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자비 --> 얇은 눈꺼풀 위로 밝은 빛이 스몄다. 볼 위로는 기분좋은 바람이 스쳐지났다. 금발을 넓게 풀어헤친 채 잠이 들었던 여자가 상쾌한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잠을 깼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세리나는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많이 운 것처럼 안구가 메마르고 따가웠다. 눈두덩이가 잔뜩 부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온몸에 안아픈 곳이 없었다. 근육통으로 도배가 된 느낌. 게다가 조금 움직이자 다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시원한 손가락이 다가와 뒷목과 어깨를 마사지했을 때 세리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많이 아픈가?”
가벼운 실내복만을 걸친 은발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맨살에 닿는 감각에 여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다행히 이불이 가슴께까지 덮여 있었지만 어깨 위로 완전히 벗은 상태였다. 푹신한 이불 속에 휩싸여 있는 몸도 속옷 한장 걸치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녀의 얼굴이 당황과 황당에서 천천히 놀람과 부끄러움으로 물들어갔다. 세리나는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소리를 냈다.
“아.”
“설마 기억이 안난다든가 하는 소리는 말고.”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코끝을 살짝 튕겼다. 물론, 그녀는 기억이 났다. 처음 잠 속에 묻혀있던 뇌는 어젯밤의 기억을 장면 하나하나씩 천천히 꺼내놓았다. 심지어 이곳은 에스트레드의 침실이었다. 분명히 황자가 기절하듯 잠든 그녀를 여기까지 안아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베개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목덜미와 귀까지 빨개진 것이 잘 보여서 황자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트레드의 큰 웃음소리를 듣고 여자가 놀라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쭉 그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은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로 세리나의 벗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공기가 맑아서 창문을 좀 열어놨는데 바람이 찬가?”
“전, 전하…”
“또 시작이군.”
그가 혀를 찼다. 어젯밤 그의 품 안에서는 자지러지게 울면서도 그놈의 전하 소리가 툭하면 나오는 바람에 오기가 나서 이름 좀 들어보겠다고 어지간히 괴롭혔다. 그녀가 서툴고, 성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알아서 부드럽게 하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었지만…
“하지만, 반려역할을 하는 것은 둘이 있을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세리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도 반항을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큭큭거렸다.
“둘이 있을 때 전하라고 하고 남들 있을 때 내 이름을 부를 자신이 있나? 자네 연기력이 별로 좋진 않잖아.”
“....”
“자신 있어?”
“저, 그건…”
에스트레드가 혀를 찼다. 그는 여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자, 지금 우리 주변의 공기가 느껴져?”
남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세리나는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엉겁결에 들고 주변을 살폈다. 맑은 아침햇살.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맨 어깨를 간질였다. 반대로 이불 안의 몸은 따스하고 안락했다. 고요한 황궁 정원의 숲에서 들려오는 새 지저귀는 소리. 평소보다 많이 늦은 기상.
그리고 가벼운 차림의 남자가 침대 속으로 들어와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여자가 긴장해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기에 집중해보게.”
에스트레드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맨살에 닿는 남자의 매끄럽고 강인한 손을 애써 모른 척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주변 공기가 몹시 안정되고 좋은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이나 향수처럼 그저 좋기만 한 냄새가 아니었다. 내면부터 깊이 안정시키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공기였다.
“우리들, 로마나 일족은…”
황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이 강한 만큼 본능이 강한 대가를 치르는 혈통을 가지고 있지. 반려의 결약은 그 본능을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절차다. 로마나들은, 맞는 사람을 만나 제대로 서로의 체향이 섞이면 공격성이 현저히 저하된 공기를 지니게 되지.”
세리나는 폐 깊숙히 들숨을 쉬었다. 차갑고 신선한 아침공기가 더할나위 없이 기분 좋았다.
“아주...기분 좋고, 신선한 공기입니다. 그럼 이게 바로 결약을 맺은 증거인가요?”
“로마나 황족은 그를 둘러싼 공기로 성인이 되었는가를 판단한다. 그래서 계승식 전에 반려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지. 힘이 강하고 높은 서열의 황족일수록 더 민감하게 상대의 공기를 알아채서 골치가 아파.”
말끝에 에스트레드가 투덜거렸다.
“특히 황제나 황후는 더럽게 코가 민감해서 결약을 정말 맺었는지 아닌지 단번에 알아버리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듯 물었다.
“동일한 혈통이 아니어도 결약이 가능한 겁니까? 저는 황실과 조금의 관계도 없는 일반인인데요.”
“거의 불가능하지. 그 말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
에스트레드는 씩 웃었다. 투명한 아침햇살에 둘러싸인 은발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세리나는 다시 고개를 배게로 묻었다.
“...아무튼, 어젯밤으로 인해 결약은 성공적으로 끝난 거군요.”
“끝나다니, 무슨 말이지?”
“맺어졌으니까 이제 된 거 아닌가요?”
세리나의 목소리가 의아하게 올라갔다. 에스트레드는 따스한 이불 속에서 끌어안은 몸을 더욱 힘주어 가까이 밀착시켰다. 방금 전과는 달리 그녀의 몸이 긴장하지 않았다. 그 변화가 남자를 기쁘게 만들었다.
“결약은 일회성의 관계로 맺어지고 끝나는 게 아냐. 서열자와 반려는 언제나 가깝게 곁에 있어야 한다.”
“마음이 식으면 반려 역시 바뀐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전하의 곁에 계속 따라다니면…?”
“그게 아니라, 이런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지.”
남자의 손이 갑자기 둥글고 뽀얀 그녀의 가슴을 덥썩 쥐었다. 화들짝 놀란 세리나가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전, 전하!”
“몇번이나 항명을 할 생각이지? 이름 불러.”
그는 세리나의 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 아래로 우둘거리는 상처자국이 느껴졌다.
매끄럽고 잘 단련되어 군살 없는 등에는 큰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사로 평생을 살아온 만큼 몸 전체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지만 몸 중앙부에는 딱 이 흉터 하나 뿐이었다. 길게 등을 가로질러 난, 기사 세리나 리엔의 목숨을 거의 앗아갈 뻔 했던 거대한 흉터.
에스트레드는 아문 지 몇년도 지난 흉터 위로 꼼꼼히 입을 맞췄다. 살이 갈라져 봉합한 것이라 상처 근처의 피부는 아직까지도 다른 곳과 감각이 달랐다. 예민한 곳에 느껴지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에 세리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가슴의 돌기를 손끝으로 꼬집고 긁으며 괴롭히다가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옅은 색의 음모가 자리잡은 둔덕 위에 손가락을 얹고 그는 조심스럽게 갈라진 틈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틈 사이 고개를 내민 돌기를 비비자 여기사의 몸이 떨렸다. 어젯밤 이미 세번이나 남자를 받아냈던 여자의 은밀한 곳이 잔뜩 붓고 예민해져 있어 더 이상은 무리일듯 싶었다. 남자는 자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고 세리나는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엔 자네 몸에 무리가 가니까…”
그는 세리나를 돌려 안았다. 마주 보는 자세가 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에스트레드가 세리나의 손을 자신의 남성에 가져갔다. 거대하고 뜨겁다. 태연해보이는 흰 얼굴과는 달리 잔뜩 성난 남성에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머뭇머뭇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래, 그렇게...좀 더 힘을 주어 쥐어도 돼.”
세리나의 서툰 손길에 에스트레드는 흥분했다. 아래위로 훑는 손길은 정말 민망할 정도로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사는 흥분해서 눈을 감은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스스로 손을 움직여 그가 흥분하도록 이끄는 것이 어쩐지 모르게 만족스러웠다. 황자는 여자의 엉덩이와 회음부를 애무하면서 그녀의 손 안으로 다시 한번 토정했다.
세리나는 손 안 가득히 울컥 터져나오는 끈끈한 흰 액체를 쥐고 손을 내려다 보았다. 남자가 머리맡 협탁에서 작은 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전하…”
기분좋은 숨을 내쉬다가 황자는 그 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세리나는 전하라는 호칭이 또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에스트레드가 그녀의 어깨를 쥐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자, 내 눈을 봐.”
맑은 녹안과 찌를듯한 은청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다시. 내가 누구라고?”
“...에스트레드.”
“좋아, 잘했어. 다시 한번.”
“에스트레드.”
“그래.”
황자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
세리나의 몸이 안좋아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식사는 침대에서 해야한다고 에스트레드가 주장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체력단련을 위해 대련장을 뛰고 있을 시간에 침대 식사라니 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익숙지 않은 성관계로 인해 몸이 평소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몇년을 보낸 기사였다. 어깨에 적의 검을 꽂고도 해질때까지 싸웠던 여기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황자의 긴 팔을 보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세안물을 가지고 들어온 시종장이 익숙한 세리나의 얼굴을 황자의 침대 위에서 보고도 알듯모를듯한 미소만을 띄운 것은 사실 좀 충격이었다. 중년보다 노년이 가까운 시종장 호보프는 세리나가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에스트레드의 곁에 있었다.
“침대 위에서 먹을만한 걸 준비했습니다.”
크로와상과 버터, 각종 잼과 신선한 꿀. 시원한 과일 주스와 달걀 요리들. 거한 은쟁반을 들고 온 시종장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가타부타 말 없이 그는 세리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원래 시종장은 수호기사와 별다를바 없이 황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나이가 많은 그가 세리나와 밀렌에게 말을 편히 했었다.
“호보프.”
“괜찮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황자비님.”
화, 황자비.
갑자기 얻어맞은 말의 충격에 세리나는 입을 쩍 벌렸다. 맞다. 그녀는 반려의 역할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고, 그건 결국 황자비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깨닫지 못하던 현실이 성큼 다가온 기분에 얼이 빠진 세리나를 눈치채고 에스트레드가 조용히 쿡쿡 웃었다.
“식사를 한 뒤 황궁의 재단사와 성내 포목점의 상인을 들라 해라. 황자비가 결정되었으니, 그에 어울리는 의상과 보석을 선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