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면의 길 --> 발코니에 잠시 나갔다가 돌아온 황자비는 지치고 창백해 보였다. 사람이 가득차서 춤과 열기로 터져나갈 듯한 무도회장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황자 에스트레드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리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귀족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리나는 얼굴을 붉히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에스트레드는 주변에 보이기 위해 이렇게 공개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다. 실없는 기대를 지워버리면서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황자 전하와 세리나 리엔 님을 뵙습니다.”
음악이 고조되며 귀족들 대부분이 춤에 휩쓸리고 있었다. 한 여자가 다가와 드레스를 들어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이 무도회에서 보리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슈엔 대공녀.”
세리나의 눈이 커졌다. 슈엔은 둘에게서 풍겨오는 진한 페로몬의 향에 잠깐 눈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바로했다. 이제 그녀는 세리나를 하대할 수 없었다. 아직 결혼식을 진행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반려라고 공언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슈엔의 풍성한 검은 곱슬머리가 길게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이군, 대공녀. 내게는 좋은 소식이고, 그대에겐 좋지 않은 소식인가?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 에스트레드 전하.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냉정하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오, 하지만 그대도 새로운 젊은이를 찾았다던데?”
“제 뜻은 아닙니다만.”
대공녀는 턱을 세웠다. 에스트레드가 픽 웃었다. 슈엔이 황자에게 애정공세만 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기묘한 방식으로 가까웠다. 어떤 사람에게도 무례를 허용하지 않는 에스트레드가, 슈엔에게만은 관대하게 굴었다. 둘은 세리나가 황궁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묘하게 소외된 기분이 되어서 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사실로 자리를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예상 외의 요청에 황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나의 손을 끌어당기려는 에스트레드의 손짓을 슈엔이 제지했다.
“전하께만 드릴 말씀입니다. 독대를 요청합니다.”
“...내게?”
에스트레드는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잠깐 세리나를 돌아보았다.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상으로라도 그의 반려이니 반응은 해줘야 했다.
슈엔은 읽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춤과 열기로 가득찬 무도회장을 떠나 황자는 곧 슈엔 대공녀와 함께 무도회장 옆 사실로 사라졌다. 그의 뒤에서 밀렌 바스트가 잠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황자와 황자비 중 누구를 경호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것 같았다. 그의 당황하는 얼굴을 본 세리나는 손을 저었다.
“넌 전하의 수호기사다. 빨리 따라가.”
“...헷갈리는구만.”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어디까지나 역할이니까. 그리고 너 내 실력 못믿는 거냐?”
“암습이란 건 실력에 상관 없이 위협적이잖아.”
“긴 말 필요 없고, 빨리 전하를 따라가.”
망설이던 밀렌 바스트는 얼른 기척을 감추고 에스트레드가 떠난 복도로 모습을 감췄다.
지난 사고 이후 세리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에스트레드의 반려 자리란 목숨의 위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자리다. 그가 자신에게 역할을 제의했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슈엔도, 에스트레드도,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리나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놓치지 않았다. 슈엔은 황자에게 독대로 할말이 있다고 했다. 황자는 물흐르듯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밸러스 대공도 왔었다고 했지.’
무슨 할말인 것일까. 대공의 방문과 관계가 있는 건가? 레드포 로마나와의 결혼이 사실인가. 이제 못견디겠으니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것일까. 슈엔 대공녀는 감이 좋으니까, 자신과 황자의 관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복잡해져갔다. 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위병들이 그녀를 따라가려 줄을 지었지만 세리나는 손을 저었다. 따라오지 말게, 라고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는 조용히 무도회장을 나서 밖으로 나갔다.
정원의 공기가 차가웠다. 콧속이 싸해질 만큼의 냉기였다. 하지만 달아올랐던 몸에 오히려 차가운 바람이 좋아서 그녀는 어둡고 사람이 없는 정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사이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군데 군데 켜놓은 마법 조명 외에는 잔디밭과 풀숲이 어두웠다.
수풀 속에는 이미 뒹구는 남녀가 있었다. 세리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능한 조용히 걸었다. 순간적으로 들린 여자의 억눌린 비명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피해서 갔을 것이다.
“꺅, 싫어! 살려주세요! 이거 놔요!”
앳된 목소리였다. 세리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조심히 소리를 죽여 둘이 뒹구는 곳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가 여자를 짓누른 채 마구 치마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사내의 흥분한 페로몬이 마구 흩어져 나와 사방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더러울 정도로 적나라한 냄새에 황자비는 인상을 구겼다.
“가만히 있어. 지금 누가 널 도와주기나 할 것 같아? 이놈저놈하고 뒹구는 년이 왜 비싼 척이야?”
“놔요! 이거 놔! 누구라도 도와주세요!”
지금 여자는 지나가는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려고 비명을 지르는 것일 터였다. 이 민감한 시기에 가만히 지나가야 하나의 잡음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더이상 수호기사가 아니라 에스트레드의 황자비였고, 대놓고 난잡하게 지내는 결혼전야 무도회 기간에 강간 사건이 하나 둘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한숨을 쉬면서 큰 걸음으로 수풀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가능한 조용히 타이르기만 해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름 제1황자의 반려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드레스 자락이 거추장 스러워서 대충 손으로 잡아 걷어올린 채였다.
검은 수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여자를 깔아 뭉개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세리나가 말했다.
“어이, 이봐.”
막 여자의 속옷을 찢으려던 사내가 벙찐 얼굴로 갑자기 들이닥친 황자비를 올려다 보았다.
“싫다는 여자 억지로 하는 게 취미면 내 귀에 안들리게 제대로 숨어서나 해라.”
그녀는 수풀을 걷어서 달빛이 제대로 비추도록 했다. 다음 순간 세리나는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오르젤 로마나?”
“뭐야, 이거 황자비 전하 아니신가…”
잘 정리된 세가닥의 수염과 딴 머리를 한 남자는 슈엔 대공녀의 오라비, 대공가에서 의절당한 오르젤 로마나였다. 이 작자가 예전에도 어지간히 손버릇이 나빴지, 라고 기억하며 세리나는 혀를 찼다. 애초에 의절당한 것도 내무대신의 딸을 건드려서 그녀가 정신이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감옥에 쳐넣으라고 울분에 차 소리지르는 내무대신 앞에서 밸러스 대공은 어쩔 수 없이 오르젤과 의절을 택했던 것이었다.
“이거 이거, 진짜로 구하러 오신건가…? 기사님.”
사내가 킬킬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붉었다. 클리스 로마나의 측근답게 오르젤은 지독히도 난잡하게 횡포를 부려댔으니까 지금 이 광경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과거 계속해서 자신에게도 희롱을 일삼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구원의 기사님이 더 미인이신데.”
오르젤이 몸을 일으키자 밑에 깔려있던 여자가 덜덜 떨며 다 찢어진 드레스를 움켜쥐어 몸을 가렸다. 그래도 대공가의 외아들씩이나 되었던 남자가 수풀 속에서 여자를 덮치는 꼬라지를 현장에서 잡은 세리나는 피곤한 표정으로 뺨을 문질렀다. 화사하게 틀어올렸던 금발 올림머리가 더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오랜만이군, 오르젤 공자. 여기서 이렇게 만날줄은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여어, 말이 짧아지셨군, 참, 아직 결혼식은 안했어도 황자의 반려시지. 뒤에서 소문은 많지만 말이야.”
사내의 발음이 이상하게 샜다. 혀가 꼬이는 것이 술을 마신 게 틀림 없다 하면서 세리나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눈동자가 기묘하게 풀려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눈이다. 그녀는 안좋은 기억이 불러내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 수호기사라는 게 그렇지 말입니다, 황자 뒤에 숨어서 꼬리나 치고 말이지... 전장에서 굴렀다지만 그게 검을 들고 구른 건지 황자 침대에서 구른 건지 누가 알아?”
덮쳐졌던 귀족 여자는 눈치를 보다가 수풀 뒤로 도망쳤다. 차라리 그녀가 사라지는 게 편해서, 세리나는 그녀를 그대로 두었다. 오르젤이 풀어 헤쳤던 바지춤을 올리지도 않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 과장되게 인사했다.
“이런, 내가 황자비 전하께 무슨 실례를. 당신 같은 미인을 그대로 두다니 말이야.”
그가 손을 뻗어 세리나의 팔뚝을 틀어쥐었다.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그 역시 로마나의 혈통, 강인한 손아귀가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꽉 쥐어 고정했다. 뛰어난 검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일반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오르젤의 약력에 멍이 남을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세리나가 몸을 돌려 오르젤의 품으로 파고들며 팔꿈치고 그의 안면을 가격했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뒤로 넘어가면서도 오르젤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타는 듯한 고통으로 오른쪽 안구가 파열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뇌리로 찾아들었다. 뾰족한 팔꿈치로 정확하게 안구를 타격한 세리나는 넘어지는 오르젤의 머리채를 잡고 무릎으로 턱 아래를 올려쳤다. 뻐걱 하는 소리와 함께 턱뼈가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드레스를 입어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세리나는 다소 아쉬워했다. 높은 힐과 긴 드레스는 역시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반려로 선택된 이후 꾸준히 쌓여왔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오르젤 로마나는 아무리 그래도 대공의 혈통이다. 정도 이상으로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고 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다혈질이었다. 고통에 바닥을 기며 달아나려는 남자의 허리를 걷어차며 세리나는 소매 속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몹시 차분해서 도저히 흥분한 사람 같지 않았지만, 사실 세리나는 스트레스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좀 착각을 하나본데.”
세리나 리엔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동부 내란 전장을 구른 삼년간 주로 상대했던 건 로마나 황족들이나 마법사, 마녀, 마수들이었다. 일반 기사들이 아니야.”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가 우웅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새어나오며 나이프 위로 새파란 검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의 경지에는 어림도 없지만, 세리나 자신도 이 정도의 검기는 끌어낼 수 있었다.
“너같은 쓰레기는 더욱이나 아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