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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4화 (4/142)

<-- 제안-3 -->                사열이 끝난 뒤 세리나는 땀을 식히며 궁 안으로 돌아왔다. 에스트레드는 황제의 부름이 있어 사실로 갔다는 전언이 있었다. 홀을 걷던 그녀는 먼 발치에서 한 무리를 발견하고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가까이 다가온 무리의 앞에 서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오랜만이군, 리엔 경.”

“제5황자, 클리스 로마나 전하를 뵙습니다.”

“허례는 집어치우게. 오랜만에 보니 더욱 미인이군.”

제5황자 클리스 로마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새빨간 적발에 새카만 눈을 가진,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키만 큰 것이 아니다. 우람한 어깨와 두꺼운 가슴, 거대한 팔뚝의 근육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의 두배로 보였다. 매우 장신인 에스트레드라도 이 남자의 옆에 서면 늘씬한 여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재수 없군.’

세리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사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리나만 보면 항상 눈이 번드르한 채 그녀를 훑어보았기 때문이었다.

‘호색한.’

무표정한 채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클리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세리나의 턱 밑에 손가락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예쁜 얼굴이야. 내가 항상 제안하는 거지만, 내 궁부인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나? 리엔경의 미모 정도라면 훌륭한 후궁이 될 테지.”

그의 곁을 둘러싼 남자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클리스의 곁에 서있던 귀족 남자 한명이 입을 열었다.

“무위로 소문난 여기사이니 단련 또한 되어있지 않겠습니까? 귀족의 여식들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겠지요.”

점잖은 척 돌려 말한 뜻을 알아들은 사내가 금속 종이 울리는 것처럼 듣기 싫은 소리로 웃었다.

세리나 리엔은 제3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수호기사 중 한명이다. 그녀에게 적어도 겉으로 이런 식의 모욕을 가할 수 있는 자는 굉장히 드물었다. 잘 관리하여 땋은 검은 머리를 꼬면서, 남자는 그녀를 아래 위로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르젤 님.”

“그러게 말이네. 자네 같은 미인은 항상 곁에 두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알다시피 슈엔이 자넬 워낙 싫어해서.”

오르젤이 히죽거렸다. 세리나는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슈엔 대공녀님께선 안녕하시지요?”

“안녕하고말고.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불처럼 화를 내고 있지.”

거짓말이다. 사실 오르젤은 슈엔의 근황을 세리나보다 모를지도 모른다. 그는 밸러스 대공가에서 의절당한 패륜아였으니까. 세리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클리스 로마나는 거대한 몸을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킁킁 거리고 냄새를 맡았다.

“리엔 경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는데.”

“...전하.”

“아, 실례라는 건 알아. 그런데 정말로 좋은 냄새인데? 꽃향기 같은.”

“클리스 전하, 리엔 경이 곧 꽃인데 당연히 꽃향기가 나겠지요.”

“그런 건가?”

클리스 로마나가 오르젤의 농담에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 역시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불쾌함에 세리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원래도 성적인 농담을 거리끼지 않고 하는 남자였지만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클리스 로마나는 그녀가 물러선 공기 중으로 손을 휘저어 코 쪽으로 냄새를 맡았다.

“흠, 정말인데. 좋은 향기야. 원래도 이랬던가?”

“...? 진심이신지... 제게는 느껴지지 않는데요?”

오르젤이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클리스 로마나는 집중한 표정으로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사는 불쾌한 얼굴을 굳이 감추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래.”

클리스 로마나는 그의 곁을 스치는 세리나 리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족 한명이 그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클리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아니...저 여자, 뭔가 달라졌는데.”

거대한 덩치의 남자는 안어울리게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다른 황자들과는 다르게 클리스 로마나는 짐승형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얼음을 다루는 에스트레드는 레이피어에 얼음을 덧씌우고 눈폭풍을 불러모은다. 불 속성의 레드포는 불꽃에 휩싸인 채찍을 휘두르며 화염을 폭발시킨다. 클리스 로마나는 그 자신이 짐승으로 화해 적과 격돌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육체 자체가 야수와 다름 없었다.

“클리스 전하께선 항상 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셨지요. 에스트레드 전하의 수호기사만 아니었다면 진작 취하셨을 것을. 나이도 많은데 아직 데려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저대로 노처녀로 늙어죽을 모양입니다.”

오르젤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군인과 기사 중에는 여성이 유달리 적은 로마니엔 제국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야밤에 강제로 안는 일이 비일비재한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세리나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성이 기사로써 별일 없이 십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유난할 정도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 꽃을 꺾은 모양이군.”

“예?”

클리스는 유난히 예민한 후각으로 공기 중에 퍼지는 세리나 리엔의 체향-페로몬을 빨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야수화 되기 직전처럼 흥분해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세리나의 체향은 맑고 투명하고 단정했다. 동시에 물기 많고 습한, 요염한 기색이 느껴졌다. 아직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막 피어나는, 꿀이 가득찬 꽃.

“...에스트레드와 교미라도 한 것인가.”

클리스 로마나는 피식 웃었다. 홀 저편으로 멀어지는 여기사의 가느다란 허리와 늘씬한 다리가 유달리 군침 돌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적발을 쓸어넘겼다. 눈 안에 어둡게 욕망이 피어올랐다.

*****

그 무렵, 에스트레드는 달갑지 않은 방문을 받고 있었다.

“하도 찾아오질 않으셔서 제가 왔지요. 언제나 여자에게 움직이게 하는 것, 좀 너무하지 않나요?”

“...나는 네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알아요. 하지만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것도 알지요. 내가 당신의 약혼녀라는 것도 알고요.”

에스트레드는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슈엔 로마나, 밸러스 로마나 대공의 애지중지하는 단 하나의 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진주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새파란 눈의 대공녀는 에스트레드의 눈길에 도전적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슈엔은 찻잔을 내려놓고 바스락거리는 드레스자락 위로 손을 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곧 계승식이니까.”

“...”

“첫날밤, 보내요. 페로몬이 발전해야 계승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은발의 황자는 팔짱을 끼고 미동도 없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넌 내게 별로 매력이 없어.”

“항상 말하지만 노력하면 안될 게 없어요.”

대공녀는 머리카락을 넘겨 매끄러운 목덜미와 깊이 파인 가슴께를 드러냈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굽슬굽슬하게 등을 덮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사파이어보다 더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키가 크고 늘씬한 체형은 오히려 기사인 세리나 리엔보다도 당당했다. 슈엔은 물망초 색깔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에스트레드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남자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고양이처럼 여자가 그의 입술을 핥았지만 에스트레드는 미동이 없었다. 슈엔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이 복부까지 갔을 때, 에스트레드는 그 손을 잡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로마나의 일족은 참 부끄러움이 없지.”

황자는 나른하게 말했다. 슈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죠. 우리는 본능이 강한 동물처럼 태어났으니까. 강한 힘의 대가.”

“맞아, 본능에 따르지. 내 본능은 너한테 반응이 안되고 말이야.”

굴하지 않고 에스트레드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간 슈엔은 뭔가를 느끼고 움찔했다. 남자의 체향이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지, 이건?’

그 순간 에스트레드가 그녀를 밀어냈다. 뒤로 밀려난 슈엔은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고양이처럼 비벼봤자 소용 없어.”

“자꾸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현명하지 않아요.”

슈엔은 싸늘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실크 드레스가 바스락거렸다.

“어차피 당신은 나와 결혼하게 될 거에요. 나는 대공가의 유일한 상속녀니까.”

“글쎄.”

에스트레드는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난 검은머리가 별로 취향이 아니야.”

“정말 여자한테 무례한 남자에요. 알고 있죠?”

“내 여자가 아니라서 그래.”

그때 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리엔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세리나 리엔이 들어섰다. 여기사는 슈엔을 보고 허리와 무릎을 굽혔다.

“에스트레드 전하, 슈엔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대공녀는 답하지 않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슈엔은 저 여기사가 싫었다. 십여년을 줄기차게 싫어해 왔다. 하루종일 기사 수업에만 매달리는데도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과 같은 여인이라, 하필 그녀가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인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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