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92)화 (92/95)

92화.

“비…예단…….”

옆구리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간 쌓은 상처가 터졌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옆구리에 정확히 꽂힌 그 단검은, 헤티아에게 주었던 그 단검이었다.

“안돼…. 녹스!”

볼품없이 쓰러진 녹스의 곁에 제인이 따라왔다. 그가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은 무수히 많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의 숨이 희미해질 때마다 제인이 점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손을 떨었다.

“대장님!”

그에게 다가오기를 머뭇거리던 루이스와 해일러, 그 외의 병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당장 이 사제를 포박하세요! 대장님을 성으로 옮겨야 합니다!”

찔러 넣은 단검을 채 뽑지도 못한 비예단이 덜덜 떠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예단의 녹안에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는 녹스가 그대로 비쳤다. 이대로라면 결국, 제인을 빼앗기고 말 거라는 질투심이 결국 손에 피를 묻히게 했다.

* * *

정신을 잃었던 녹스는 푸른 들판 위에서 깨어났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손등으로 눈을 가린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제인.”

그의 옆엔 언제부턴가 제인이 앉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감각한 얼굴로. 그렇게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그대가…. 죽지 않아 다행이야.”

녹스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말을 타고 오면서 내내,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신에게 빌었던 기도가 통했구나. 무사히 살아 있는 그녀를 보고 안도했다.

“……사실, 사과를 하고 싶었어.”

제인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묵묵부답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독백의 시간은 예전처럼 괴롭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허전했던 마음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항상 하셨던 말이 있어. ‘절대 네 정체를 들키지 말아라.’. 그대도 봤겠지만, 난 덩치가 제법 커져서 말이야.”

무겁게 담아 두었던 말들이 이상하게 웃음과 같이 새어 나왔다. 제인의 앞에선 그간의 숱한 고민이 전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유언조차 똑같았지, 내게 형처럼 살라고 했던가. 어머니가 인간이셔서, 형은 나와 다르게 인간이었으니까.”

형, 마네의 이야기에 제인이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냉소적인 얼굴이었다.

“형처럼 살아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어. 인간들 틈에 섞여 살라는 건지, 형처럼 굴라는 건지.”

점점 더 일그러져가는 녹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에게, 그날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괴로운 악몽이었다.

“어쩌면 형처럼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난 정체를 들킬까 봐 늘 사람들을 멀리했고, 스스로 고립되어 갔으니까. 하지만 그대에게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어. 외로웠거든.”

고작 그런 이유가 제인에게 준 상처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회고록처럼 읊어내는 이 모든 말조차 제인을 괴롭히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대도 들었겠지. 혈육의 피를 손에 묻혔다고…. 율리나가 지껄이지 않았었나.”

그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치부를 들켰던 날.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얼마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는지. 지금 떠올려도 마음이 저렸다.

“그 일에 대해 변명하진 않아. 형이 쏜 화살은 아버지를 죽였고, 난 형이 죄책감이 파묻혀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어.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 숨은 내 손으로 끊었지.”

녹스가 오른손을 들어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그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끔찍했던 기억을 그대로 마주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형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냐. 그저, 그런 형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어, 내가.”

마주 본 기억은 평생을 숨어 왔던 변명 뒤의 진실을 보여 주었다. 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이기를 위해서, 앞으로 살아갈 자신을 위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마네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겠지, 그대는.”

또 구미가 당기는 이름에 제인이 눈을 끔뻑였다. 어서 알려 달라고 독촉하는 얼굴에 녹스가 너털 웃음을 짓다가도, 금세 얼굴을 굳혔다.

“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형은…. 다 알고 있었겠지, 내가 왜 그랬는지….”

괴로운 숨결이 토해내듯 문장을 뱉어 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죽어 버린 형이, 그의 목을 옭아맨 밧줄이 마치 제 손이었던 것처럼 괴롭게만 느껴져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연을 끊기 위해 날 사생아라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세상에 혼자 남았어. 그대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고립되었던 그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녹스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연민과 증오가 섞인 검은 눈동자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인의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그 심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시선을 회피했다. 죄를 지어서 그런가, 중얼거렸다.

“…난, 그 뒤로 나와 같은 존재를 찾기 위해 노예 시장을 갔었지, 온갖 진귀한 이종들을 판다는.”

이전처럼, 숨 막히는 침묵이 아닌 편안한 느낌에 자연스레 온갖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는 녹스는 혹시 제인이 불쾌하진 않은지 눈치를 살폈다. 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듣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어. 그들은……. 지옥문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 같았거든. 어눌한 말투로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는 게, 듣기 괴로울 정도였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더라고.”

노예 시장의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지만, 제인이 꺼림칙해 할까 걱정되어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도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대가 그런 삶을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쓰라려…….”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강압적으로 구는 게 아니라, 친절하고 다정하게 그녀가 겪었을 그간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녹스는 그러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고생했다고, 괜찮았냐고 묻지 않았다.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어. 잃어버린 소속은 엄청난 상실을 가져다 주더군.”

제인의 고통스러운 삶에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도 안되었겠지만, 그녀의 지난 과거를 공감하면 제 마음이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비겁한 이유로, 다 낫지도 않은 제인의 마음에 더 큰 난도질을 했었다. 후회했다. 뼈저리게 후회하고, 사무쳐 낯짝을 들기 부끄러웠다.

“인간과 이종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내가, 어느 날 그대를 만났지.”

그간 어렴풋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일상이 제인을 만나며 모조리 부서졌다. 애써 인간들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갑작스레 등장한 그녀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게 맞을 거야. 반갑기도 하다가, 그대가 나에 대해 알아채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었거든. 우습게도 난, 인간들 틈바구니에 껴서 살아가길 조금은 원했던 것 같아.”

그간의 심정을 토로하는 녹스는 어느 때보다 괴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자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짐승으로 살 바에야, 인간인 척을 하고 사는 게 나쁘지 않다고 여겼어. 어린 시절부터 그들과 살았으니, 내겐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거든.”

자신도 제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소속감 등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혼란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그들과 자신의 삶이 이질적이었다. 그 때문에 멀리할수록 고립된 외로움은 심해져 도통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난 항상 확신에 차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고집이었던 그 한심한 생각은 절대 바뀐 적이 없었지.”

내리쬐는 태양 볕에 결국 눈을 감아 버린 녹스를 제인이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난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았어.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내 정체를 알리지 못했지.”

푸른 풀밭에 놓여 있는 제인의 손에 녹스의 손이 다가갔다. 차마 잡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 손 또한 외로워 보였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그대가 원한다면 날 죽여도 좋아.”

그녀는 애처로운 녹스의 손을 보면서도, 선뜻 잡아 주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 주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용서를 받고자 꺼낸 사과는 아니었다. 녹스는 제인에게 빌 수 있다면 빌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저…. 그대와 내가, 오로지 같은 세상에 살아간다는 이유로…. 난 그동안 충분히, 좋았으니까.”

무거워진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검은 어둠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점점 추워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그대에게, 나 또한 악몽이 되어 버려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이토록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아는데도, 녹스는 어쩔 도리를 찾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에 애써 눌러 두었던 한탄이 구역질처럼 쏟아져 나와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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