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95)화 (95/95)

95화.

“비예단 님.”

작은 뒷모습을 조용히 따라가던 셰이단은 성의 입구에서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전해줄 것이 있었다.

“…네.”

허무하리만치 건조한 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셰이단은 메마른 그 소년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길 바라며 오래전, 루이스가 베르티아에서 가져온 작은 초상화를 건넸다. 갓난아기와 앳된 델단, 그들의 부모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낡은 그림이 비예단의 눈에 들어왔다.

고맙다거나 하는 인사말은 없었다. 이게 어째서 셰이단의 손에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그 그림을 건네받은 비예단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이라도 했는지 슬쩍 녹스가 있을 성을 한 번 바라보았다.

“순례를 떠날까 해요.”

비예단이 옅게 웃으며 목적지를 말했다. 셰이단도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 뒤, 멀리 앞서나가는 소년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비예단이 떠났습니다.”

셰이단이 성문까지 비예단을 배웅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언제나 빈자리가 어색했는데, 녹스가 돌아오니 모든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졌다.

“어딜 간다던가?”

녹스는 제인을 납치하고, 상황을 악화시킬 뻔했던 그가 떠났다는 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잘 떠났다고 후련해하지도, 죽여 버릴 걸, 하면서 후회하지도 않았다.

“글쎄요, 고향으로 돌아갈 거냐 물었더니, 순례를 떠날 거라고 하더군요.”

세상이 전쟁으로 어지러운 와중에 치유 능력이 있는 비예단의 순례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점에서 셰이단은 마음속으로나마 몸조심하길, 간곡히 빌었다.

“이걸 땅에 묻어 두라고 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대답이 없는 녹스에게 흰빛이 나는 구슬을 꺼내 보여 주었다. 고운 천에 감싸져 작은 상자에 들어있는 그 ‘염원’을, 녹스가 진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힘들어하진 않던가.”

오래 공들였던 녹지화가 해결됐다는 후련함보다 그녀가 더 걱정되었다. 녹스는 그 말을 뱉으면서, 제 마음의 크기를 깨달았다.

“네, 조금 울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슬퍼서 운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마음이 착잡해지는데, 지난날의 자신은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날아든 새가 도망갈까 무서워 새장에 가둬 버린 꼴이 우스웠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한들 돌이킬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 셰이단, 내가 없는 동안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 놨더군.”

녹스는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생각하며 집무실에 들어왔지만, 책상은 의외로 깔끔했다. 녹스의 결재가 필요한 건을 제외하곤 모두 셰이단이 처리해 둔 상태였다.

“어깨너머 배운 게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건….”

흩어져 있는 종이 중 한 장을 꺼내 든 녹스가 셰이단 앞에 팔랑거리게 흔들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안경을 추켜올리고 들여다 보았다. 엑젤리스를 다스리던 대장이 이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떠나 버린 사람들 대신 새로 이사 들어올 이주민 목록이었다.

“없던 걸로 하겠네.”

언젠가 제 주인이 깨어나면 편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공들여 정리해 둔 종이가 눈앞에서 반으로 찢어졌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해 주진 못할망정, 고생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주인 앞에 셰이단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종들을 이주시킬 거야. 노예 시장부터 들려야 할 것 같으니, 목록을 정리해 주게.”

비단 이 대륙뿐 아니라 그 어디에도 인간과 이종이 어울려 사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녹스는 꽤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고민하고 있었다. 셰이단은 그의 다소 충격적인 정책에 별다른 반기를 들지 않고, 오히려 조언을 해 주었다.

“노예들을 사들일 생각입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텐데요.”

“내가 아무리 젊고 돈이 많아도, 허투루 쓰진 않아.”

“아…. 그렇군요.”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강탈하던, 훔쳐 오던 할 계획인가 보구나. 그라면 왠지 그런 편이 더 잘 어울리리라 생각했다. 물론 절도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몇 번이고 건너 버린 상태였다. 녹스던, 엑젤리스던 더 안 좋아 질 이미지도 없었다.

“이종들이 기존 주민들과 마찰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 간의 조율은 해일러에게 모두 맡기지.”

“하지만 해일러 경은 추방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로 징계는 없으신 건가요?”

“곧 겨울이 올 텐데, 그 정도 따뜻한 마음씨가 아니고서야 눈을 녹일 수가 있겠나.”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셰이단은 그의 투정 같은 말에서 용서하겠다는 의미를 끄집어냈다. 녹스가 이제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그에게 나가 보라 손짓했다. 하지만 굼뜨게 문을 열던 셰이단이 다시금 몸을 돌려 어쩌면, 그가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전달했다.

“음…. 말씀드릴까 말까 했지만, 사실 주인님께서 누워 계실 때 가장 오래 곁을 지킨 게 제인입니다.”

“……뭐?”

순수하게 놀란 얼굴이 셰이단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건지, 더 듣고 싶으니 한 번 더 말해 달라는 건지 녹스가 다시 되물었지만, 이미 집무실의 문은 닫힌 뒤였다.

‘어서 일어나기나 하세요.’

꿈속에서, 제게 웃어 주던 그 얼굴이 눈알에 새겨진 것처럼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시 보고 싶어.

아직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제인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마음이 조급해져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눈에 담고 싶었다. 차가운 경멸이든, 뭐든 간에 지금의 녹스에겐 상관없었다.

원래 있었던 방으로 돌아가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원에 가도 없었고, 성 내 어디에도 그녀의 새카만 뒷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홀린 듯이 뛰어간 둘만의 기억이 꽤 쌓였던 절벽 위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서 있는 그녀를 찾았다.

“…제인.”

이름을 불렀어도 제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만히, 하늘과 땅이 만나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기꺼이.”

그녀의 곁에 다가선 녹스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오는 길에만 해도,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었는데, 막상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차마 염치없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여전히 제인은 대답이 없었다. 고향에 돌려보내 준다고 하면 눈물이라도 쏟으며 감격할 줄 알았던 건 아니지만, 반응 없는 모습에 녹스가 습관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전보단 생기 있어진 두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대와 비슷한 처지였던 노예들을 엑젤리스로 이주시킬 거야.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해.”

여태 했던 과오를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제인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말이었다. 자존심 따위 때문에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떠나기 전에 모래알갱이만큼의 믿음이라도 사고 싶었다.

“그대 또한…. 책임지고 고향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난 여전히 당신이 미워요.”

“…….”

“하지만…. 한 번만 더 믿어 볼까 해요.”

무거운 입술이 입을 열었다. 오늘도 대답을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녹스는 과분한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듯 아주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의 그늘 진 눈이 촉촉해졌다.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가녀린 모습에 제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날 구원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평생에 거쳐, 그대에게 진 빚을 갚겠어.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제인은 웃고 있는데, 녹스는 울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너무 고마워서. 겨우 참고 있던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앞으로 그녀가 죽으라면 죽고, 숨 쉬라면 숨 쉬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다. 제 심장과 피 한 방울까지 그녀에게 바치겠노라고.

녹스가 청혼하는 모양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빌 땐 양쪽 무릎을 다 꿇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음….”

온 마음을 다해 전한 말에 진심이 통했는지, 제인이 고민하는 얼굴로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믿겠다는 말을 물릴까 싶어 걱정하는 녹스의 머리 위에 제인이 손을 얹었다.

“그냥,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거든요. 알다시피, 우린 엉망이었으니까.”

그녀가 꿈처럼 웃어 주었다. 점점 어긋나는 관계에서, 평생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그 미소에 녹스는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여태 잃어오기만 했었던 삶이 이 한순간을 위해서였다고 여길 만큼. 그 정도로 그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진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그다지 다정한 사람도, 미친 사람도 아니던데.”

창백한 안색을 하고는 굳이 태연하게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떠나간 부하에게 깊이 명복을 빌어 준 것도,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소년에게 베풀어 준 자비도 모두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억지로 감정을 숨기고, 꾸며 내지 않은 그의 진짜 모습. 제인은 제 눈으로 보았던 것들을 믿어 보고 싶었다.

제인이 녹스의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앉았다. 얇은 손가락이 녹스의 눈물을 닦아 주자, 그마저도 너무 고마워서, 그의 평생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미친 사람이라…….”

녹스가 눈물이 묻어난 그녀의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정한 사람도, 미친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 괜히 웃겨서 울고 있는데도, 웃음이 났다.

“내가 좀 미친놈 같아 보이긴 해도, 그렇게 복잡한 사람은 아니야.”

그들은 여태 단단히 쌓아 올린 그 벽을 허물기보단, 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혼자라면 감히 넘볼 수 없었겠으나, 둘이기에 능히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모든 걸 그녀에게 주겠다 맹세한 녹스와 그의 모든 걸 믿어 보기로 한 제인은 같은 곳을 보며 나아갈 길에 찬란한 봄을 마주하길 바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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