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6화 (6/142)

<-- 제안-5 -->                에스트레드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 발을 디딜 때부터 지루했다. 그는 하품을 했고 메리타 궁부인이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싫은 소리를 할만한 배짱이 없었다. 어차피 먹히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황제를 똑같이 닮아 지극히 ‘로마나다운’ 에스트레드는 그의 모친에게 피붙이의 애정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디너 파티를 빙자한 1대 다의 선자리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애초에 황자는 이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메리타 궁부인이 이곳저곳에서 선별한 귀족 영애들이 정원에 마련된 파티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가슴을 크게 드러내놓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눈치를 보며 황자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드러낸 흰 가슴은 크고 육감적이었다. 그녀에게서 짙은 천일화의 향과 더불어 체향이 솟아올랐다. 너무 노골적인 냄새라서 에스트레드는 희미하게 비웃었다.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마주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 있는 미소였다. 남자는 약간 냉소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로마나들만이 뿌릴 수 있는 천일화의 향이라는 것은, 황족들이 지닌 페로몬 중 성적인 특성을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향수였다. 일반인들은 느끼지 못한다. 아주 예외적으로, 자신과 페로몬의 특성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 외에는. 그들은 그걸 운명의 상대라고 불렀다. 이곳에 모인 여자들은 거의 다 황족 일가의 방계였다. 옅게라도 피가 섞인 자들이라 메리타 궁부인의 정원에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천일화의 향과 각자의 페로몬이 짙게 피어올랐다. 어둠이 진 저녁 정원에는 서늘한 바람 대신 욕망이 가득한 페로몬이 진득하게 공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슈엔 대공녀가 아니라면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여자로 황후를 세우겠다는, 궁부인의 의지가 느껴졌다. 모친의 노력이 가상했지만 동시에 매우 성가시고, 거슬리기도 했다. 황자는 그녀에게 애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십육년 전 후작부인이던 그녀가 황태자 시절의 황제를 꾀어내어 에스트레드를 임신하고, 그 기세를 몰아 후궁전까지 들어앉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이나 그랬다.

메리타 궁부인이 자못 자비로운 미소를 띄우고 에스트레드의 곁에 앉았다.

“어떻습니까, 황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습니까?”

“글쎄요.”

“황제 폐하께서 친히 명하신 자리에요. 곧 계승식이 있는데, 가장 강하고 완벽한 여성을 반려로 맞아야 합니다. 황자가 분명히 후계자가 될 텐데 다음 황후 자리를 뽑는 거나 다름 없잖아요?”

궁부인이 기분 좋게 속살거렸다. 그는 모친에게 시선을 던졌다. 메리타 궁부인은 검게 염색한 머리와 짙은 분칠로 나이를 가려보려 했으나 늙은 티가 여실했다. 황제가 그녀를 안아 에스트레드를 임신시킬 때 이미 농익은 중년의 나이였던 메리타 궁부인은, 지금 후궁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다. 또한 욕심으로 따진다면 현 황후와도 권력욕이 맞먹을 만한 여자였다.

“...”

그는 말 없이 곁에 앉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볼을 붉히며 입술을 물었다. 궁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소개했다.

“와부이 백작가의 첫째 여식이에요. 줄리엣 와부이. 줄리엣, 황자와 인사 나눴나요?”

“처음 뵙습니다, 에스트레드 전하.”

도톰한 입술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넓게 물결치는 밤색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둥근 눈을 빛냈다. 체향이 진했다. 냉정해보이는 황자가 자신에게 눈을 돌리자 줄리엣 와부이는 자신감 있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주변 아가씨들의 시선이 전부 그들에게 꽂혔다.

“와부이 백작가라니 정말 방계의 방계에서도 데리고 오셨군요.”

남자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젊었을 적 메리타 궁부인의 권력욕은 에스트레드 마저도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그간 소외되었던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백작가는 좋은 집안이지요. 점잖고, 청렴한 귀족이에요.”

“청렴하다라...빈한한 가문인가요?”

귀족들의 단어가 뜻하는 것은 어차피 뻔하다. 궁부인과 줄리엣의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그녀는 방긋 웃었다. 메리타 궁부인은 어색한 순간을 무마하려고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로마나의 피는 확실히 섞였습니다. 격세유전이라 윗윗대의 형질이 줄리엣 양에게서 크게 발현이 되었지요.”

“...”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줄리엣이 어깨를 펴면서 체향과 함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주변에 맺혔다. 정원을 채우고 있는 십여명의 여성들에게서 질투와 시샘어린 시선이 줄리엣 와부이에게 날아왔다. 피가 짙고 강한 여자일수록 황자의 눈에 들기 쉽다. 제국 로마니엔의 황후란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애써 고른 아가씨가 자랑스레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자 궁부인 역시 미소를 지었다.

“느껴지지 않나요? 뛰어난 아가씨지요.”

“흠. 그렇습니다, 어머니. 강하고 아름다운 숙녀군요.”

줄리엣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트레드의 잔에 찻물을 채웠다. 섬세한 레이스 위로 애써 드러낸 가슴이 황자의 눈 앞에서 출렁거렸다. 줄리엣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백작가의 영애는 황자를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하고 아름답다라.’

그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을 에스트레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황자는 자신의 수호기사를 생각했다. 기사로서 지극히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그녀.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인 여자.

‘스스로 걸어들어와야지, 정신 차리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모래지옥.’

“전하, 먼 사막에서 들여왔다는 귀한 꽃차입니다. 궁부인께서 직접 구하셨다고 하셔요.”

줄리엣 와부이가 그의 생각을 깼다. 애교 있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일종의 시위였다. 자신에게 주목하라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줄리엣이 든 티포트에 손가락을 댔다.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로 된 주전자가 얼어붙었다.

“꺄악!”

손끝이 얼어붙는 고통에 줄리엣이 비명을 지르며 티포트를 놓쳤다. 찻물이 공중에 그대로 얼어붙고, 에스트레드의 손 안으로 작은 얼음폭풍이 몰아쳤다. 티포트는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백작 영애의 손 끝에서 피부 조각이 떨어졌는지 피가 흘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자!”

메리타 궁부인이 사색이 되어 질책했다.

“난 누군가 내 앞에서 쓸데없이 잘난 척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황자는 잠시 얼음폭풍을 손 안에서 굴리다가 공중에 띄운 티포트를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안착시켰다. 티포트로부터 얼음이 테이블로 타고 내려갔다.

“누군가가 내 일에 참견하는 것은 매우 싫어하지요.”

메리타 궁부인 앞의 테이블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터운 대리석의 테이블이 쩌적 갈라졌다. 공포에 질린 줄리엣이 떨어지려는 티포트를 엉겁결에 받으려 했다.

“거기 손대지 마세요. 그대로 팔을 잘라내야할 테니까.”

에스트레드는 상냥하게 말했다. 줄리엣이 급히 손을 거뒀다. 정원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궁부인이 다시 소리를 쳤다.

“황자!”

그녀를 무시하고 남자는 기운을 거둬들였다. 대리석 테이블이 온통 갈라져 부서져 내렸다. 티포트가 깨져 바닥으로 뒹굴었다. 에스트레드가 뒤로 손짓했다.

“갈 시간이다, 바스트경.”

정원 너머 어둠 속에서 거짓말처럼 밀렌 바스트가 나타났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나타난 수호기사가 황자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주었다. 에스트레드는 시간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디너 후의 티파티였으니 시간은 이미 아홉시가 넘고 있었다.

“너무 늦었군요.”

"폐하께서 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대로 아무도 반려로 맞이하지 않을 셈인가요!"

"당신이 상관하실 일은 아니지요, 어머니."

"왜 아닙니까! 내가 황자의 모친인데!"

에스트레드는 메리타 궁부인을 훑어보았다. 십여명의 어린 귀족 영애들 앞에서 황자에게 무시를 당한 궁부인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황자가 제위에 오르면 내가 태후란 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어둠에 잠겨있을 자신의 집무실을 생각했다.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이만큼 시간을 끌었으니 됐다. 에스트레드가 여기 온 것은 여자들을 보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는 돌아서며 궁부인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겼다.

“폐하께는 잘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

메리타 궁부인은 그대로 굳었다. 황자의 손가락 끝이 스치고 지나간 브로치가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 떨어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