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면의 길 --> 검기가 맺힌 나이프를 돌리면서 세리나가 다시 한번 그의 목께를 걷어찼다. 짐승이 도살되는 소리를 내면서 오르젤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명색이 로마나의 혈통이니 회복 같은 건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세리나는 마음 놓고 나이프 뒤쪽 자루로 오르젤의 뒤통수를 찍었다.
“너 같은 건 싸움 대상이 아니라 도살 대상이었다는 얘기지.”
하지만 잠시 뒤, 남자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파열되어 피가 흐르는 오른쪽 안구와 멀쩡한 왼쪽 안구가 그로테스크했다. 하나 남은 눈알을 빛내면서 오르젤이 중얼거렸다.
“황자비 전하. 응? 냄새가 좋아. 젖가슴 한번 빨아볼까? 응?”
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남자의 눈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라면, 감히 에스트레드의 반려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세리나에게 이렇게 덤빌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중에 저런 눈을 할 수는 없었다.
오르젤이 탐욕으로 가득찬 눈을 희번득이며 세리나의 발목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갈퀴처럼 탐욕스럽게 뻗어오는 손 위로, 세리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기를 세운 나이프를 내려꽂았다.
비명을 지르려는 사내의 입에 찢어진 여자의 옷자락을 처박으며 세리나는 혀를 찼다. 넓디 넓은 황궁 정원의 구석이다. 오늘은 난잡하게 노는 무도회의 날이라 호위병들도 기강이 흐트러져 있었다. 손 절반을 동강내버리고 세리나는 몸을 일으켰다. 황궁의 호위가 이래서야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사람이 죽어가도 모르다니. 그녀가 아직 기사 신분이었다면 오늘밤 당장 호위병들은 죽도록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세리나는 막힌 비명을 토해내는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정말 이걸 죽일까…’
오랜만에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황궁에 돌아온 이후 손이 오랫동안 쉬었지만 세리나 리엔은 동부 내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군인이다. 그것은 그만큼 많은 피를 손에 묻혔던 전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살인은 중독적인 데가 있어서 한번 인간의 목을 베었던 자는 그 맛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세리나는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손의 절반이 잘린 채 고통에 죽은 비명만을 지르는 오르젤 로마나에게 다가갔다. 드레스 자락이 길게 바닥에 끌리며 여자의 뒤를 따랐다. 나이프에 맺힌 새파란 검기가 세리나의 마음에 맞추어 넘실대었다. 세리나는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오르젤의 몸에서 그물같은 그림자가 뻗어나왔다.
남자의 몸이 삐걱거리며 격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몸의 형태가 완전히 변화했다. 몸통 옆에서 길쭉한 갑각류의 다리들이 튀어나왔다. 수없이 많이 튀어나오는 다리들에 세리나는 뒤로 훌쩍 뛰어 피했다. 다리의 갑각에 날이 서 있어 주변 수풀과 나무들이 마구 베어져 넘어졌다.
“저건 뭐지…?”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오르젤은, 아니 한때 오르젤이었던 괴물은 몸을 뒤로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 거죽이 뒤집어지며 거대한 눈 두개가 나타났다. 잠자리를 닮은 눈이 둥글게 회전하며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마수?”
괴수 중 마법의 영향으로 이상상태 변이된 것들을 마수라 불렀다.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사고로 풀려나와 숲에서 자가 번식한 존재들이었다. 맨 처음, 숲속에서 에스트레드가 이성을 잃고 정욕에 휩쓸렸을 때도 마수의 공격 때문이었다.
끼에에엑 하는 이상한 소리가 마수의 목구멍으로부터 새어나왔다. 세리나는 손에 쥔 나이프에서 검기를 더욱 거세게 뽑아내었다. 인간이 마수로 변이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생각은 나중이다. 그녀는 전장을 거친 군인으로써 얻은 경험으로 상황을 심플하게 정리했다.
목표는 하나다. 최선 생포, 차선 살해.
여자는 긴 드레스 자락을 단번에 잘라내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걷어차 벗어버리고, 그녀는 넘실거리는 푸른 검기를 마수를 향해 들었다. 검이 있는 한,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는다. 세리나는 클리스 로마나의 습격을 기억하며 이를 갈았다.
마수는 거대한 앞다리를 낫처럼 휘둘렀다. 몸을 숙여 피하면서 세리나는 마수의 다리 틈으로 파고 들었지만, 몸통에서 또 하나의 다리가 터져나왔다. 갑각의 날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몸을 빙글 돌리며 순간 검기를 지웠다. 검을 노리고 달려들던 다리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세리나는 마수의 배에 뭉툭한 나이프를 대고 검기를 순간적으로 폭발시켰다. 퍼걱 하고 단단한 마수의 갑각이 검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쿠워억 하는 죽음의 비명이 마수로부터 샜다. 마수는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반인으로는 엄두도 못낼 엄청난 속도였지만, 세리나는 그대로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잘라낸 드레스 자락이 무릎 위를 스쳤다. 오랜만의 전투-혹은 사냥에, 아드레날린이 뇌 속으로 범람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저 밑에서부터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발 밑에 바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에스트레드나 클리스 같은 1급의 황족들에는 터무니 없게 미치지 못하지만, 세리나 역시 공으로 수호기사를 십년이나 해먹은 게 아니다. 그녀의 달리기가 곧 바람을 타고 수배 속도를 더했다.
‘동쪽...동쪽으로 간다. 거기는…’
중앙궁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제1황자 에스트레드의 궁, 서쪽에는 제5황자 클리스의 궁, 동쪽에는 막내 제 14황자 레드포 로마나의 궁이 있다. 무사히 성인이 되면 궁을 하사받기 때문에 레드포 로마나의 궁은 아직 채 완성도 되기 전이었다.
“호위병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
숨이 턱까지 차면서도 그녀는 호위병들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불평했다. 동쪽 궁의 높은 철제 담을 지나고 있는데 호위병은 씨알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궁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언젠가 한번 단체로 치도곤을 내야겠다고 세리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동궁까지 단숨에 달려온 마수가 갑자기 정원 한가운데서 덜컥 멈춰섰다. 바람처럼 달려온 세리나는 숨을 가라앉히면서 그 뒤로 다가갔다. 잠자리 같은 거대한 두 눈을 삐걱이며 돌리던 마수가 수십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세리나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나이프에 기운을 갈무리했다. 뾰족한 레이피어의 형태로 변한 새파란 검기가, 세리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생포는 아무래도 무리다.’
마수는 이미 성인 남성의 두배 크기였다. 가슴 한가운데를 뚫어놨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최대한 시체를 보존해서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세리나 리엔은 목표를 수정했다. 그녀는 검을 두 손으로 들었다.
그때였다.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리엔 경.”
살기에 가득 차 있던 여자의 눈이, 애띤 소년의 목소리에 제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있는 예상 외의- 혹은 예상대로의 인물에 세리나는 눈을 치떴다. 리엔 경이라. 사실 한달도 안되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듣는 호칭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눈 앞에 있는 소년-사실 성년이 넘었지만-의 모습을 보고 망설이다가 살기를 갈무리했다.
“...말하자면, 형수님이시겠군요. 전에도 뵙긴 했지만 이제 위치가 달라지셨으니 새로 인사드립니다. 레드포 로마나입니다.”
제14황자 레드포 로마나. 이제 막 성년을 넘긴 황자는 뒷짐을 지고 서서 가볍게 목례했다. 세리나는 마주 드레스를 올리려다가 자신이 잘라낸 스커트 자락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녀는 기사의 예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행색이 이러해서 죄송합니다. 에스트레드 전하의 반려, 세리나 리엔입니다.”
레드포 로마나는 곁눈질로 정원 한가운데 선 마수를 바라보았다. 미친듯이 질주하던 흉측한 괴물은 끼익거리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기묘하게 얌전해진 마수를 보면서 세리나는 검을 다시 들었다.
“전하의 궁을 시끄럽게 하여 죄송합니다. 저것을 쫓아 왔는데, 하필이면 이쪽으로 와서...막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별 말씀을. 이제 기사가 아닌 황자비시니 그런 염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저것은 제가 빨리 수거하여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아니, 잠깐!”
레드포 로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마수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여 폭주하며 타올랐다. 엄청난 화염의 불꽃이 밤하늘로 솟아올랐고, 마수의 마지막 단말마가 메아리를 쳤다. 세리나는 외쳤다.
“잠깐만! 저것은 인간으로부터 변화했습니다! 조사를 해야한단 말입니다! 불을 꺼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레드포가 해사하게 웃었다. 갈색머리의 애띤 청년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완전히 재가 되어 스러지는 거대한 마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열기가 너무 심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세리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막내 황자를 노려보았다. 에스트레드가 얼음의 황자라면 레드포 로마나는 폭염의 황자. 그가 불러낸 불꽃은 상상을 초월하도록 파괴적이었다.
“전하! 저 마수의 시체라도 남겨주십시오, 제가 조사를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 궁에 들어왔으니 저의 소유물. 어떻게 처리하든 제 소관이지요.”
레드포 로마나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완전히 새카맣게 타버린 마수는 재만 남아 산산히 부서져 내렸고, 그나마도 땅 아래로 전부 꺼져버렸다. 세리나는 허망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