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30화 (30/142)

<-- 새로운 국면 -->

“레이디 휘에리, 레드포 전하의 반려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예상 외의 질문이신데요?”

함께 모여앉아 차를 마시던 레이디 휘에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 탄력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뽀얗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마치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곱게 차려입은 풍성한 살구색 드레스와 어울려 순진하고 사랑스러웠지만 보기만 그렇다는 걸 아는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황궁에서 제가 여쭤볼 사람은 레이디 밖에 안계시다는 거 아시잖아요. 왜, 레드포 전하가 새로운 반려를 맞으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럼 그 분은 어찌 되는 건가 싶어서…”

“그녀가 안쓰러우신가요?”

휘에리는 상냥하게 웃었다. 귀족의 숙녀라기엔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는 황자비는 사실 마음이 약한 구석이 많았다. 내쳐지는 젊은 여성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그녀의 녹안에 묻어나와서 중년의 백작부인은 부드러운 기분이 되었다. 보통 귀족가의 사람들에게선 볼 수 없는 미덕이었으니까.

“누앤 백작가의 차녀로, 이름은 도나 누앤이에요. 로마나 황가의 아주 먼 방계인데 운좋게 많은 자질을 이어 받았죠. 뭐, 운이 좋은 건지 어쩐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덕분에 백작가에서는 많은 지참금을 받고 그녀를 황실에 보냈으니까요.”

레이디 휘에리는 명확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도나 누앤은 일종의 제물로 황실에 보내진 것이 맞았다.

성인이 되기 전 소년 시절의 레드포 로마나는 지독히 약해서 누구도 그가 제대로 자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황가의 자제들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에 걸쳐 극도로 심한 고열을 동반한 성숙열을 거쳐야 했다. 서로간 약한 자들을 먼저 제거하는 험난한 황궁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신체적으로 성숙열을 제대로 통과하는 확률은 셋중 하나도 되지 않았다. 키나 체격도 제대로 자라지 않았던 레드포 로마나가 성인이 되지 못하고 사망하리라는 예측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결약을 맺었던 황자가 죽으면 반려에게는 두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작은 영지를 받아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것. 당연히 영지를 받아 내려가는 게 이득인 듯 했지만 그렇게 지방으로 내려간 미망인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죽고 영지는 다시 황가로 회수되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부검의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레이디 도나 누앤은...레드포 전하의 성장기 페로몬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죠. 워낙 불안정한 분이었으니.”

세리나는 휘에리가 도나 누앤을 황자비로 부르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휘에리가 웃었다.

“이미 재결약이 결정되었어요. 공식적으로 선포는 되지 않았지만...상대도 아직 고려중인 듯 하구요. 레이디 도나는 더이상 황자비 전하로 불릴 수가 없어요.”

“상당히 빠르게 결정되었네요…”

“사실 원래 반려를 내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은 아닌데 레이디 도나가 뭔가 용의선상에 올라서 더 빨리 결정되었다더군요.”

“용의선상이요?”

“오르젤 로마나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어요.”

차를 들던 세리나의 손이 잠깐 흔들렸다. 찻물이 넘쳐서 드레스가 젖었다. 시중을 들던 안나가 얼른 손수건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닦고, 찻잔을 닦았다. 세리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 건은 거의 미결로 종결된 게 아니었나요?”

“그랬는데, 추가 조사 결과 감찰단에서 레드포 전하의 동부 황자궁 쪽으로 향하는 핏자국을 발견했어요. 수사한 바로는 레이디 도나가 오르젤과 간통을 하려다 일이 여의치 않자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고 하더군요.”

“그런…”

“믿을 수 없죠?”

사실 저도 그래요, 라고 말하며 휘에리가 소근거렸다. 불과 며칠 사이 수사 결과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 가운데 레드포 로마나의 증언이 있었고, 그는 자비롭게도 동부 황자궁의 정원을 수색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정원 한가운데 검게 타들어간 자국과 전소된 단백질의 자국을 발견한 감찰단은 결국 레이디 도나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명분 없는 재결약에 명분을 부여한 거죠. 사실 뭐라도 갖다 붙여야 재결약이 쉬워지니까...밸러스 대공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해요.”

“...”

“재결약은 드문 일이니까요. 어떤 경우라도 죄목을 붙여 전 반려를 내쫓거나 구금해버리죠. 추가적인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전 반려의 존재만으로도 분란의 소지가 존재하니까.”

세리나는 자신 역시 계승식 후에 물러날 반려라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초조함에 입술을 물었다.

“지금 레이디 도나는 어디에 있나요?”

“아직 범인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동부 황자궁에 그대로 있을 거에요. 비록 갖혀 있겠지만요.”

*****

에스트레드는 수도 시찰을 위해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세리나는 보석과 레이스를 모두 내려놓고 가능한 간소히 차려입었다. 짙은 색의 가벼운 드레스와 굽이 낮은 신발. 그녀는 소매 안의 나이프를 다시 한번 만졌다.

가벼운 산책이나 다녀오겠다며 시녀 안나도 떼어놓고 세리나는 동부 황자궁으로 향했다.  밀렌 바스트는 황자의 뒤를 따랐을 테니 감시 받을 염려는 없었다.

“형수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궁 안에서 레드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나는 숄을 걸친 어깨를 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을 만나러 왔습니다.”

“흠.”

레드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녀가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디 도나...아직은 제 아내죠.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시죠?”

“몇년 전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생김새가 많이 달라졌을 수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청년이 경쾌하게 웃었다. 별 거 아니라는 투였다.

“지금은 지하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간통을 하려 한데다가 귀족 살해 용의자라서요. 황자궁에 그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었죠.”

“알겠습니다.”

세리나는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레드포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지만 일단 그의 반려는 만나봐야한다는 생각이 더 먼저였다. 레드포는 시종 한명을 불러 황자궁의 지하로 세리나를 안내하라 지시했다.

말이 없는 시종은 묵묵히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인도했다. 화려한 홀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길고 깊었다. 설마 황자궁 홀의 바로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해서, 세리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지하 감옥과 비슷한 수준의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맨 앞의 철창 앞에 한 여자가 앉아있는 것은 보였다.

“레이디 도나, 제1황자비 세리나 리엔께서 오셨습니다. 세리나 전하, 레이디 도나 누앤이십니다.”

시종은 허리를 굽히고 뒤로 물러섰다. 여자가 움칠거리며 철창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고 세리나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생김새가 변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한번 본 일이 있었던 도나 누앤은 생기 없지만 가늘고 연약한 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났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집으로 돌려보내주세요…”

여자는 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입술 절반이 짓물러 있었다. 세리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귀를 가져다 댔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빨을 꽤 많이 뽑아낸 것 같다고 세리나는 생각했다.

“가, 가고싶어요...집에…”

이렇게까지 되게 만들 이유가 있는 건가? 손발톱도 군데군데 빠져있었다. 세리나는 눈썹을 모았다. 차라리 단번에 목을 베면 벴지, 이런 건 그녀의 허용 범위를 지나 있었다. 전쟁 중 정말 어떤 끔찍한 일이라도 견뎌냈고 목격했지만 세리나는 고문을 하느니 차라리 목을 베는 주의였다.

“진정해요, 레이디 도나. 자, 숨을 좀 쉬고…”

여자가 격하게 흐느끼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세리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도나 누앤은 피딱지가 엉겨붙은 손을 철창에 감고 애원했다.

“집에 보내주세요...벌써 너무 오래 됐어요. 여기에 있은 지 너무 오래됐어요…”

‘...오래 됐다고?’

세리나는 멈칫 했다. 레드포가 결약을 맺은 건 오년 전이었다. 당시에는 세리나와 에스트레드가 동부 내란 진압에 참전 중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정황은 알지 못했다. 스물한살의 세리나가 수도로 돌아왔을 때 도나 누앤의 얼굴을 보았으니, 그것이 삼년 전이었다.

‘용의선상에 올라선 게 불과 며칠이 되지 않을 텐데...설마 그 이전부터 구금되었던 건가.’

도나 누앤은 눈을 번쩍거렸다. 그녀는 코를 킁킁대며 허공에 퍼진 향기를 맡았다. 세리나의 페로몬을 알아채고, 그녀의 눈이 빛을 냈다.

“당신, 당신도, 당신도 혼혈이죠? 그런 거죠? 당신도 이곳에 끌려와서...그런 거죠?”

세리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혼혈이라는 걸 냄새만으로 알아챈다는 건가…? 그보다, 당신도라니, 그렇다면...’

순간 도나가 숨막히는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앉은 채로 허겁지겁 뒤로 도망가는 여자의 모습에 세리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내려온 레드포가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보고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형수님. 올라가시지요.”

“레이디 도나와 아직 대화를 충분히 못나눴습니다.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이곳의 주인은 저니까요.”

레드포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세리나는 설득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도나 누앤이 덜덜 떨며 횡설수설 신음처럼 내뱉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잘못했어요, 제발 더이상은, 너무 오래됐어요, 집에 가고싶어요, 이런 냄새가 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에요, 내 피를 전부 다 드릴테니까 보내주세요, 내 체액을 전부 다 가져가세요…

처절한 애원들이 귓가에 이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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