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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3화 (3/142)

<-- 제안-2 -->                “-네?”

세리나는 멍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이런 제안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로마나 황가의 일족은 같은 피를 지닌 자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법도였다. 생리적으로 로마나의 피가 가진 강한 기운을 받아낼만한 자들은 같은 로마나 밖에 없었기에 자연적으로 친족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이 어느새 굳어져 법도가 된 것이었다.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기울여 여기사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갔다. 귀족 여인들이 사용하는 강렬한 향수는 아니지만 갓 씻은 피부 특유의 체향이 은은히 퍼졌다.

“지난번의 사고는 미안했지만, 그로 인해 알게된 것이 있었다.”

그녀의 향기를 즐기면서 에스트레드는 낮게 말했다. 체향-아니, 이름 붙이자면 페로몬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테다. 세리나 리엔의 페로몬은 청량하면서 맑았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에스트레드 자신의 페로몬과 완벽한 상성이었다. 어쩌면, 세리나의 페로몬은 로마나 황가의 누구에게나 매력적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몸을 가까이 붙여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언제나 삼보 이상 황족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야 하는 호위기사인 세리나 리엔의 페로몬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페로몬이라는 것은 로마나 황족들처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능력을 지닌 자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특성이었으니까.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슈엔 대공녀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말 그대로다. 황자비 후보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법도를 개소리로 만드는 제안에 여기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단정한 눈썹이 서서히 모아지는 것을 보면서 황자는 피식 웃었다. 고지식한 기사가 황족이 가져야 할 진중한 자세에 대해 잔소리를 시작하려고 입을 열 때 에스트레드는 그 입술 위로 살짝 쪼는 듯한 버드키스를 내렸다.

“전하!”

세리나가 울컥 했다. 얼굴이 발그레 한 것이 귀엽다. 에스트레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자네를 아는데, 황자비가 되어달라는 말은 아니다. 경은 언제나 기사로써 완벽했지. 황제의 반려가 되어 자네가 쌓아온 업적을 덮으라는 것이 아니고, 그저 연기를 해달라는 뜻이다.”

“황위 서열 계승식입니다. 정순하게 진행되어야 할 계승식에 연기라니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에스트레드는 언제나 그랬다. 밖으로는 냉정하고 잔인했지만 안으로는 엉뚱하고 장난이 심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장난은 정말 사절하고 싶었다. 그와 사고처럼 관계를 가졌던 것도 스트레스인데, 황자비 후보로 연기를 해달라니.

“나는 슈엔 대공녀와 대공이 싫어. 그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

“하지만이 아냐. 내 사적인 감정 뿐 아니라, 후일 내가 이끌어갈 로마니엔 제국의 큰 그림에 있어서도 나는 큰 권력을 지닌 귀족을 배제할 것이다.”

“...”

“자네에겐 시간을 주겠다. 만약 거절한다면 나는 다른 후보를 찾아서 고민을 해봐야 하겠지. 계승식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에스트레드는 그제서야 세리나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말 끝에, 그녀의 입술 위로 다시 한번 가벼운 키스를 잊지 않고서.

“곧 호위대 사열이 있지? 먼저 가봐. 따라 갈 테니까.”

세리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맑았던 녹안이 탁한 색을 띄고 있었다. 에스트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감쌌다.

“시간은 사흘이다. 고민하고, 결정해라.”

*****

고민할 것도 없다.

세리나 리엔은 속으로 단언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위와 관련된 문제였다. 서열자들은 모두 강한 자를 반려로 맞이했다. 일신의 능력이 강하기도 했고 부와 권력이 강하기도 했다. 서열 자체는 본인의 능력으로 결정되더라도 결국 살아남는 것은 모두를 합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일개 기사인 그녀가 발을 들여놓는다고?  거기다, 진짜 황자비도 아닌 황자비 후보를 연기한다고? 말도 안되는 짓이다. 게다가 세리나 리엔은 둘도 없이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검술 연마와 기사 수업만 받은, 다른 곳에는 눈도 돌린 적 없는 기사였다.

그것도 오랜 기간 사랑해 온 상대의 곁에서 그의 반려를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위해 세발자국 뒤의 호위 기사로서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야 했다. 여기사는 호위대의 사열을 이끄는 중간중간, 가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신의 냉정한 주군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간혹 부관 하드레드가 의아한 얼굴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표정을 바로 했지만 생각은 여전히 황자를 향했다.

에스트레드 로마나는 냉정하고 잔인한 남자다. 비록 십여년을 한결 같이 보아온 세리나와 밀렌 바스트에게는 매우 친밀하고, 거의 친우와 같은 주군이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정말 세리나를 황자비 후보 역할로만 활용하고 내칠 수도 있는 남자였다. 적어도 세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시달리는데.’

휴가는 단 일주일 뿐이었다. 숲속에서의 사고-세리나는 의도적으로 성관계, 섹스, 잠자리, 하여간 성적인 단어는 전부 지워버렸다- 이후에, 여기사는 자신의 저택에서 시녀도 물린 채 한참을 앓았다. 스물 네해만에 처음으로 열렸던 몸은 파과의 통증에 시달렸다. 거대한 쾌락에 잠겨 있는지도 몰랐던 고통이 몸을 조여왔다.

‘글쎄, 몸만의 병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세리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기억도 안날 만큼 오랫동안 연모해왔던 남자. 하지만 연심을 충심으로 가려서 평온할 수 있었던 마음은, 사고를 위장한 관계 한번으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내 인생에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된다.’

계속해서 다짐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말 위에 앉아있어도 그 숲속의 어두운 공기와 에스트레드의 천일화 향이 떠오른다. 묵직하고 진한-달콤하면서 아플 정도로 콧속을 사로잡던 에스트레드의 체향.

에스트레드의 손은 크고, 길고, 강인하다. 세리나의 골반을 잡았던 자리에 멍이 들 정도였다. 그곳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여기사는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 보던 열기에 불타오르던 은청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새파란 불꽃 같았다. 하복부를 관통하던, 불덩이 같던 남성.

세리나는 멍해졌다. 앞에서는 기사의 리드에 따른 호위대의 사열로 절도 있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머리 속은 어느새 에스트레드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그는 세리나의 귓가를 애무했고, 목덜미에 키스를 뿌렸다. 뜨거운 입술의 점막이 그녀의 입술을 잡아 삼키고 혀를 뽑을 듯 빨아삼켰다.

“아…”

문득 떠오른 그 밤의 잔상에 세리나의 아랫배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말에 탄 채로 승마용 바지 속 갈라진 은밀한 곳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다소 당황했다.

“리엔 경, 더우신가요?”

부관인 하드레드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상관의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 꽤 붉었기 때문이었다. 세리나는 당황하다가 표정을 감추고 웃었다.

“아니, 괜찮...음.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군. 그래, 더워.”

하드레드는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이른 봄에 오전 시간이다. 호위대는 사열 중이지만 상위 직급인 세리나와 하드레드는 말 위에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 꽤 서늘한데...몸이 안좋으신 거 아닙니까?”

“음, 이런, 젠장.”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하드레드는 찔끔한 얼굴로 얼른 그녀를 외면했다. 세리나 리엔,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꽤 거친 부하 교육으로 유명했다. 겉보기야 구름 같은 금발에 녹안을 지닌 화려한 미녀지, 거기에 혹해서 덤볐던 혈기 넘치는 기사들이 하드레드 본인이 알기로만 열손가락이 모자랐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단호한 여기사는 목검이 아닌  철검(연습용. 다행히, 날은 세우지 않은!)을 들고 덤비는 기사들을 쥐어팼다. 일어나서 걸을 수 없을 때까지 팼다. 그야말로 개처럼.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죽는 게 나을 만큼 맞아가며 검술을 배웠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패는 것 정도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대범한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괘...괜찮으신 거지요?”

“물론이지.”

리엔 경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그녀는 절대 이런 적이 없었다. 세리나 리엔은 업무 중에 절대로 다른 짓을 하지 않는 고지식한 기사였다. 그러니까, 부관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물론 에스트레드와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몸은 괜찮아. 신경쓰지 말게.”

세리나는 방긋 웃었다. 사열하던 호위대의 몇몇이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 잠깐 주의가 흐트러졌다. 자연히 대열도 망가졌다. 곧 여기사가 호통을 쳤다.

“거기! 줄이 흐트러졌다! 황제폐하가 보셔도 이렇게 할 텐가!”

금방 달려가 직접 손을 봐줄 기세에 하드레드가 급히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맨손이라도 리엔 경은 무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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