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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6화 (16/142)

<-- 뒷면의 길 -->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만찬이 끝난 뒤, 황자 부부는 그들이 머무는 숙소로 올라갔다. 수도방위군의 군영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비록 군영이지만 널찍한 침대는 네 사람이 올라가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세리나는 여섯 시간 말을 달린 후유증에 사지가 삐걱대는 느낌을 받았다. 에스트레드가 턱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시녀들을 불러줄 테니, 먼저 씻어라.”

“아뇨, 아닙니다. 저 혼자 해도 됩니다. 오히려 그 편이 편해요.”

“자네는 황자비야. 시녀들의 시중에도 익숙해 져야지.”

황자가 한숨을 쉬었지만 세리나는 얼른 옷을 챙겨 욕실로 달려들어갔다. 대리석으로 된 큰 욕조를 보고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황자궁의 욕탕은 물론 거대하고 사치스럽다. 결약을 맺은 이후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침실에서 함께 잠들고 생활했으니 당연히 그곳을 매일 사용했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군영이다. 수호기사라 해도 여성이었으니 이전까지는 황자의 욕실까지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수도방위군 군영의 욕탕이 이렇게 화려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얇은 모슬린 커튼이 드리워진 욕실 안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욕조가 있다. 스무명이 들어가도 남을 크기여서 욕조라기보다는 작은 연못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세리나는 낑낑대며 열심히 드레스를 벗었다. 다행히 실내 만찬용 드레스로 준비된 것이라 시녀가 필요없는 편안한 엠파이어 스타일에 실크 가운을 덧입은 것이라 혼자서도 벗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욕조의 물을 틀고 온도를 맞췄다.

간단히 씻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따스한 물이 몸을 감싼다. 젖은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서 그녀는 연신 머리를 쓸어넘기며 몸을 탕 안에 기댔다. 여섯시간 말을 달려 이곳에 도착한 후 바로 군영을 시찰하고 카스가드 백작의 만찬에 참석한 터라 심신이 피로해 있었다. 피부에서 먼지와 피로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세리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곳의 물은 온천에서 끌어다 쓰는 것이라 수질이 좋지.”

“에, 에스트레드?”

화들짝 놀란 세리나가 돌아본 곳에 황자가 서 있었다. 얇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선 남자는 긴 은발을 느슨하게 묶고 문 옆에 기댔다. 세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재빨리 물 속으로 턱까지 밀어넣었다. 그녀는 욕조 벽에 달라붙어서 항의했다.

“왜 들어오신 겁니까?”

“뭘 새삼스럽게 놀라지? 어차피 매일 밤 같이 자는 사이에.”

“하지만…! 그래도, 목욕하는 데 들어오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수줍게 굴기는.”

남자는 투덜거리며 욕조로 다가왔다. 물 밑으로 몸을 둥글게 말아서 마치 태아같은 꼴을 하고 앉아있는 세리나를 보고 그가 푸합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발은 온통 젖어 흩어지고 얼굴은 발그레한 주제에 눈은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기사 시절엔 생각지도 못했을 눈초리다. 황자는 아내의 금색 머리 위로 입을 맞췄다.

“이 욕조는 거품을 내는 기능이 있어.”

“...거품이요?”

에스트레드가 욕조의 꼭지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곧 욕조 전체에서 부글거리며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흰 거품이 피어올라 수면 위가 완전히 덮이자 세리나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귀빈용의 숙소야. 황족들이 묵기 때문에, 사소하지만 좋은 기능을 많이 숨겨뒀지. 향초를 마법으로 가공한 가루가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향기와 많은 거품이 생겨나는 것이다.”

“향초를 마법으로 가공한 거라면 굉장히 비싸지 않습니까? 군영 예산에 좋지 않을 텐데요.”

“할 수 없지. 그 예산을 배정하는 것이 이 방에 묵는 황족들이니까.”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 위를 완전히 덮은 거품 덕에 그녀는 말았던 몸을 풀고 편히 앉았다. 안심하고 고개를 든 순간, 에스트레드가 실내복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이 보였다. 그의 조각같은 나체에 세리나가 입을 벌리고 벙 쪄있다가 손을 휘저었다.

“에스트레드…!”

“왜?”

“아니, 잠깐…잠깐만요!”

황자는 비의 만류도 듣지 않고 욕탕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구석으로 붙어서 몸을 피하는 세리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물 속에서 맨 살결끼리 닿는 느낌이 생소해서 여자가 움찔거렸다.

“언제나 있던 궁이 아니라서 그런가? 처음처럼 구는군.”

그가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놀렸다. 몸을 섞었다고는 해도 아직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다. 아직 수줍은 것이 당연했지만 낯선 곳에 있으니 더 부끄러웠다. 세리나는 남자의 어깨를 밀며 타박했다.

“여긴 군영입니다, 에스트레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군영이지만 전시는 아니지. 그리고 우리는 부부인데 뭐가 문제야?”

에스트레드가 그녀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세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스트레드가 이럴 때마다 그녀는 속으로 혼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알아온 바 에스트레드는 여색을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제위에 대한 야망은 숨기지 않았고 여자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다. 욕구를 푸는 것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여자를 안았지만 필요 이상의 연애는 결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애정문제에 엮여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남자였다.

그런 에스트레드가 너무 자연스럽게 둘을 부부로 칭한다. 남들이 있을 때도 아니었고 둘만 있을 때도 그랬다. 연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스스럼없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본래 그의 성격이라면 필요 없을 때는 칼같이 주군과 기사의 위치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내가 그동안 전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그가 애정을 표현해줄 때마다 세리나는 저 밑바닥에서 욕심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옆자리, 곁을 허락해준다면 평생 곁에 있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말 그대로 욕심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제위에 오른다면 세리나 리엔이 반려라는 사실 하나로 정통성에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녀가 로마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심지어 순혈 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

세리나에게 검을 가르친 어머니는 전 대륙을 떠돌던 검사였다. 제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제국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제국인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세리나는 마치 순혈 제국인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혼혈이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로마니엔에서 이건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황자가 검지 손가락으로 생각에 잠긴 세리나의 흰 이마를 톡톡 쳤다. 그는 아내를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순순히 그의 뜻대로 자세를 바꾼 세리나가 에스트레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욕실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따뜻한 온천수의 수증기 때문에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더웠다. 복잡한 마음을 감추고 세리나는 황자의 은발 속에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습기에 젖은 은색의 비단같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흩어져 물 속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은청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여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젖은 금발이 흩어져 등 위로 떨어졌다.

입술이 맞물렸다. 습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젖은 느낌의 점막이었다. 여자는 서툴지만 그간 습득한 대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살짝 벌어진 사이로 서로의 치아가 느껴지고 혀가 오갔다. 세리나는 작게 신음하며 남자의 넓은 어깨에 매달렸다. 천천히, 남자가 그녀를 끌어당겨 입맞춤을 깊게 했다.

“...싫다더니 어쩐 일로 먼저 입맞춤을 해주는 건가?”

황자가 입술을 그녀의 볼에 댄 채로 속삭였다. 세리나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수줍음에 고개를 파묻었다. 남자의 손이 물 밑으로 여자의 허리 뒤쪽, 오목한 곳을 쓰다듬었다. 움찔하며 세리나가 고개를 젖혔다. 희게 드러난 가는 목선에 입을 맞추면서, 에스트레드가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넓게 벌리며 자신의 중심 위에 앉도록 이끌었다. 평소와 다른 체위에 세리나가 힘겨워 했지만, 곧 남성을 완전히 몸 안에 품고 에스트레드에게 매달렸다. 허덕이는 여자의 숨소리가 서툴지만 요염하다. 황자는 가능한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욕실 안에 점차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귀밑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체향이 가장 깊고 짙게 나는 부분이었다. 여자의 향기에 그는 욕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는 모르겠지만...'

은발의 남자가 웃었다. 열넷, 열일곱. 처음 만났을 때의 강렬한 예감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기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품 안에서 몸을 비틀며 신음하는 여체를 끌어안고 한껏 그 몸에 취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원하던 것을 완벽하게 손에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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