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면의 길 --> 황후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두운 방 안 촛불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는 두꺼운 책을 꺼내 느릿하게 넘겨보았다. 촛불에 비친 그림자가 춤췄다.
“또 역사책을 보는 거요? 라일리아.”
황제 발렌 2세가 소파에 앉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광원 속에 그녀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맞습니다, 폐하. 보고 있지요. 항상 보고 있습니다.”
황후 라일리아는 천천히 걸어가 황제의 뒤에 섰다.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텅 빈 방안을 울렸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이 끌리는 소리를 즐기며 황제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구두를 신었음에도,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벌써 그 책을 몇번 째 보는 건가? 다 외웠겠군.”
“외우다마다요. 하지만 계속해서 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어차피 기본 역사책인 게 아니오? 이미 다 아는 내용인 것을.”
라일리아는 창백한 얼굴을 수그려 발렌2세의 건강하고 붉은 얼굴에 뺨을 비볐다. 그녀의 차가운 뺨이 사내의 뜨거운 피부에 문질러졌다. 그녀는 어린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역사란 중요하답니다. 역사책에서 저는 항상 교훈을 얻고 있죠.”
라일리아는 노래처럼 낮게 속삭였다.
“시간은 언제나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 되니까요. 반성하지 않는 자, 기억하지 않는 자, 결국 벌을 받을 것임을...안그렇습니까, 위대하신 폐하?”
*****
“황자비 전하께선 무도회에 참석해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있었죠. 대부분 황자 전하...아니, 에스트레드님의 수호기사로서 따라간 거긴 하지만요.”
“춤을 춰보신 적도 없겠군요.”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없다 라고 말해도 되나? 세리나는 잠깐 멈칫했다. 일단, 성인이 된 후 드레스를 입어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무도회에 참석해 춤을 추느니 차라리 대련장을 50바퀴 도는 것을 택하는 게 기사 세리나 리엔이었다. 지금처럼 엄청난 프릴과 레이스로 치장된 드레스 위에 꽃을 꽂고 무도회를 준비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피하실 수 없어요.”
밝은 살구색의 드레스를 입고 언제나처럼 소녀같은 얼굴로 레이디 휘에리가 근엄하게 말했다. 황자비는 한숨을 참았다.
“결혼 전야의 무도회는 황자의 반려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첫 기회에요. 물론 황자비 전하야 기사로 오래 근무하셨으니 얼굴을 아는 분은 많겠지만 이 넓은 제국 사교계에는 아예 모르는 쪽이 훨씬 많을 거구요.”
그녀는 영민했다. 군인으로 뛰어났으니 머리나 센스가 둔할 리 없었다.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귀부인의 예의범절과 사교계의 주요 인사들, 귀족의 기본 교양을 기본 수준으로 익혀냈다.
하지만 춤은...이야기가 달랐다. 익히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휘에리가 보기에도 황자비는 몸의 선이 곱고 리듬감도 좋았다. 일주일 간의 연습 결과 그녀는 꽤 괜찮은 왈츠를 출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세리나 리엔 정도 되는 미인이라면, 파트너의 발을 매 걸음마다 밟지만 않으면 훌륭한 댄서인 거라고 휘에리는 생각했다. 화려한 금발이 휘날리며 홀을 장식하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으니까.
“황족들의 결혼 전야 무도회 기간에는 젊은 귀족 남녀들이 전부 춤을 추고 밤새 즐겨요. 축제인 거죠.”
“클리스 로마나 전하의 결혼식 기간에 잠깐 참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대단했죠?”
“대단했죠.”
결혼 전야 무도회 기간은 사흘이다. 원래는 일주일 이상 수도 전체에 지속되는 큰 축제로 펼쳐지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축제 준비를 할 여력이 없었다. 무도회의 규모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정말...그...뭐랄까, 다들 굉장히 자유롭게 행동하시더군요.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맞아요. 결혼 전야 무도회는 반려를 가지게 된 황자가 그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한 사람에게 구속되기 전 마지막 자유를 즐길 기회니까요. 평상시와 완전히 다르죠. 특히 마지막날 밤이 그래요.”
클리스 로마나의 결혼은 일년 전 진행되었다. 당시 무도회 역시 세리나는 수호기사의 자격으로 참석했었고 에스트레드의 곁에서 떨어질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정원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적나라한 정사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정원 뿐일까, 디저트 테이블 밑으로 여자의 다리를 노골적으로 쓰다듬는 남자나 커텐 뒤에서 남자와 몸을 비비는 귀부인 같은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황자 전하와 반려는 대부분 춤만 추고 들어가는 게 관례에요. 클리스 전하는 좀 이야기가 달랐지만.”
휘에리는 당시를 기억하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클리스 로마나는 반려가 있음에도 미친 것처럼 귀부인과 아가씨를 건드리고 다녔다. 휘에리 자신은 카스가드 백작의 보호 아래 안전했다. 스스로 기꺼이 동참한 여성도 있었지만 강제인 여성도 있어서 한동안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춤 부분 말인데요… 다들 모여서 보는 거지요?”
“아무렴요.”
휘에리가 팔랑팔랑 부채를 부쳤다. 세리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무도회 같은 곳에서 남들 눈에 띄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못했다. 귀족들 모두가 모여 둥글게 둘러선 중앙에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라니.
“다들 그 춤을 보기 위해 모이는 거에요. 저 먼 변방에서까지 모든 귀족이 다 올라오니까요. 집안마다 한명씩은 다 올걸요. 바로 황자 전하와 반려의 춤을 보기 위해서.”
“그렇지. 우리 둘이 발 걸려 넘어지거나 하면 곤란해.”
갑자기 들려온 에스트레드의 목소리에 휘에리와 황자비가 일어나 예를 표했다. 홀로 걸어들어온 그는 세리나의 손을 잡았다.
“어떻소? 황자비의 춤은? 기사일 적에 단 한번도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황자비 전하께선 상당히 소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벌써 많은 진척이 있었어요. 이 정도면 무도회도 걱정이 없을 듯 합니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고 휘에리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에스트레드가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곧 악사들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자의 손이 세리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부드럽게 에스코트했다. 그는 홀 중앙으로 여자를 리드하며 춤을 췄다. 세리나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의 리드를 따랐다. 겹겹이 쌓인 풍성한 드레스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홀을 점령했다. 우아하고 경쾌한 몸짓에 에스트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올렸다.
“잘 배웠나보군. 훌륭한 댄서가 되겠어.”
“칭찬 감사합니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불퉁한 소리를 냈다. 일주일간의 맹연습 덕에 익숙치 않은 힐에 혹사당한 발이 상처투성이였다. 아파 죽겠는데 훌륭한 댄서라느니 뭐라느니, 별로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었다.
휘에리로부터 충분히 멀어졌고 음악소리가 절정을 향해 달렸다. 계속되는 크레센도, 그 중간에 에스트레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밸러스 대공이 내게 찾아왔었다.”
“...대공이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한동안 만남이 없으셨잖습니까.”
“그래.”
황자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건 아니었고, 내 의중을 떠보러 왔던듯 해. 아직 어느쪽에 설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다.”
소문에 의하면 밸러스 대공은 슈엔 대공녀를 레드포 로마나와 혼인시키려 한다. 막내 황자에게 있던 미약한 결합의 반려를 내치고서라도 말이다. 언제나 잘 정돈된 세갈래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밸러스 대공은 실리에 민감한 자였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후처 자리에 들이는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할 인간이었다.
“대공녀와도 거리를 두도록 해. 지금 황궁 안에는 헛소문과 진짜 소식이 한데 섞여 흐르고 있다. 어느 쪽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레이디 휘에리도 마찬가지다.”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이 흉흉한 시기다. 네 몸을 지켜라. 밀렌 바스트가 우리 곁을 지키겠지만 스스로도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일은 언제나 있었지. 하지만 며칠 사이에 극도로 심해졌다. 과연 그게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속삭임을 끝으로 에스트레드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바퀴 크게 돌리고서, 박수를 치는 레이디 휘에리를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자주색 빌로드 망토가 부드럽게 등에서 곡선을 그렸다.
“레이디께서 황자비를 완벽하게 가르쳐주셨군.”
“어머나, 황자비 전하께서 워낙 출중한 감각을 타고나셔서 저는 정말 한 게 별로 없답니다.”
“레이디 휘에리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휘에리가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은발을 늘어뜨린 장신의 에스트레드와 화려한 금발의 날씬한 세리나 리엔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둘을 보며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어 미소를 지었다.
“무도회는 내일부터 시작이에요. 사흘 뿐이라 아쉽긴 하지만, 많이 즐기실 수 있을 거에요. 춤 추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마시라구요, 황자비 전하.”
“노력해봐야죠.”
세리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휘에리의 호들갑에 맞춰주었다. 에스트레드는 곧 어전회의에 참석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는 미소를 띄운 채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작게 말했다.
“누구도 믿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