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약-1 --> 집무실 안, 창문으로 달빛만이 쏟아져 내렸다.
수호기사의 거처는 로마나 황궁 안에 자리잡고 있다. 세리나의 방 역시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궁 안에 있었다. 두명의 수호기사는 밤 늦게까지 교대로 황자의 등 뒤를 지켰지만 에스트레드는 자비로운 주군이었고, 피곤하면 돌아가 편안히 쉬도록 배려했다. 밀렌 바스트가 오늘밤의 수행이었으니 오늘 세리나 리엔은 퇴근하여 개인 시간을 가져도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도 없이 불꺼진 어두운 집무실을 떠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세리나 리엔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발을 떼서 걷기 시작할 때부터 검을 배웠다. 손에는 굳은 살이 가득했고 손가락은 마디가 굵었다. 장갑을 껴서 타지는 않았지만 흰 피부가 그리 곱지도 못했다. 흉터로 이곳저곳이 거칠었다.
기사 지망생이던 열세살 때 처음으로 에스트레드를 만났다. 화려한 은발을 후광으로 둘렀던 천사같았던 소년. 첫눈에 평생을 걸만 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던…
‘그 어린 나이에도 충심이 아니라 연심이었나.’
세리나는 거친 자신의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24해 평생 동안 단 한순간도 뒤돌아봄 없이 기사의 길을 걸었다. 손은 굳은 살이 배기고 몸에는 흉터가 새겨졌다. 황자의 곁에 서서 십대 후반에 이미 전장을 누볐고 수많은 적을 척살했으며 그 공으로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스스로 여성임을 먼저 내세워본 적도 없었다. 그 흔한 애인 한명 없이 그녀는 올곧게 주군만을 바라보았다. 거목 뿌리처럼 단단한 충심과, 그 밑 깊은 곳에 호수처럼 깊은 연심을 간직한 채로.
처음부터 잘못 됐을지도 모른다. 변방의 국경 수비대에서 머물렀다면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아예 몰랐을 것을.
‘정말 괜찮은가.’
세리나는 고민했다. 이전까지는 에스트레드의 옆자리 따위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기사였고 그 외의 어떤 자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의 수호기사로 머무를 수 있다면 그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그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아주 간단하게.
-약속하지. 반려를 맞이하면 수호기사는 교체될 것이다.-
슈엔 대공녀를 향해 농처럼 가볍게 말했던 황자의 약속이 생각났다. 오후 내내 그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 마냥 에스트레드는 메리타 궁부인의 정원으로 가버렸다. 슈엔 대공녀를 대신할만한 여자를 찾기 위해.
‘왜 내게 반려 역할을...제안하신걸까.’
오래도록 내려온 전통과 역사가 말한다. 황족은 같은 피와 결혼하여 더 강한 자손을 낳을 의무가 있다. 로마니엔의 역사를 통틀어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황후는 몇명 되지 않았다. 저항을 뚫고 비-로마나 황후를 맞은 황제들은 대부분 비극적 사랑으로 끝나 노년이 불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가 섞이지 않은 황후들은 거의 모두 단명했으므로.
법도가 그러니 당연히 황자들의 반려 역시 일찌감치 정해졌다. 지금까지 반려가 불분명한 것은 에스트레드 한명 뿐이었다. 클리스와 레드포 둘 다 정해진 여성이 있었다.
‘냉정하신 분.’
아주 오래된 마음과, 농담같은 에스트레드의 제안. 가까운 미래에 받게 될 상처와, 그보다 조금 유예 될 더 큰 상처. 세리나는 저울질을 포기했다. 머릿속이 멍해서 생각이 잘 되지 않았다.
진짜 반려, 로마니엔의 황후가 되라는 프러포즈였다면 세리나는 도망갔을 것이다. 그녀는 기사였고, 그보다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썼다. 뭔가 생각이 있으리라고-그에게 쓸모가 될 수 있으리라고 세리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욕심. 잠깐이라도 에스트레드의 곁에서, 마치 그의 반려가 된 듯한 모습으로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아니면 내가, 며칠 전 숲속의 사고 이후에 욕심이 많아진 건가…’
불현듯 그날이 생각났다. 열기로 타는 것 같았던 에스트레드의 남성과 완전히 열렸던 몸. 스물네살이 될 때까지 단 한번도 정복당하는 기쁨을 몰랐던 세리나의 여체는 황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 컸다. 처음 겪는 꿰뚫리는 고통. 아랫배 깊숙히 불로 지져지는 듯한 통증. 아마도 자궁이라고 불릴 곳이 남성에게 유린당하는 기분.
하지만 그것은 에스트레드였다.
기억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촉촉히 젖어오는 느낌에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불 꺼진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며 이런 생각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녀는 삼인용의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등을 둥글게 말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
“궁에 들어오지 말 것을 그랬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가?”
“헉…!”
문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리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잡았다. 은발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워, 진정하게. 내가 놀래킨 모양이군.”
“전, 전하.”
아무리 정신을 놓고 있었다지만 사람이 방에 들어오는 것도 모르다니 기사로서 실격이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바스트 경은 오는 길에 방으로 돌아갔다. 자네는 퇴근하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건가? 달 구경?”
에스트레드가 웃었다. 과연 달빛이 좋긴 했다. 열린 발코니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푸른 빛 속에 긴 은발의 남자가 천사처럼 웃었다. 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먼저 들어가라, 리엔 경.-
파티에 가기 전 에스트레드가 남겼던 말이었다. 스치듯 말을 흘렸지만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먼저 들어가라. 그의 제안에 대한 말이었다. 세리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퇴근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명대로.”
목이 뻑뻑했다. 다행히 듣기 흉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아니었다. 에스트레드가 다가왔다. 그의 흰 얼굴 위로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남아있었군.”
“...네.”
세리나는 무표정했다. 아름다운 녹안이 젖어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전하의 반려 역할을 대신하는 것.”
“...그래.”
에스트레드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빈틈없이 올린 금발 밑으로 흰 피부가 창백했다.
“하지만 전하, 제가 어떤 쓸모가 있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녹색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봐 왔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은청색 눈동자가 마주 보았다.
“나는 로마나 일족의 뒷배를 가진 황후를 원하지 않는다.”
황자는 단호하게 답했다.
“반려가 없이는 계승식을 치를 수 없어. 하지만 일반 여성을 반려 후보에 앉힌다면 황후파와 재상파의 등쌀과 암살 시도를 넘겨낼 수가 없겠지.”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트레드 마저도 수많은 암살시도를 넘겨왔다. 제위를 향한 권력다툼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이 있을 것이다. 보통의 여성들이 이 암투를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세리나 리엔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한계까지 단련된 기사이기도 했다. 그녀의 별명은 '붉은 에메랄드'였다. 에스트레드와 전장을 누비며 얻은 악명이었다.
“알겠습니다. 역할의 연기는 언제까지 입니까?”
“결정해줘서 고마워. 무사히 계승식이 끝나고 제위를 이어받게 되면 자네를 안전하게 놓아주겠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년도 걸리지 않을 거야. 변방의 비옥한 영지와 은퇴 후의 보수는 충분히 주지.”
그는 손을 뻗어 세리나의 뺨을 감쌌다. 밝은 미소가 황자의 만면에 아로새겨졌다. 에스트레드가 고개를 숙여 세리나의 도톰한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전하…!”
또다시 고지식한 얼굴이 되어 잔소리 하려는 여기사의 뺨을 잡고, 황자는 이마를 댔다.
“이 정도 가지고 잔소리 하지 마. 이제 자네는 이런 것에 익숙해 져야 해.”
“무슨...연기일 뿐 아닙니까.”
“반려의 역할이지만 결약은 맺어야 한다. 개처럼 후각이 예민한 황제와 황후를 피해야 하니까 말이야.”
세리나가 아연한 얼굴을 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이 그녀의 체향을 들이 마셨다. 백합처럼 맑고 투명한 페로몬. 하지만 요염하고, 어딘가 습한 기운을 띄우고 있었다.
“결약이라 하심은…”
“우리 페로몬...그러니까, 체향을 뒤섞어야 하지.”
남자가 손을 뻗어 세리나의 틀어올린 금발을 풀었다. 고정시킨 핀을 뽑자 숱 많은 금발이 한번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