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면의 길 --> 로마니엔의 황궁은 험하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세리나 리엔이 잘 알고 있었다.
열 네살 때 황궁에 들어온 이후 십여년간 그녀가 모시는 주군은 암살 위협을 수십차례 넘겼다. 전장에서 보냈던 삼년을 제외하고도 그랬다. 멀쩡한 황자궁의 침실에서 독액에 젖은 침대보에 누워서 등의 피부가 전부 태워져 나갔고, 사냥을 나가면 말이 갑자기 미쳐 날뛰었고, 집무를 보다가 만년필의 뒤에서 암기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수호기사 두명과 호위대가 아무리 신변 보호에 촉각을 곤두세워도 모든 시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마다 에스트레드는 부상을 입고 다시 회복해서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져 갔다. 세리나는 그 변화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스트레드의 어머니 메리타 궁부인은 자신도 암살의 타겟이 될까봐 아들에게서 아예 손을 놓았고, 그는 외가와도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황후 라일리아는 냉정한 여자였고 동생 클리스 로마나는 무식하고 잔인했다. 아비 발렌2세는 아들들이 죽든 살든 무관심했다. 완전히 고립된 황궁 속, 살아남는 방법은 강해지는 것 뿐이었으니까.
세리나는 자신의 소매 속에서 작은 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열 네살, 집을 떠나오기 전 어머니가 그녀에게 준 검이었다. 날도 제대로 안선 물건을 보고 어렸던 그녀는 의아해 했다.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는 검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면 그 물건의 쓰임새를 알게 될 거야.’
세리나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를 잠시 기억했다. 잿빛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제국인 행세를 하며 살아온 그녀. 소드 마스터, 검사로서 가장 영예로운 칭호를 지녔던 마리아 엔티아스는 십년을 기약하고 리엔 후작가로 비밀리에 들어왔던 여자였다.
제국인이 아닌 모친이었기 때문에 에스트레드에게도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이 물건의 존재도 그는 알지 못했다. 세리나는 나이프를 손으로 돌리다가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 잡히는 감촉이 안성맞춤이었다. 크기가 세리나의 손에 딱 맞았다. 기운을 집중하자 날도 서있지 않던 나이프의 검신에 새파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길게 솟아오른 파란 검날은 완벽한 롱소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위험할 때만 써온 나이프였다. 본능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검을 지니고 다녀야 할 때라고. 세리나는 기운을 거둬들이고 나이프를 드레스의 소매 안으로 밀어넣었다. 풍성한 모슬린 앙가장트 속에 쏙 들어가서 보이지 않을만큼 나이프는 작았다.
그녀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기다리고 있는 에스트레드에게로 나아갔다. 은발을 단정하게 묶은 에스트레드가 세리나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마저도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앙궁 시종장의 목소리가 거대한 홀에 울려퍼졌다.
“에스트레드 로마나 황자 전하와 그의 반려 세리나 리엔 님이십니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황자와 그의 반려는 드넓은 홀로 나섰다. 손을 잡고 나란히 선 둘을 향해 전 제국의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요한 가운데, 에스트레드가 손을 들었다. 넓은 홀에 모인 귀족들 전체가 물결치듯 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음악을 시작하라.”
“무도회를 시작하라!”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귀족들이 둥글고 넓게 물러선 곳으로 에스트레드가 세리나를 끌어당겼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의 아내를 보고 황자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전쟁터에서는 긴장 따위 모르는 침착한 얼굴이었던 여기사가, 춤을 추기 전에는 딱딱할 만큼 굳는다. 그는 부드럽게 리드를 시작했다.
천천히, 음악을 타면서 에스트레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 황자비가 간신히 미소를 떠올리며 발을 맞췄다. 처음 몇번 휘청이던 그녀는 곧 그의 박자에 따라가고 있었다.
“긴장하지마, 오늘은 더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의 시선에 여전히 굳은 채였던 세리나가 그 말에 살풋 웃었다. 구두는 높고 발은 아팠지만 긴장을 풀어주려는 에스트레드의 노력이 기뻤다. 그녀는 리드미컬하게 발을 옮기며 말했다.
“간지러운 말씀도 하시는군요.”
“내 아내에게니까.”
“...남들이 들으면 진짜인줄 알겠습니다. 아니, 진짜죠. 물론 진짜인데…”
여태까지 담고 있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헛나와서 세리나는 얼른 수습했다. 음악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니 말조심을 해야했다. 에스트레드는 조용히 그녀를 끌어당기며 춤을 리드했다. 수십겹으로 층층이 쌓인 고운 살구 빛의 쉬폰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두 사람의 결약으로 인해 안정된 페로몬도 공기 중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청량하고 맑은 향기에 예민한 귀족들이 코를 씰룩였다.
애초에 황자비는 워낙 자세가 좋고 체형이 아름다웠다. 단련된 여기사의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매끈했다. 춤을 춘 지 일주일 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능숙하게 후반부를 이끌어나갔다. 에스트레드가 특별히 지시했던 곡이라서 완벽하게 적응해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곧 한곡이 끝났다. 홀을 가득 메운 귀족들이 함께 박수를 쏟아내었다. 기사이고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라며 안좋은 소문이 났던 황자비는 아름답고 고상한 자태로 춤을 추었다. 무엇보다 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와 그림 같이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철혈의 황자 에스트레드가 귀히 여기는 황자비. 황자궁에만 꼭 숨겨놨던 그녀가 제대로 성장하고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음 곡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모든 이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둘은 홀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황자 부부의 옥좌에 앉아 귀족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 짓을 이틀을 더 해야 한다는 겁니까?”
식은땀을 훔치면서 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 보기야 아름다웠지만 어지간히 긴장했던지 이마가 촉촉했다. 에스트레드가 씩 웃었다.
“어차피 결혼 전야 무도회란 질서란 게 없는 거니까, 내일 모레야 그냥 지나도 되겠지.”
그는 땀이 난 세리나의 손을 이끌고 내려가 발코니로 나갔다. 이른 저녁,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발코니로 나가 에스트레드는 뒤로 커튼을 닫았다. 무도회가 열리는 중앙궁 2층의 발코니라 그 아래로 드넓은 황궁의 뒷숲이 보였다.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달콤함이 전신에 퍼진다. 천천히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온 그의 혀가 입천장과 혀끝을 살짝 핥았다. 세리나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드레스 가운 밑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손에 화들짝 놀라 밀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여긴 발코니에요! 게다가 지금 무도회 막 시작했는데…!”
“결혼 전야의 무도회야. 누가 어디서 뭘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에스트레드는 행여나 누가 볼세라 세리나를 풍성한 커튼 속으로 밀어넣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납득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황자비의 볼을 감싸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톡 쳤다.
“지금 밖에는 우리 결혼의 증거를 바라는 자들이 한가득이야. 좀 더 짙은 페로몬을 내줘야지.”
남자의 손이 스커트 자락을 밀어젖혔다. 세리나의 날씬한 다리 사이로 에스트레드의 긴 손이 밀려들어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말이 맞으니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무도회는 서열자와 반려의 결약을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다시 입술이 마주치고, 혀가 깊숙히 섞였다.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여 여자의 속옷 위로 둔덕을 어루만졌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좁히고 작게 신음했다. 얇은 면 위로 촉촉한 습기가 배어나왔다. 에스트레드는 그 습기를 검지로 문지르며 그녀의 허리를 받쳐안았다. 그의 입술이 세리나의 둥근 가슴 위로 내려앉아 키스를 남겼다. 빨고 살살 깨무는 자극에 여자가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물었다.
하얀 커튼이 이리저리 둘을 휘감았다. 아래에는 황궁 호위병이 서있었고 문 뒷편으로는 춤에 한창인 귀족들이 한가득이었다. 소리를 안내려고 세리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곧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천천히 남성이 진입해 들어왔다. 습기찬 내부에 가득 들어차는 그는, 여전히 버겁고 힘겨웠다. 세리나는 기둥에 기대 신음을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다리 한쪽을 들어올려 허리에 감은 에스트레드가 조심히 허리를 쳐올렸다.
“흣…윽, 흐읏...”
억눌린 신음성이 이리저리 샜다. 세리나는 모든 힘을 짜내 그에게 매달렸다. 세상에 그만이 존재하고, 그만이 매달릴 수 있는 기둥인 것 같았다. 이른 밤하늘 아래로 에스트레드의 은발과 은청색 눈동자가 희게 빛났다.
이렇듯 희롱하듯 안기는 것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가끔 애매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녀는 과연 그에게 무엇일까. 반려의 역할이고, 때가 되면 버릴 패이고, 매일 몸을 즐기는 상대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