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자비 --> 시종장 호보프가 슬쩍 세리나의 눈치를 봤다. 세리나는 붉어진 얼굴로도 애써 평온한 척 하며 앉아있었지만, 호보프는 그녀가 이미 열네살 일 때부터 보아왔다. 속으로 허둥지둥하는 게 느껴져서 그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명대로. 곧 불러들이겠습니다.”
“나의 비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가장 좋은 물건들을 들이라고 말해라.”
호보프가 물러간 뒤 세리나는 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이제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에스트레드는 신선한 과일 주스를 쭉 마셨다.
“이제 네가 어깨를 나란히 해야하는 건 공작의 딸과 마녀, 황후, 궁부인들이다.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와 보석을 골라서 치장해라. 돈은 문제되지 않는다.”
“음, 전하...아니, 에스트레드. 저는 사치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세리나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녀는 북쪽 지방에 작은 영지를 가졌던 부친을 생각했다. 부친 리엔 후작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유약한 남자였다. 영지민들에게도 자비로운 영주이긴 했지만 빼어난 지배자는 아니었고, 가문은 언제나 자금난에 시달렸다. 대륙을 뒤흔들었던 소드 마스터였던 어머니가 후작부인으로 들어앉으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리엔 후작령은 지독히 척박한 땅이었다. 세리나는 어려서부터 따뜻한 흰 빵 대신 거친 호밀빵과 차가운 돌바닥에 익숙했다. 그녀는 추운 야영장에서 검을 배우며 자란, 숙녀가 아닌 기사였다.
황실로 들어온 이후 수호기사로서 받는 급여는 상당히 풍족했지만 그녀는 그저 그 돈을 저금해두는 것 밖에 다른 길을 몰랐다. 어차피 옷은 기사단 정복과 승마용 정장 정도면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니까. 벌써 십여년이니 저금은 엄청나게 쌓여있었지만 세리나는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열네살에 떠나왔지만 어릴 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께선 영주의 성에서도 사치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했지. 네 모친의 이야기는, 사실 소드 마스터로서 더 잘 알고 있지만..."
에스트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나 리엔의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는 능력주의와 혈통주의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로마니엔에서는 양면적인 의미로 유명한 검사였다.
"마리아 엔티아스가 네 모친인 것을 알면 여러가지로 황궁이 뒤집어지겠지만."
누구도 세리나 리엔과 마리아 엔티아스를 연결짓지는 못한다. 세리나 리엔은 풍성한 금발과 녹안을 지닌, 전형적인 제국 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리아 엔티아스는 북방계의 전형인 잿빛 머리카락에 불타는 붉은 눈을 지닌, 전설의 검사였다. 애초에 그녀가 리엔 후작과 결혼할 때도 극비리에 한 것이기 때문에 세리나가 혼혈이라는 사실은 에스트레드와 측근 몇명 외에는 알지 못했다.
“이제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돈을 쓰는 것도 전략이니까.”
에스트레드가 그녀의 화려한 금발을 쓰다듬었다. 귀부인들의 사회에서 미모와 옷차림과 보석은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특히 서열자들의 반려는 모두 강하고 아름답다. 그를 돋보이게 해줄 보조 장치에 돈을 아끼는 건 말도 안된다.
“그리고 아낄 필요도 없어. 내 사재는 네게 나라를 사줄 수 있을 만큼이니까. 물론 로마니엔 정도는 못사주겠지만.”
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황자의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사실을 세리나는 알고 있었다. 에스트레드의 모친이 별 뒷배가 없는 늙은 궁부인이라 쥐고 태어난 재산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황자는 금전에 대해 밝은 자였다. 수호기사들에게마저 자세히 말하지 않아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제국에서 가장 큰 상단 게오르그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모두 가명으로 행해지는 일이라 에스트레드가 게오르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원하는 건 말해. 뭐든지 들어주겠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뭘 가지고 싶지?”
“그게 아니라…”
세리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오후에는 체력단련과 대련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몸이 찌뿌둥해서요.”
에스트레드는 눈을 크게 떴다가 결국 웃어버렸다. 평생을 기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결코 남자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을 여자는 아니었다.
“오늘은 안돼. 하지만 곧 할 수 있게 해주겠다.”
곧 식사가 끝나고 호보프가 상인들을 안내하여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은 채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무심하게 그들이 내놓는 물건들을 보았다. 상인 오베이가 허리를 깊숙히 숙여 인사했다. 그는 성내 가장 큰 포목점과 의상실을 가진 상인이었고 더불어 황자의 상단 게오르그에 속해있기도 했다.
“황자비님을 뵙습니다.”
호보프가 이미 충격을 줬던 터라 세리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얄팍한 실내복 위에 숄을 두른 채 에스트레드의 팔 안에 감싸여서 그녀는 눈 앞에 줄줄이 실려 들어오는 수많은 천의 묶음과 드레스들을 보았다. 퉁퉁한 몸집을 가진 상인이 직접 넓은 바에 화려한 비단들을 걸었다.
“저희 오베이 가문의 포목점과 의상실은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황자비께서도 마음에 드실 것이옵니다. 색상을 골라주시면 제가 그것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
마음에 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세리나는 어지러운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눈앞에 촘촘히 걸려 전시된 천들은 광택과 화려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저 속에서 하나를 골라내라고?
세리나 리엔의 미적인 안목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레이디들의 드레스에 제대로 눈을 두어본 적이 없어서 뭐가 뭔지 알수조차 없었다.
“에, 에스트레드. 저는 드레스를 골라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좋을지 도저히 알 수가…”
결국 그녀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스트레드는 전시된 비단들을 흘긋 보았다.
“황자비는 금발에 녹안이지. 그렇다면 한번 백색에 녹색이 섞인 것들을 보여봐라. 지금은 일단 드레스만, 악세서리는 백금에 에메랄드가 세팅된 것으로.”
“전하의 명대로.”
상인이 시종들에게 손짓을 했다. 눈 앞에 이미터가 넘는 바에 전시되었던 천들이 순식간에 치워지고 대신 드레스들이 나타났다. 천의 형태이던 아까보다는 좀 나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에 뭐가 예쁜지 알 수가 없어서 세리나는 다시 아연해졌다. 에스트레드가 색을 지정했기 때문에 두어벌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그 중 하나를 찝어낸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상인이 바로 장신구와 패티코트 등을 준비시켰다.
“자, 갈아입고 나와봐.”
황자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여기사는 당혹한 얼굴로 드레스 룸으로 밀려들어갔다. 바로 시녀들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지만 자신이 입을 것이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귀족 아가씨들의 드레스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긍했다. 그녀는 겹겹이 놓여있는 속옷과 패티코트와 드레스를 보고 기가 막혔다.
“세상에, 뭐가 이리 복잡한 거지.”
“리엔 경...아니, 황자비님, 귀족 아가씨들은 물론이고 저희도 이런 걸 입는답니다. 훨씬 간소화되고 단순하긴 하지만요. 드레스란 그런 거니까요.”
까르르 웃으며 시녀 안나가 말했다. 황자궁의 오래 된 시녀라서 세리나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황자궁의 시녀 정도 되면 귀족가의 젊은 처녀가 얼굴을 익히기 위해 들어와 있을 때가 많았고 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맨 몸에 슈미즈가운만을 입고 선 세리나의 허리에 언더패티코트를 채우면서 그녀는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날씬하셔요? 세상에, 허리가 한줌이네.”
“...음, 안나, 부끄러우니까 그냥 빨리 입혀주겠어?”
시녀가 깔깔 웃었다. 코르셋을 입히고 힘껏 조이자 세리나가 죽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가는 허리를 조여버리니 정말 가늘어서 안나는 계속 감탄을 했고, 세리나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 그 위에 패티코트를 입히고 마지막 로브를 입히자 간신히 기본이 완성 되었다.
에스트레드가 골라낸 드레스는 우윳빛 레이스 자락 위에 짙은 녹색의 얇고 비치는 모슬린이 한겹 덧대어진 폭이 넓은 로브였다. 얄팍한 녹색 감 아래로 금실 자수가 섬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안나가 소매 부분에 장식인 모슬린 앙가장트와 짙은 색의 리본을 매달고 드레스 스커트 뒤쪽의 주름에 잔뜩 볼륨을 넣었다.
“머릿결이 정말로 고우시네요. 전혀 상하질 않았어요.”
“뭐...나야 염색도 장식도 한 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건 그래요. 맥주 탈색은 머리가 엄청나게 상하는데...황자비님은 원래 모색이 황금색이시니 필요가 없죠.”
아...황자비님이라는 호칭은 정말 어색했다. 적응하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세리나는 안나가 머리까지 간단히 매만져주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불에 달군 봉으로 굽슬거리는 머리의 모양을 잡고 다섯알의 진주와 에메랄드로 장식된 머리핀으로 고정시켰다. 얼굴에 가볍게 분을 바르고 입술에 붉은 색을 물들이고 나서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리엔 경이 왜 황자비로 간택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세리나는 일어서서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안에 너무나 생소한 여자 한명이 서 있었다. 화려한 금발이 굽슬거리며 어깨 위로 흘렀고 녹색 눈동자에 어울리는 짙은 풀색의 드레스가 바닥에 길게 끌렸다. 넓은 스퀘어넥 위로 곧고 바른 흰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뒤로 돌아보았다. 크게 부푼 엉덩이 쪽의 드레스 주름이 가는 허리를 돋보이게 했다.
드레스룸 밖으로 나가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황자 앞에 서자 에스트레드가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상인은 연신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찬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드십니까?”
세리나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언제나 기사단 정복만 입어와서 아무래도 여성다운 몸가짐이 아니라...좀 안어울리지요?”
“음,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황자가 문득 꿈에서 깬 것처럼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뻗어 세리나의 흰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군.”
남자는 열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일어나서 여자의 주변을 빙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