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26화 (26/142)

<-- 뒷면의 길 -->                “나는 더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형수님. 저런 것은 빨리 치워야지요.”

세리나는 침묵했다. 레드포 로마나는 손을 움직여 작은 불꽃을 피워내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불꽃 수십개가 유영하며 반짝이는 빛을 뿌려내었다. 검은 하늘 밑으로, 갈색 머리의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화염을 가지고 놀았다.

정원 한가운데에서 마수의 시체는 검은 흔적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맨발로 다가가 검은 재만 남은 자국을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순간적인 고열에 완전히 타버려, 단단했던 갑각 조차도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나의 궁이라 무척 누추합니다만,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들고 가시겠습니까? 형수님께 대접할 좋은 차가 있습니다.”

황자비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보았다. 검으로 가차없이 잘라낸 드레스는 무릎 위에서 달랑거렸다. 그녀의 눈치를 채고, 레드포가 재빨리 말했다.

“그대로 돌아가시기엔 아랫사람들의 눈이 있죠. 여성용 가운을 한벌 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 안으로 검기를 거둔 나이프를 밀어넣었다. 그 나이프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소년은 자신의 황자궁 안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궁은 을씨년스러웠다. 거의 완성이 되어 조명도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완전히 마감이 되지 않은, 덜 지어진 건축물 특유의 모습이 있었다. 시종의 수도 중앙궁이나 에스트레드의 궁보다 현저히 적었다.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조차도 없이 죽은 듯 고요한 공간이었다.

세리나는 시녀 한명이 가져와 올린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한 뒤 홀로 나섰다. 짙은 보라색의 가운은 몸에 휘감기는 재질로 되어 다소 불편했다. 말끔히 머리를 모아 묶어올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이닝 룸의 길고 긴 테이블에 앉은 레드포 로마나였다.

“아름다우시군요. 드레스가 잘 어울립니다.”

갈색 머리의 소년은 티없이 웃었다.

“앉으세요, 형수님.”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앉을까를 고민하다가 세리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레드포의 맞은편에 앉는 것을 택했다.

‘증거 인멸이라.’

그대로 뒀다면 마수의 시체만이라도 남겨 조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르젤 로마나는 비록 의절당했다지만 밸러스 대공의 아들이자 제5황자 클리스 로마나의 측근이었다. 그가 죽은 것이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인간이 마수로 변태해 사망한 사건이다. 반드시 차후에 큰 문제가 될 사안이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가장 마지막에 접한 것이 세리나였으니까…

‘최소한 내 검으로 인한 상처는 확인하지 못하게 된 건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체조차 사라졌으니 증인은 강간당하려다 도망친 여자 한명 뿐이었다. 그녀가 만약 세리나 리엔을 지목해서 오르젤 로마나의 살인자라고 고발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제 최소한의 증거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망간 여자 역시 오르젤 로마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리는 없으니까.

레드포 로마나의 의중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거대한 마수를 그는 손가락을 한번 휘저어 불태워버렸다. 어차피 세리나가 처치하기 직전이었는데도 그랬다.

유령같이 존재감 없는 시종과 시녀들이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부드러운 온기가 싸늘한 밤바람에 식은 손을 데웠다. 세리나는 찬찬히 홀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잘 장식된 중후한 분위기의 실내였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어둡고 불쾌한 공간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받았던 적은 만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던 동부 내란의 헤타이아 반도 전투 정도였다.

“먼 곳에서 들여온 차입니다. 시음해보세요. 마음에 드실겁니다.”

세리나는 말없이 찻잔 안을 들여다 보았다. 붉은 찻물이 흰 도기 찻잔 안에서 출렁였다. 그녀는 한모금 찻물을 머금었다. 달콤한 맛이 혀 끝을 감돌았다.

“달콤하네요.”

“붉고 단맛이 돌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에요.”

“네, 맛있어요. 그런데…”

황자비는 눈을 들어 레드포 로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녹색 눈이 직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레드포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아까의 그 마수 말입니다. 어째서 태우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어차피 돌려 말하는 것에는 재주가 없다. 그녀는 직구로 물어보기로 했다.

“저는 황궁 안에서 이 괴상한 생명체를 발견했으니, 당연히 조사를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황자님께서 태워버리시는 바람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사실 이상한 점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오르젤 로마나가 변태한 마수는 성인 남성의 두배가 넘는 덩치에 수많은 갑각에 쌓인 다리들로 미친듯이 레드포의 궁을 향해 달려왔다. 마치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레드포 로마나는 마수를 보고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화염으로 불태워버렸다. 검은 재만이 남은 정원에서 세리나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 아까 말씀드렸죠. 저는 더럽고 흉측한 것을 싫어한답니다.”

“하지만 그건 마수였습니다. 확실히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고, 황자님도 그걸 느끼셨겠죠.”

“그러게 말이에요. 갑각류의 마수-마주친다면 일반인들은 백이면 백 사망하는 존재. 하지만 형수님께선 상당히 잘 싸우시더군요.”

레드포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세리나는 표정을 지운 채 그를 마주 보았다.

“마수는 인간을 사냥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마수를 사냥했어요.”

소년의 눈초리가 순간 매서워졌다.

“마수를 사냥하면서 이곳, 나의 궁까지 몰고 온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물어봐야하는 건 오히려 그쪽이군요.”

“제가 몰고온 것이 아닙니다. 마수가 달린 곳이…”

“마수가 달려온 곳이 우연히 여기였을 뿐이다? 희한한 말이네요. 저 넓은 황궁 뒤 숲과 산을 모두 놔두고, 굳이 이 좁은 동쪽의 궁으로?”

레드포 로마나가 웃었다. 세리나 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마수는 이곳으로 달려왔으니까요.”

“나도 내가 태운 이유는 모릅니다. 나의 궁 안에 더럽고 흉측한 것이 공격해 들어왔으니까, 가장 깨끗하게 소각해버린 겁니다.”

빙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소년은 손가락 끝에서 다시 화염을 불러내었다. 작은 불꽃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춤을 춘다. 에스트레드가 극한이라면 레드포는 극염. 다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온도의 불꽃도 그에게는 장난감이나 다름 없었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레드포 로마나는 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한모금 더 차를 마시고 일어섰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스트레드님이 기다리실테니.”

“성격이 급하시네요.”

“저보다 에스트레드님이 더 급하시죠.”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세리나는 몸을 돌리려 했다. 레드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는 어머니께 당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슈엔 대공녀는 재미가 없으니까요.”

여자가 소년을 돌아보았다. 의문을 담고 있는 눈에 레드포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레드포 황자님.”

세리나는 화를 참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신은 가성비가 좋거든요. 예쁘지, 강하지, 게다가 그 페로몬…”

“....”

“아, 그거 알아요? 당신 향기가 천일화와 비슷하다는 것. 황족들이 매일 몸에 뿌리고 다니고, 애타게 찾는 향기죠. 우리를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페로몬.”

처음 듣는 말에 세리나는 무표정하게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에스트레드 형님은 눈이 참 밝죠. 십년 전에 열네살 어린 소녀에게서 벌써 그 냄새를 맡고 독점해버리다니…”

“실례지만, 먼저 돌아가보겠습니다.”

황자비는 그의 말을 끊고 돌아섰다. 레드포 로마나는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통통 두들겼다.

“이 차의 산지, 알고 있어요?”

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드레스를 끌며 홀을 나섰다. 짙은 보라색의 폭 넓고 풍성한 가운 자락이 밤의 정원으로 사라져갔다. 레드포는 노래하는 것처럼 음율을 넣어 혼잣말을 했다.

“이 찻잎은 제국의 동쪽에서 재배한답니다...원래 푸르고 맑은 찻물을 우려내는 잎이었지만, 오년 전 어느날부터 붉은 물이 우러나온다고 하지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말끝에 레드포 로마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황후의 보라색 드레스가 잘 어울리던 세리나 리엔을 생각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실리를 따지는 에스트레드가 선택한 반려다웠다. 살아있는 천일화, 자신의 결정에 조금도 누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부속같은 존재.

“재미있는데.”

흥미로운 얼굴로 레드포 로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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