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29화 (29/142)

<-- 새로운 국면 -->

“...무슨 일로 온 거지?”

“황자비 전하도 뵐 겸 인사차 방문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황자는 잠시 눈썹을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라고 해.”

잠시후 황자 부부는 손님 접대용 사실에 레드포 로마나와 마주앉았다. 에스트레드는 소파에 깊이 몸을 파묻고 앉아 조용히 레드포 쪽을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에 유약한 인상의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세리나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뵙네요, 형수님. 아,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지요?”

“네, 아, 뭐…”

형수님이라는 호칭이 지독히 낯설어서 세리나가 잠깐 당황했다. 에스트레드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 형이고, 내 아내니까 당연하지.”

“그렇네요 에스트레드 형님. 결약도 완전히 맺으셨고…”

레드포는 살갑게 말하면서 공기 중의 냄새를 맡는 척 코를 킁킁댔다. 둘에게선 평소보다 더 진하게 페로몬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에스트레드 쪽은 거의 의도적으로 짙게 엉킨 페로몬을 거의 뿜어내다시피 했다. 은발의 황자는 본능적으로 레드포를 견제하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

청년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미세하게, 에스트레드 주변의 온도가 내려갔다. 세리나는 둘 사이의 이상한 긴장감을 알아챘지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레드포가 혹시라도 에스트레드를 공격할까, 긴장하며 소매 속의 나이프를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레드포는 활짝 웃었다.

“형님은 항상 강한 결약을 유지하시는군요. 저는 반려가 약해서 아무래도 힘이 드네요. 결약을 맺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도…”

아쉽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서 악의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에스트레드의 대답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래서 슈엔 대공녀와 새로운 혼담을 진행하는 것이냐?”

“말하자면 그런거죠. 뭐,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요.”

레드포 로마나는 차를 한모금 마셨다. 현재의 반려를 내친다는 이야기인데도 그는 흔들림 없이, 마치 식사 메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네 현재 반려는 동부 출신의 누앤 백작가 차녀였던가?”

“정확하게 기억하시네요. 맞습니다. 애초에 잘 골랐어야 했는데...너무 약해요. 예쁘긴 하지만.”

세리나는 황궁의 동향에 민감하지 못했지만 레드포 로마나의 반려는 기억하고 있었다. 창백하고 연약해 보이는 미인.

“성장기 페로몬 안정화에는 도움이 되긴 했는데...그 이상은 안될 것 같아요.”

레드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십대에 반려를 결정했던 레드포는 자신보다 연상의 여인을 반려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상당히 잘 어울렸고, 여자 쪽의 가세가 상당히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이 철없는 풋사랑에 빠져 결약까지 가게 되었다고 로맨틱하게 상황을 그려냈다. 하지만 그게 단지 페로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라니.

“형수님께선 강하고 미인이시고. 잘 만나셨어요, 형님.”

청년은 호의적인 눈빛으로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어깨를 감아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허리를 감은 손이 신경쓰여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은발의 황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은청색 눈동자를 나른하게 좁히며 말했다.

“맞아. 두번 일을 할 건 아니지.”

이번에는 레드포의 밤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재미있다는 듯 눈알을 굴리던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평온했다. 하지만 세리나는 물밑으로 두 남자의 신경전을 느낄 수 있었다.

칼을 맞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그럼 형수님도 뵈었고, 이만 저는 일어날게요.”

청년은 산뜻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황자비가 일어서려 했지만 황자는 아내의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색스럽게 일어서다 만 자세가 된 세리나가 당황한 미소를 지었다. 레드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형님이 섭섭하게 하거든 제게 오세요. 형수님 같은 미인이라면 언제든지 받아드립니다.”

“....”

에스트레드의 은청색 눈동자에 날이 서고, 그의 주변 온도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몸을 침범하는 한기에 레드포가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빙글거렸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너무 정색하시네요.”

막내 황자는 손을 한번 젓고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에스트레드는 말없이 세리나를 끌어 자신의 품 깊숙히 안았다.

“클리스보다 훨씬 악질이야.”

잠시의 침묵 끝에 에스트레드가 내놓은 말이었다. 그가 끌어안은 품 안에서 세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스 로마나는 알기 쉬운 타입이었다. 언제나 탐욕에 가득차 있었고 걸핏하면 악의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래서 그 악의가 어디로 향하는지 파악하기 쉬웠다. 또한 세간의 평가 상, 단순 무력으로만 따져도 클리스 로마나는 세 형제 중 가장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제위 계승은 결국 얼음과 불의 대결이 될 것이다. 그것이 대부분이 예측하는 바였다.

“제 어미와 뭔가 꾸미고 있어. 좋지 않은 기분이군.”

에스트레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는 황후와 레드포 로마나가 진행하는 일의 윤곽을 꽤 많이 파악해가고 있을 것이다. 세리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는 언제나 일을 조각조각 나누어 처리했다. 모든 정보를 통합해 알고 있는 자는 에스트레드 자신 한명 뿐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세리나나 밀렌 바스트에게도 정보의 전체를 보여주는 일은 좀체 없었다.

“그나저나 클리스가 생각보다 조용하군.”

“그렇습니다. 안나와 레이디 휘에리가 소문을 전해주는데, 자신의 궁 안에 틀어박혀 전혀 움직임이 없다고 하더군요.”

세리나는 생각에 잠겼다.

“레드포 로마나 전하의 현 반려는 어떤 분입니까? 아주 조용한 분이었다고 기억하는데요.”

“작고 약한 여자다. 기울어져가는 누앤 백작가에서 거의 팔아넘기다시피 했지. 그때는 아무도 레드포가 무사히 성인이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레드포 전하는 그 분을 버릴 생각이신 거겠지요.”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한번 맺은 결약은 가능한 안정시키는 것이 좋지만 그 여자가 아무래도 너무 약한 모양이지.”

얼굴만 아는 그녀가 안쓰러워져서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번 황자와 결약을 맺었으니 버림 받으면 재혼이다. 이미 혼인 적령기도 지나버린 때라 누군가의 후처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레드포의 반려는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곳이 있을까? 세리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따르는 기사지만 황자는 정보를 독점한다. 어떻게 되어가는 일인지 알기라도 하고싶었다. 어쩌면 레드포의 반려 정도는 만나봐도 될지 모른다. 어차피 버림 받을 사람일 테니까.

*****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할 수 없어요!”

밸러스 대공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앞에서 핏대를 세웠다. 아무리 공식 알현이 아닌 사실에서 이루어진 접견이라지만, 그의 행동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공은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의절한 자식이라지만 하나 뿐인 아들이 살해당했다. 오르젤 로마나는 골칫덩이였지만 아들이었고, 더 나아가 이 사건은 대공가의 권력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었다. 흠집난 권위에 더 분노하여 밸러스 대공은 발렌2세 앞에서도 성난 짐승처럼 방 안을 배회했다.

황제의 뒤에 서있던 황후 라일리아가 우아하게 물었다.

“감찰단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낸 바가 없었나요?”

“예, 없었습니다! 그 멍청한 새끼들은 도무지 일을 할 생각을 않거든요! 그 빌어먹을 시녀를 고문해서라도 빨리 입을 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고문은 직접 했잖아요.”

사실을 지적하는 황후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면서 대공은 손을 비볐다.

밸러스 대공의 별명은 하수도의 쥐새끼였다. 그만큼 실리를 따라 어느 쪽이든 재빠르게 따라가는 성격이었다. 본인은 명분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명분을 세우지 못할 만큼 이익만을 챙긴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슈엔과 혼약을 맺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등 돌리지 않을 거라는 에스트레드의 예측은 정확했다.

하지만 지금, 밸러스 대공은 상처난 가문의 권위에 이성을 잃었다. 쥐새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실리를 챙겨가며 쌓아온 가문이었다. 감히 대공가의 핏줄을 살해하는 자가 있다니, 그것도 심지어 황궁의 정원에서-그리고 그자를 잡아내지 못하다니, 그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사건이 벌어진 기분에 밸러스는 눈이 뒤집혔다.

“이 사태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제게 힘을 빌려주셔야 합니다! 이건 대공가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로마니엔 제국에 대한 도전이에요!”

황후는 전혀 거기에 동감하지 않는 듯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글쎄...내가 범인을 찾아내어주면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건가요?”

밸러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에게는 뭔가 기묘한 신뢰가 있었다. 그녀의 무저갱처럼 깊고 검은 눈을 들여다 보면서 그는 속으로 곰곰히 생각했다.

사실 못할 것도 없다. 현재 서열자들 중 에스트레드의 세력과 힘이 가장 크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황후의 지지를 등에 업은 레드포 로마나 역시 거의 동등했다. 황제는 거의 방관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황후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원래라면 이렇게 빨리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후와 시선을 마주하던 밸러스 대공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은 숙고해서 내렸을 결정이, 그녀의 앞에서 한순간에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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