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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화 (5/142)

<-- 제안-4 -->                대공녀는 답하지 않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슈엔은 저 여기사가 싫었다. 십여년을 줄기차게 싫어해 왔다. 하루종일 기사 수업에만 매달리는데도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과 같은 여인이라, 하필 그녀가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인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오후의 일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만 들어가봐.”

에스트레드는 슈엔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세리나 리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자의 뒤, 수호기사의 자리에 부동자세로 섰다. 그녀 역시 슈엔 로마나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이유가 의문일 뿐이었다. 아는 바가 있냐고 물어볼 때마다 에스트레드는 그저 희미하게 미소짓고 넘겼으니까.

흔한 머리장식 하나 없이 말끔하게 틀어올린 금발과 단단히 단련된 늘씬한 체형. 티 없이 맑은 녹안에 우윳빛깔로 반짝이는 피부. 사교계에 밤하늘 별처럼 많은 미인들이 있었지만 만약 세리나가 드레스를 입었다면, 그 중 가장 많이 입줄에 오르내리는 미인이었을 것이다. 슈엔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쏘아보았다.

“어제 메리타 궁부인께 다녀왔어요.”

“쓸데없이 방문하는 곳이 많군.”

“당신의 모친이시니까 당연하죠. 곧 대공가의 시어머님이 되실 분이신데.”

“쓸데없이 꿈도 크고.”

비웃음이 섞인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슈엔은 가슴을 폈다.

“황후 폐하와 더불어 후궁전에서 파티가 있었더군요. 곧 장미 정원에서 서열자들의 반려 후보들을 모아 친목을 다질 계획이시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제게 말씀하셨죠. 가능한 빨리 당신과 반려의 결약을 맺으라고. ”

“친목이라.”

쓸데없는 짓이다. 하지만 막내 황자인 레드포의 어미인 현 황후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황자들과 그 반려들의 정보를 알아둬야 할 테니까 자주 이런 일을 벌릴 것이다.

“그리고 계승식에 대한 황제 폐하의 의중을 말씀하셨어요. 빠른 계승식과, 가장 강한 서열자. 가장 ‘완성된’ 후계자를 원하신다더군요. 폐하 당신께서 그러셨듯이.”

황자는 무관심한 얼굴로 문쪽으로 고개를 까딱 했다. 시종장이 문을 열었다.

“들어가봐. 슈엔 로마나 대공녀.”

여자는 오만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두 주먹이, 바스락거리는 물망초 빛 실크 드레스를 꽉 쥐고 떨리는 것을 세리나는 보고 있었다. 다소 안쓰러워서 여기사는 눈을 찌푸렸다. 에스트레드가 아닌,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저런 대접을 받은 적 없는 여자다. 그녀가 알기로도 슈엔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에스트레드에게 호감을 표해왔다. 세리나가 처음 열여덟살이던 에스트레드에게 인사를 드렸을 때 그의 곁에는 이미 검은 머리의 대공녀가 있었다. 이제 와서는 거의 오기에 가까운 뭔가가 되어버린 듯 하지만.

나가려던 슈엔이 뒤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불화살처럼 세리나의 얼굴에 꽂혔다.

“저 여기사는 언제까지 여기 둘 거죠?”

황자는 나른하게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살짝 입술을 핥았다. 아마 슈엔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히고 눈썹을 모았다. 이 상황에 장난할 생각이 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곧 반려를 정할 거잖아요. 이성의 기사를 수호기사로 삼는 것은 이제 그만두세요.”

슈엔이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가 수호기사라니, 정말 상식 이하에요. 법도도 모르나요?”

대공녀는 황자의 성질을 긁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무리 황가 못지 않은 위세를 지닌 대공가의 상속녀라지만 도를 넘었다. 분노가 일면 충동의 제어가 가끔 고삐 풀리는 로마나 일족의 성질상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에스트레드는 냉정하지만 그 역시 가끔 분노를 폭발시킬 때는 결국 로마나의 일족이었다. 세리나는 내심 긴장하며 황자를 만류할 준비를 했다. 황자는 자신의 일에 터무니 없이 간섭하는 것을 가장 혐오했다. 특히 자신의 수호기사들에 대해서.

그러나 에스트레드는 턱을 괴고 슈엔을 물끄러미 건너다 볼 뿐이었다. 대공녀는 분노에 눈을 붉게 물들이고 그를 마주 쏘아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뭉글거리는 기운이 솟아나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황가의 일원은 아니지만 슈엔 역시 로마나의 피가 짙은 자다. 에스트레드는 픽 웃었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사실이지.”

여기사는 부동자세였지만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슈엔 역시 예상 외의 대답에 당황한 듯 멈칫했다.

“확실히 황제의 근방에 이성의 수호기사가 있던 선례는 없었지. 수호기사는 황후보다 더 오래 황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황자가 여기사를 건너다 보다가 다시 슈엔을 바라보았다.

“반려를 맞음과 동시에, 수호기사는 바뀔 것이다. 약속하지. 염려하지 마.”

*****

오후 시간 내내 에스트레드는 서류 작업을 진행했다. 연속되는 결재에 지칠법도 하지만 그는 곧은 자세로 앉아 서류를 검토했다. 일신의 강함으로 서열이 결정된다지만 그들 역시 황제가 되어 제국을 경영해야하기 때문에 황자들은 제왕학을 배우고 국가 경영을 실무로 배웠다. 물론 클리스 로마나는 국가 경영에 관심이 없었고 레드포 로마나는 너무 어렸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에스트레드 뿐이었다.

긴 은발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남자의 뒤에서, 밀렌 바스트는 슬쩍 세리나 리엔의 눈치를 보았다. 황자의 양대 수호기사이기 때문에 둘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오늘 오후 세리나는 영 안색이 이상했다. 흰 얼굴 위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 앞에 계신데 함부로 말을 꺼낼 수도 없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고개를 든 황자가 시계를 보았다. 괘종시계는 오후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지.”

서류를 덮은 그가 일어섰다. 오늘 에스트레드는 파티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 메리타 궁부인이 주최하는 작은 모임이었다. 메리타 궁부인 역시 세리나를 상당히 싫어했기 때문에 오늘 밤근무를 서게 될 수호기사는 밀렌 바스트였다.

“메리타 궁부인의 후원에서 열리는 거지요?”

“맞아. 귀찮군.”

“어쩐 일로 궁부인의 모임 초대에 응하셨습니까? 전하께선 언제나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밀렌은 의아하게 물었다. 황자는 언제나 모친의 모임 초대나 티파니 초대장을 단칼에 거절했다. 메리타 궁부인이 후궁의 권력 다툼에서 완전히 밀려버린 것도 그 때문이 컸다. 아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모친이란 그런 존재였다.

“오늘은 황제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자리라 어쩔 수 없군.”

“폐하께서요?”

“그래. 오전에 부르심이 있어 들어갔더니 명을 내리시더군. 계승식은 한달 뒤로 잡혔으니 가능한 빨리 반려의 결약을 맺으라고. 하지만 내가 슈엔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아시니까...어머니께 자리를 만들어 내게 걸맞는 여성들을 소개하라고 말이야.”

조용히 에스트레드의 뒤에 서있던 세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여전히 충격 속이었다. 반려를 맞으면 수호기사를 바꿀 것이라는 에스트레드의 말.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선택했던 수호기사의 자리는, 겨우 한달도 남지 않은 시한부의 자리였던 것이다.

멍했다. 십여년을 한결같이 있어온 자리였다. 비록 그의 곁에 설 수는 없지만 그의 뒤를 지킬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은 기사였고, 울고싶지 않았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먼저 들어가라, 리엔 경.”

“...네?”

그녀를 찝어 하는 말에 세리나는 움찔 놀랐다. 밀렌은 다시 세리나의 눈치를 보았다.

일어선 에스트레드의 곁으로 시녀들이 들어와 치장을 시작했다. 전신 거울이 들어오고, 단순한 검은 정장 위로 자주색의 빌로드 망토가 드리워졌다. 금색 자수가 수놓인 허리끈을 메고 검은색의 날렵한 부츠가 신겨졌다. 길고 매끄러운 은발마저 잘 빗어 오일로 다듬자 에스트레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세리나의 앞에 다가섰다. 황자의 은청색 눈동자와 마주친 세리나의 녹안은 흐려져 흔들리고 있었다. 에스트레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의 뺨을 한번 감쌌다가 놓았다.

“다녀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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