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대가 없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겠지.”
제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던 손을 거둔 녹스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서서히 옆으로 다가왔다. 차가워진 그의 몸 곁으로 제인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염치없겠지만, 지금이라도 그대에게 행복한 세상을 선물하고 싶어.”
이루어지지 않는,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인 소망을 말하듯, 녹스의 눈은 환상을 좇고 있었다. 마치 다음 생엔 그러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당장 죽어 버릴 것처럼 가냘프게도 말했다.
“정말로 염치없지만, 부디 그대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해.”
여태의 과오를 본인조차도 깨닫고 있으면서, 그는 파렴치하게도 제인에게 무리한 부탁을 꺼냈다. 녹스는 결국, 제인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땅 밑으로 꺼져가는 저를 살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온 힘을 다해.
제인이 환하게 웃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태양보다도 더 밝게, 광활한 초원의 들판보다 더 아름답게 웃어 주었다. 그녀가 녹스의 옷가지를 흔들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기나 하세요.”
* * *
몸을 일으킨 녹스는 지난밤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몽롱한 기분을 깨어나게 해준 것은 다른 게 아닌, 옆구리에서 알싸하게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상처 부위를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먹먹했던 귀를 뚫고 소란스러운 음성들이 들려왔다.
“주인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대장님! 괜찮으신 거예요?”
“제가 돌아가신 줄 알고 얼마나…!”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셰이단과 해일러, 루이스가 차례로 그에게 다가가 몸을 살폈다. 호들갑은. 녹스는 그들에게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따끔거리는 목이 한 마디도 새어 나가게 두지 않았다.
“먼저 물부터 드세요.”
그의 상태를 짐작한 셰이단이 바로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메마른 목이 적셔지자 드디어 헛기침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녹스가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인은?”
그가 겨우 목을 가다듬고 꺼낸 첫마디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엑젤리스의 존폐나 기사들의 목숨보다도 더 궁금했던 건,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제인이 웃고 있는지였다.
“섭섭하게 눈 뜨자마자 저희는 안 찾으시고.”
루이스가 정말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그의 등을 방패처럼 잡고 제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역시 꿈이었구나.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일러가 고개를 내민 제인의 어깨에 살짝 팔을 얹었다. 보호해 주려는 느낌이 다분했다. 다소 친밀해 보이는 행동들에 녹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오늘로 딱 3주째 됐네요. 영영 안 일어나시는 줄 알고……!”
“재수 없는 소리 좀!”
해일러가 북받치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자 루이스가 핀잔을 주었다. 여전한 그들을 보면서, 엑젤리스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떻게…. 된 건가? 그날 일은.”
녹스는 3주 전, 정신을 잃었던 그 날에 대해 물으면서도 몽롱한 보라색 눈이 제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꿈속의 그녀와 눈앞의 그녀를 가까스로 분리해 내고 있을 무렵, 불현듯 느껴진 정적에 녹스가 침대에 기대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삭막한 침묵 속에 잠겨,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셰이단이 입을 떼려다 말고, 여태 루이스의 등 뒤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제인에게 손짓했다.
“제인 님.”
그새 호칭도 바뀌었나.
녹스가 은근히 소외된 기분에 인상을 찡그리자, 루이스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당장 의사를…!”
“됐어, 곧 죽을 것처럼 굴지 마. 그대 목청 때문에 멀쩡했던 머리도 울려.”
제 팔을 붙들은 루이스의 손을 쳐내고, 다시 제인을 바라보았다.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전과는 다르게, 훨씬 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예단이…, 찌른 거예요. 치유해 주겠다고 달려와 놓고는….”
그 정도야 당연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었지만, 녹스는 그녀의 띄엄띄엄 떨어지는 말들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감미롭다는 듯 감상을 끝낸 그는 그녀의 목소리 덕에 계속 남아 있었던 한줄기 불안함조차 모두 흩어진 기분이 들었다.
“사용한 무기는 예전, 주인님께서 헤티아 경에게 주었던 짧은 단검입니다. 성 내에 떨어져 있는 걸 주운 모양이더군요.”
셰이단이 제인에게 잘했다는 눈짓을 보냈고, 해일러도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사랑받는 막냇동생처럼, 제인이 수줍게 웃었다.
“기껏 하사해 주었더니, 영광인 줄도 모르고 잃어버렸군. 헤티아는 어디 있지?”
녹스는 제인의 천진하고 화사한 웃음에 동화될 수 없었다. 의식이 없던 지난날 동안 못 챙겼던 사람들과 일거리들이 잔뜩 밀려 있을 터였다.
“…헤티아는 사망했습니다. 성 내에 남아 있는 인원을 보호하던 중, 화재 발생 당시 날아온 기름병에 직격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비예단이 그 단검을….
셰이단이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음에도, 녹스는 눈을 감는 것마저도 잊어 버린 채 충격에 휩싸였다. 가까이 두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아무리 차갑게 얼려 두었던 심장일지라도 철렁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그녀를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죄책감에 머리가, 마음이 어지러웠다.
“대장님….”
후회가 담긴 묵념에 해일러가 나지막이 그를 불러 위로했다.
“장례는……. 잘 치러 주었나?”
“예. 마지막 가는 길은 모두가 배웅해 주었습니다.”
잘됐군…. 녹스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고, 계속해서 그를 관찰하던 제인만 겨우 들었다.
슬퍼할 줄도 아는구나.
그간 자신에게 가혹히 굴었던 모습들이 지금의 그와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거짓으로 꾸며낸 마네와 폭군처럼 굴었던 검은 늑대는 모두 그의 진실한 내면이 아니었다.
“떠나는 길에…. 얼굴도 못 비쳐서 참……. 면목이 없군.”
지금, 눈앞의 모습이 진짜 이 사람이구나. 제인이 루이스의 등 뒤에서 흘깃거리며, 어떤 가면도 쓰지 않은 그를 읽어 내고 있었다.
“비예단은 어떻게 됐나.”
“감옥에 수감해 두었습니다. 죽어도 입을 안 열겠다 버텨서 아직 경위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예단의 처사에 제법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손 하나 까딱하면 상처를 돌이킬 수 있고, 파괴된 엑젤리스를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은 녹스가 쓰러진 이후엔 더더욱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피해자를 치료하라는 말만큼 어불성설이 없었다. 결국, 그의 치료는 엑젤리스 성의 의사에게 맡겨져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경위랄 것도 없지 않나요? 형이 여기서 죽었는데,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해일러가 비예단을 대변하고 나섰다. 죄가 없다고 두둔하는 게 아닌, 그저 고아가 되고 만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준 동정이었다.
“델단….”
비예단이 갑자기 비뚤어진 원인을 오로지 형의 죽음에서만 찾고 있던 그들 사이에서, 진짜 원인이었던 제인이 델단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움, 아쉬움 같은 미련은 느껴지지 않았다.
“만나러 가 봐야겠어.”
녹스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안됩니다, 아직 더 누워 계셔야 해요!”
“대장님, 일단 의사라도 먼저…!”
만류에도 불구하고 녹스는 침대 아래 가지런히 정돈된 실내화에 발을 끼워 넣었다.
“…주인님. 방을 나가시기 전에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셰이단은 무작정 일어난 녹스를 저지하지 않았다. 눈 뜨자마자 일어날 게 뻔해 미리 실내화를 준비해 둔 것도 그였다.
“주인님께서 이종이라는 게 들통나지 않았습니까.”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하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녹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선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용인들도 몇몇 일을 그만두었고요.”
“하지만! 대장님이 인간이든 아니든, 대장님을 따르겠다고 남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이럴 줄은 이미 진작 예상한 일이었다. 새삼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녹스는 자신을 격려해 주는 루이스의 머리를 밀어 멀찍이 떨어트렸다.
“주민들도 꽤 떠났겠군.”
태연한 말투에도 모두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녹스가 거북함을 느꼈다.
그가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구석에 움직임 없이 서 있던 제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걱정에 잠겨 있었다. 녹스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대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
“아…….”
“그대는 평생을 받아 온 시선일 텐데.”
부드럽게 뺨을 쓸어 주려던 손길이 허공에 머뭇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채 내려왔다. 녹스는 더 이상 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억지로 힘을 주었다.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몸뚱이가 견디지 못하고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대장님!”
“소란 떨기는.”
다시금 돌아오는 걱정에 녹스는 또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의 지난 세월에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본 기억 따윈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유난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