 어딘가 엎어져 죽을거라는 소리도 많이 했었다.

“네 오라비의 목숨값으로 받아낸 자리란다. 알겠니? 잘 해야 해.”

“...”

사실은 반대가 아닐까?

슈엔 대공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을씨년스러운 레드포의 궁전은 제물이 되기 위해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정문에 서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아도 별로 기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제14황자 레드포 전하.”

“슈엔 로마나 대공녀.”

레드포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대공녀를 따라온 수행원들이 전부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궁 앞에 도열하여 대공녀를 기다리던 시종과 근위대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새로운 안주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공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초라하지만 곧 그대에게 어울리도록 완성될 당신의 궁전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사심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듯 해맑은 그의 환영에 슈엔은 잠시 마음을 놓았다. 사실 레드포 로마나는 유약한 청년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화염 속성의 능력은 에스트레드와 비견될 정도였지만 됨됨이가 약한 그였기에 슈엔은 안도하고 몸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완성이 덜 된 황궁은 정원이 잘 정돈되어 있음에도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였다. 오라비의 시체가 타서 사라졌다는 정원 가운데를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남아있었더라도 그에 개의할 슈엔은 아니었다.

“저 역시 전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슈엔 대공녀는 물망초빛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려 인사하며 우아하게 답했다. 그녀는 물론 레드포 로마나의 황자비로 머물 생각은 없었다. 단지 지금은 잠시 몸을 사릴 생각일 뿐이었다. 세리나 리엔을 끌어내릴 수 있을 때까지, 아주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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