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94)화 (94/95)

94화.

“비예단 님.”

감히 엑젤리스의 대장을 해하려 한 죄로 수감 된 비예단의 감옥은 가올테나 제인이 갇혀 있었던 공간보단 좀 더 쾌적한 곳이었다. 급조된 목조 침대에 팔을 올려놓고 기도하고 있던 그의 머리맡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

녹스가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느닷없이 졸도할까 걱정되었던 셰이단과 루이스는 해일러와 제인을 방에 남겨 놓고 감옥까지 따라나섰다. 어린 소년을 하나 보기 위해 장정들이 셋이나 따라온 꼴이 제법 우스웠는지, 비예단이 가냘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깨어나셨네요, 각하.”

태연한 척했어도, 녹스만큼 감쪽같이 속일 순 없었던 비예단의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다. 한걸음 다가와 차가운 철창을 쓸어 만진 소년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상한 최면에 빠지듯, 제인에게 홀렸었던 것 같다. 아니, 반드시 제인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테다. 평생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랑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비예단이 낮게 중얼거린 말들 중 변명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신을 믿는 자의 변명이라기엔 다소 빈약한 그 말들은 들을 가치조차 없었지만, 참회는 진실이었다. 조실부모도 모자라 유일한 형제까지 허무하게 떠나 보낸,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은 그저 가족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쯧.”

눈물로 죄를 뉘우치는 진부한 모습에 루이스는 혀를 차며 냉정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어리다 할지라도, 그른 것과 옳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나이었다. 심지어 제 복수를 대신 해 준 은인에게 원수로 그 값을 갚는다는 건, 온 신념이 충성을 따르는 그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의 치기는 잘 보았네.”

녹스가 옷가지를 들어 올려 탄탄히 자리 잡은 복근 옆, 이제 막 새살이 돋기 시작한 상처를 보여 주었다.

“…….”

“좀 더 깊게 찔렀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텐데.”

담담한 말들이 비예단에게 비수처럼 박혔다. 끈적하고 뜨거운 피가 손을 적시던 그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탓하러 온 것인지, 놀리러 온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초조했다.

“그대의 신이 내게 자비라도 베풀라 하던가?”

비꼬는 느낌이 다분했다. 신전에서 쫓겨났으니, 더는 사제라고 불릴 수도 없는 가난한 평민 따위, 당장 목을 베어도 녹스에겐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었다.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껴지자 상상해본 적 없었던 두려움이 느껴져,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렸다.

“드릴 말씀이 없습…….”

“난 그대에게 할 말이 많아.”

어떻게든 꾸역꾸역 목소리를 내어 사과하려는 비예단의 말을 끊고 녹스가 시린 눈으로,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 할 말은….”

놀리는 마냥 긴장하고 있는 비예단을 꼼꼼히 살펴본 녹스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아까보단 좀 더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풀어 주겠다는 말일세. 엑젤리스에 두 번 다시 발 들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벌을 기다리고 있던 죄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녹스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를 바라본 건 비예단뿐만이 아니었다. 셰이단도, 루이스도 모두가 놀란 눈을 떴다. 그를 먹여 주고, 입혀 준 건 단순히 비예단이 예뻐서가 아닌, 이 땅의 녹지화를 위해 준비된 도구이자,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이렇게 허무하게 풀어 준다니, 루이스가 어느 안전인지조차 잊고 언성을 높였다.

“대장님!”

“내가 그리 결정했어. 토 달지 말게.”

그의 뜻은 엑젤리스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간 있었던 모든 일과 고생들을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녹스는 창틀 사이에 얼굴을 박고 있는 비예단의 삐져 나온 벌꿀 색 머리털을 한 번 쓰다듬고, 느긋한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다시 제 방으로 돌아온 녹스는 방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여인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인과 해일러가 아직도 안 갔을 줄은 몰랐는데, 거기에 더해 율리나의 별장에서 데려왔던 멜로디까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제 방에 이토록 많은 인원이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정신이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들이닥친 손님들은 그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내내 항상 그 방에서 모여 있었던 터라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 녹스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 대장님. 답은 들으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해일러는 녹스가 들어오자마자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도로 품에 파고드는 멜로디를 토닥이며 물었다.

“대장님이 비예단을 풀어 주신대. 우린 이제 망했어.”

풍족한 식량과 푸르른 들판이 펼쳐진 엑젤리스를 꿈꿔 왔던 루이스가 과하게 좌절했다. 해일러도 그 말을 듣고 멈칫했지만, 이내 그의 뜻을 이해했다.

“그래도 여태 잘 해 왔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겁니다.”

늘 철저히 응징해 두 번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는 게 녹스의 방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유례없는 자비를 베푼 것이 맞았다. 갑자기 눈을 뜨자마자 개과천선하여 곧장 비예단을 풀어 주겠다고 마음먹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자신처럼 악독한 사람에게조차도 따뜻한 걱정의 눈빛을 담아 주는 제인의 마음이 꿈에서 느꼈던 따사로운 햇살 같아서. 그저 변덕이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해일러 님?”

멜로디는 못다 한 어리광을 잔뜩 부리며 해일러에게 치댔다.

“음, 그게…. 어느 사제님이 우리 땅을 풍족하게 해 주셔야 하거든. 근데 일이 잘 안 됐어.”

“부탁?”

작은 손을 꼼지락대며 자신의 품에 기대는 아이에게 차마 인신 공양이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해일러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율리나의 별장에서 며칠, 이곳에서 며칠을 지내 본 멜로디는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거, 천사님도 해줄 수 있잖아요!”

멜로디가 천진하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뻘쭘하게 서 있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많은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그, 그게…….”

“그 말이 사실입니까?”

“제인 님은 우리 계획도 모르지 않습니까?”

덥석 그 미끼를 물어 버린 해일러와 경계하는 루이스 사이에 커다란 손이 끼어들었다.

“뭐든, 억지로 할 필요 없어.”

이미 동화책을 읽었을 무렵부터 그녀의 능력을 대충이나마 짐작했던 녹스는 그들이 제인에게 부담을 줄까 걱정되어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

“어려운 건…. 아니에요.”

제인이 모두에게 속삭였다. 이 여자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동화책은 읽지 않았어도, 그녀의 종족을 샅샅이 조사했던 루이스는 여전히 불신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녹스도 희망을 걸지 않았다면 거짓이었겠지만, 그녀에게 해가 가는 것이라면 무조건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를….”

떠듬거리며 말하는 그 순간이 억겁처럼, 모두가 긴장하여 제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믿어야 해요.”

희미한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신도 믿는 마당에, 눈앞의 이종을 못 믿을 것도 없었다.

* * *

제인은 함께 의식을 치를 파트너로 비예단을 추천했다. 그의 거대한 신성력을 몸소 느껴 봤었기에 고른 선택이었다. 경비병들에게 인도되어 당장 짐을 챙기고 쫓겨나던 비예단은 제인의 요청으로 아주 잠깐, 엑젤리스에서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의식이길래 거대한 신성력이 필요하다는 건지 의아해했던 그는 의식을 치를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 그 의문이 더욱 커졌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그곳이 제인과 비예단이 ‘염원’을 만들어 낼 장소였다.

칼을 꽂은 범죄자와 가까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극구 만류에 따라 녹스를 제외하고 루이스와 해일러, 셰이단이 제인과 비예단의 의식에 참여했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이 순간만큼은 제인을 믿고, 단 한 가지의 뜻을 빌었다.

“부디 척박한 이 땅에 풍요를….”

간절히 빈다는 것이 뭔지 알지 잘 알지 못했던 루이스는 신에게 기도하듯 읊조렸고, 해일러와 셰이단은 경건히 눈을 감았다. 서로 맞댄 손에 제인의 손이 얹혀지자 불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딱딱하게 굳어 둥근 모습을 빚고, 비예단의 신성력이 보석을 단단하게, 더욱 단단하게 감쌌다.

“…끝났어요.”

“이게? 정말로요?”

다 됐다는 말에 고개를 든 루이스가 잠깐이나마 제인을 믿었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처럼 다시 질문을 퍼부었다. 그저 흰빛이 감돌고 있을 뿐인 이 작은 보석이 엑젤리스를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게 도저히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루이스가 아닌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미래가 창창한 사제를 어떻게든 구슬려 죽일 생각밖에 없었던 그들은 간단하게 해결된 이 문제에 대해 어안이 벙벙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비예단이 당장 떠날 기세로 짐을 챙겨 일어났다. 어디로 갈 건지 묻는 이는 없었지만, 셰이단만큼은 기어코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멀리 까진 못 나가더라도, 최소한 성문까진 배웅해 줄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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