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면의 길 --> 티파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세리나는 자신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돌아와서 황자에게 이 애매한 레이디 휘에리와의 대화를 이야기하자, 그는 손해볼 것 없이 잘했다며 칭찬했다. 하지만, 여전히, 귀부인과의 대화는 의문으로 남았다.
수도방위군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황궁으로 돌아가 공식 일정을 시작해야 했다.
아내를 타월로 꼼꼼히 닦아준 에스트레드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오늘 하루의 피로에, 뜨거운 목욕에, 그에게 안기기까지 했다. 몸을 지배하는 노곤함에 세리나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황자는 머리맡의 주전자에 마실 물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세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카스가드 백작의 군 야영 상태를 확인하고 올 테니, 자고 있어. 한시간 쯤 걸릴거야. 끝내는 대로 돌아오겠다.”
세리나는 노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에도 햇볕이 밝은 방 한가운에서 남자에게 한껏 안겼다. 페로몬을 섞어야 한다는 이유로 매일 두세번씩 몸을 섞어서 세리나는 체력이 달려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에게 마음껏 사랑받은 사지가 푹신한 이불 속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곧 옷을 갈아입은 에스트레드가 방을 나섰다.
방은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공간 안, 달빛 만이 흘렀다. 금방 잠이 올 거 같았던 몸상태와는 다르게 왠지 모르게 눈이 떠졌다. 그녀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몸은 피로해 땅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인데도 뭔가 잠이 들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리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장에서 몇년을 지내다보면, 싫어도 갖게되는 육감이라는 게 있었다. 길조와 흉조를 헤아리는 여섯번째 감각.
세리나가 에스트레드의 뒤를 따라 전쟁터를 헤멘 것은 삼년이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직후인 열여덟 봄부터 스물한살 여름까지. 그 이전에도 물론 실전경험이 있었지만 그 삼년간은 정말 전장 속에서 피 냄새가 빠질 날 없이 군인으로 구른 시간이었다. 동부 내란을 진압하고 안정시키는 데만 삼년이었으니 그간 온몸으로 구른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삼년 동안 세리나가 배운 것이 있었다. 적의 야습이 있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올 때, 아군의 보급로가 끊길 때. 예감이란 미신이라고 에스트레드는 무시했지만 세리나는 자신의 육감을 믿었다. 안좋은 예감이 들 때 에스트레드의 침실 안에서 밀렌 바스트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암살을 막아낸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실내는 고요했다. 숙소의 묵직한 목제 문은 굳건히 닫힌 채였다.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은은하게 찬 공기가 흘러들어 커텐이 흔들렸다. 아무런 일도 없을 것 같은 고요한 밤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침대 이불을 조심시 잘 덮어두고, 조용히 벽장 쪽으로 다가가 벽과 그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숙녀의 체면 때문에 검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세리나가 뭐라도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아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순간, 아주 조용하게 침실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열린 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방을 조용하게 걸어들어왔다.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온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고, 어둠에 적응된 세리나의 눈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클리스 로마나?’
에스트레드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거대한 어깨. 불타는 듯 새빨간 적발. 누구도 틀릴 수 없는 클리스 로마나였다.
‘카스가드 백작이 며칠 전 클리스 로마나의 방문이 있었다고 하더니...하지만 근처 민가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이곳에.’
그녀는 가능한 기척을 죽였다. 클리스 로마나라면 그 역시 이곳 방문시에 이 방에 묵었을 터였다. 뭔가 놓고 간 건가? 아니면 다시 이곳에 묵으려고, 카스가드 백작 응대도 받지 않고 들어왔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은 군영이다. 일부러 숨어들어오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절차로는 당연히 병사의 안내를 받게 되어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그를 주시하는 세리나의 눈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클리스 로마나의 몸 반쪽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죽비죽한 털과 뿔이 몸의 왼쪽 절반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야수화가 되다 만 상태다….폭주인가.’
에스트레드가 얼음 속성의 능력을 지닌 황족이라면 클리스는 야수화의 능력을 지닌 황족이다. 클리스 로마나는 말 그대로 스스로를 야수로 변형시켜 적과 격돌한다. 육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능력인 만큼 몸에 주는 부담도 컸고, 격렬한 공격이 있을 때는 폭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그는 이성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대체 누가 감히 로마니엔의 제5황자에게 저런 짓을 한 거지.’
사내가 절뚝이며 방 한가운데 침대 앞에 섰다. 그가 고개를 들자 여자는 비로소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눈동자가 초점이 나가 있었다.
‘...위험하겠는데.’
다시 육감이 위험의 냄새를 맡고 진동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야수화한 클리스 로마나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검이라도 있었다면 방어하며 창 밖으로 몸을 날리는 무리수라도 감행했을 텐데. 하지만 얄팍한 실크 잠옷만을 입은 지금은 움직이는 순간 클리스의 손톱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에스트레드...빨리 돌아오세요.’
아무리 야수화된 클리스 로마나라도 에스트레드에게는 정면승부로 절대 승산이 없다. 더구나 저렇게 폭주하여 일그러진 반신으로는 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자는 나간 지 불과 십분이 되지 않았다. 한시간은 걸린다는 야영지 시찰을 갔으니...
천장을 쳐다보던 클리스 로마나가 히죽히죽 웃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데.”
피부 전체에 소름이 돋았다. 세리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클리스 로마나가 직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을 때, 그녀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새로 등극하신 형수님 아니신가…”
술에 취한 것처럼 말이 늘어졌다. 클리스가 비척거리며 다가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세리나의 팔뚝을 잡아 달빛 속으로 끌어냈다. 노란 달빛 아래 창백한 얼굴의 세리나가 드러났다. 흐트러진 금발과 얇은 실크 드레스 밑 노골적으로 드러난 몸. 그가 히죽 웃으며 반쯤 야수화되어 짐승처럼 길어진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나왔다.
“형수님, 이제는 이 시동생에게, 인사도 하지 않으시는 건가?”
그가 킬킬거렸다. 세리나는 그녀의 키보다 1.5배는 클듯한 클리스 로마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세리나가 단련된 기사라고는 하지만 무기도 없이, 게다가 폭주한 황족에게 대항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단지 에스트레드를 기억해서 함부로 위험한 짓을 벌이지 않을 만큼 클리스 로마나에게 이성이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클리스는 폭주하여 기혈이 꼬여버린 반신을 흔들며 웃었다.
“이 좋은 냄새라니, 이 좋은 걸 혼자 갖다니...욕심만 가득찬, 오만한 형님이지 않은가…”
“클리스님, 지금은 밤입니다. 어찌 오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오늘밤 이곳은 에스트레드님과 제가 머무는 방이니…”
세리나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듯, 클리스 로마나가 세리나의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다…이게 목표...”
‘...목표?’
여자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차분하게 그가 뱉는 단어를 되새겼다. 뭔가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클리스 로마나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세리나의 녹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이성이 없었다.
위협을 감지한 여자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순간, 거대한 남자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꺄악!”
벽에 거세게 부딪혀서 뇌진탕이 올 것 같았다. 여자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납았다. 곧 얄팍한 실크 원피스 위로 사내의 거대한 손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숨이 턱 막혔다. 클리스의 굵은 몸집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야수같은 남자는 여자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미친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끈적끈적하고 짐승같은 호흡이 피부를 덮었다. 소름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래, 이거...이거...범하고, 죽여라...이거야…”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쳤다. 마치 절벽 사이에 갇혀버린 것처럼 사내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간단히 들어올려 벽에 밀어붙이고, 잠옷 아래로 두꺼운 손을 밀어넣었다. 실크 드레스 밑 얇은 한장의 속옷이 허무할 정도로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범하고...죽여라…”
사내가 킬킬거렸다. 세리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허리를 걷어차려고 노렸지만 곧 허벅지를 잡혀 넓게 벌려졌다. 다리를 벌린 채 사내의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된 그녀가 몸부림쳤다. 금발이 마구 흐트러져 여자의 흰 뺨에 달라붙었다.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하려던 시도도 팔이 잡혀 뒤로 꺾이면서 무산되었다.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팔을 꺾은 클리스 로마나는 히죽거리며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탈골시켰다.
“아악!”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를 악무는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덮으며 클리스가 속삭였다.
“세리나 리엔...목표. 범하고...죽여라.”
사내의 손이 세리나의 둥근 가슴을 유린했다. 터질 것처럼 쥐어진 가슴이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엉덩이를 쥐고 자신의 한껏 발기한 남성 위로 그녀의 은밀한 틈을 비비면서 클리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숨은 욕정에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모욕감과 끔찍함에 세리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탈골된 어깨의 고통 같은 건 이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흐느꼈다.
“에스트레드...에스트레드.”
“소용 없어.”
클리스 로마나가 자신의 바지 단추를 열었다. 끔찍하게도 큰 남성이 나타났다. 야수화가 절반 진행되다 만 상태라 짐승의 털과 형태를 가진 물건이었다. 세리나는 자신의 맨 허벅지에 우툴두툴한 물건이 문질러지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눈이 꽉 감겼다.
어느 한 순간 세리나는 창문 밖에서 작은 소리를 들었다. 마치 유리가 겨울에 갈라지는 것과 같은 소리. 쩌적쩌적쩌적. 그 소리가 클리스의 귀에도 들렸는지 거대한 남자의 육체가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반응할 사이도 없이, 창문이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