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늑대가 턱에 힘을 주자 물려 있던 탈영병은 잘 익은 과일처럼 터지면서 사방에 피를 뿌렸다. 늑대의 하얀 털에도 붉은 피가 튀겼다. 이젠 고깃덩이가 된 몸뚱이를 멀리 던져버린 그 늑대는 거대한 발을 한걸음씩 옮겼다. 우아한 걸음마다 발밑의 낙엽과 촉촉해진 땅에 짐승의 발자국이 남겨졌다.
“이게 웬…늑대가…?”
숲이라고는 해도 뜨문뜨문 자라있는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이곳에, 이만한 크기의 짐승이 어떻게 여태껏 눈에 띄지 않았는지 의문인 얼굴을 한 그들은 짐승이 내는 그르릉 소리를 듣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아니, 갑자기 이런 게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나도 모르지! 파수대가 키우던 놈인가? 셰이단 님, 아시는 거 있어요?”
쳐들어온 적들을 몰아내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정체 모를 늑대까지 맞이한 루이스와 해일러가 상황을 믿지 못하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셰이단은 침착하게 그들의 부산스러운 질문에 답변했다. 이상하리만치 태연해 보였다.
“…아뇨, 저도 처음 봅니다.”
늑대는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서서히 다가갔다. 집채만 한 덩치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해일러, 그동안 너무 뭐라 해서 미안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왠지 여기가 내 마지막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평소 같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히 여태의 구박을 사과한 루이스는 모두의 앞을 막아섰다. 해일러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려던 그때,
“거기로 가면 안 돼!”
갑자기 달려나가기 시작한 늑대는 일행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쯤 이미 속도가 붙어 있었다. 그들을 가볍게 지나친 늑대가 마을 광장 방향으로 사라졌다.
“대피소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셰이단 님, 제인과 함께 계세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거대한 몸집으로 사람 몇 명쯤은 쉽게 짓이길 것 같은 늑대가 마을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루이스는 조금 전 낯간지러운 작별 인사를 한 부끄러움도 잊은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해일러 또한 단장의 명령을 기다릴 새 없이 곧장 늑대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저기요…!”
루이스도 셰이단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뒤 따라잡으려 했지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이 제인에게 붙잡혔다.
“무슨, 왜 그러시죠?”
제인이 먼저 말을 건 것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한 루이스가 검집을 잡은 그녀의 손을 털어내며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함부로 만져서 죄송해요, 그냥…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서, 죄송해요.”
지나치게 저자세인 모습에 오히려 더 미안해진 루이스가 검을 도로 집어넣고 머쓱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가 너무 예민했습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은 제인은 퀭한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그래도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저 늑대는….”
“저 늑대가 괜찮을 덩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 늑대는 영물이에요, 나쁜 애는 아니던걸요.”
“영물이라고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 선정에 인상을 찡그린 루이스가 셰이단에게 답을 구하듯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에 했다. 이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느낀 제인이 말을 고르다가 좀 더 쉬운 설명을 찾아냈다.
“제 먼 조상도 영물이셨어요.”
“그럼 당신과 저게…같은…?”
“이성과 지성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에요. 제게도, 영물에게도 있어요.”
루이스의 얼빠진 말을 알아들은 제인은,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인간들을 상대로 저 늑대를 해치지 말라고 변호하고 나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 봐야 합니다. 저렇게 큰…이종이 여태 이곳에 숨어있었던 거라면,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보긴 힘드니까요.”
길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그래도 아까보단 편안한 마음으로 해일러를 따라 광장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달려가는 와중에 들리는 늑대의 포효와 비명은 어쩌면 좀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들게 했다.
“단장님.”
그녀의 붉은 머리가 푸른 나무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해일러는 광장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에 서서 혼란스러운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저 늑대가 우릴 도와주고 있어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중얼대는 해일러는 광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늑대를 따라 시선을 옮겨갔다. 탈영병들은 영물이라 불린 짐승을 향해 화살을 쏟아부었지만, 너울거리는 은빛 털은 강철이라도 되는 양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대피소는 멀쩡한 거야?”
“네, 엑젤리스 사람들은 하나도 헤치지 않고 있어요.”
이성과 지성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 했던 제인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늑대는 탈영병들을 모조리 짓뭉개고, 씹어 던지면서 전세의 우위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하던 탈영병 무리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도주하려 했으나 유일한 출구, 바람협곡으로의 길은 아까 전, 마법사들에 의해 봉쇄되었다.
“안, 안돼! 목숨만, 제발 살려 줘!”
명예 따위는 길바닥에 내다 버린 듯한 탈영병은 눈앞의 짐승이 두려워 적이었던 엑젤리스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늑대는 그런 애원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물어 죽이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어갔다.
아름다운 은빛 털이 모두 피로 뒤덮일 때쯤 남아 있는 탈영병 무리가 바람협곡의 앞으로 모두 모였다. 출구를 막고 있는 투명한 벽은 두드릴 때마다 우웅, 하고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자신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엑젤리스의 기사들이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잔존한 탈영병 세력을 에워쌌다. 그 앞엔 언덕에서 내려온 루이스와 해일러가 있었다.
“다 죽여 버릴까요?”
생명을 경시 여기는 걸 싫어하는 해일러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우선 가둬 두었다가 대장님의 처분을 기다려야지.”
“대장님은….”
침울하게 중얼대는 그녀의 입을 막은 루이스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오는 길에 봤는데 은발의 시체는 한 구도 없었어. 걱정하지마.”
“이놈들 정리하고 제가 샅샅이 찾아보겠습니다. 부상 당하신 걸 수도 있으니.”
그나마 기운을 얻은 해일러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탈영병들을 모두 포박했고, 순순히 지하 감옥에 수용되길 선택한 그들을 줄지어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피소에 있던 주민들도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바깥으로 나와 다행이라며 울부짖거나, 늑대의 주변에서 신기한 구경을 한다는 듯 얼쩡거렸다.
“저 늑대와 대화가 가능하신 건가요?”
“네? 설마요.”
셰이단과 제인도 파수꾼의 숲을 내려왔다. 둘은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받을 만큼 편해 보였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듯 사람들이 각자의 할 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도망쳐!”
“노스어다, 노스어의 저주다!”
넓은 광장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던 늑대의 은빛 털이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너울거리다 제각각 거대한 빛줄기를 뿜어냈다. 어둠보다 더 지독한 섬광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했고, 민간인들은 기사들의 제지에도 제멋대로 도망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제인은 갑작스러운 빛무리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흔들리는 시야와 귀에서 들리는 이명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러다 점점 뿌옇게나마 돌아오는 시야에서, 많이 봤던 그 은발을, 상처투성이의 녹스를 발견했다.
“녹스…!”
그녀는 균형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다리를 기어코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왜였을까, 그가 구해준 게 고마워서이거나, 다친 사람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위선일 수도 있었다.
그를 미워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지만, 제인은 결국 피어나는 불신의 마음을 한사코 못 본 척하고 녹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당신….”
제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울먹이며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수히 많았다.
당신도 이종이었나요?
가장 묻고 싶은 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나 핏기 가신 그의 얼굴에 대고 차마 물을 수 없었던 제인은, 녹스의 차가운 온도를 느끼며, 왜 그간 알아채지 못했는지 자신을 자책했다.
“대…장님?”
다른 이들도 녹스를 알아보았지만,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녹스의 은발을 보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느닷없이 등장한 거대한 몸집의 늑대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한 사람.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
약해 빠진 몸으로 저를 일으키려는 제인을 밀어내고, 아픔의 기색도 없이 몸을 일으켜 주변의 차가운 눈총을 둘러본 녹스는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심드렁하게 굴었다.
그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성으로 돌아가고자 지친 걸음을 내딛자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협동이 아주 잘 되는군.”
실없게 웃는 녹스에게 셰이단이 제 재킷을 벗어 그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각하, 치료 받으셔야 합니다!”
제인과 셰이단을 제외하고도 인파를 뚫고 녹스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비예단이었다.
비예단은 당장 쓰러질 듯 파리한 안색으로 달려 나와 녹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멀쩡히 두 발로 서있는 녹스가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인 양, 다급히 도착한 그는 헐떡이는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침을 쏟아냈다.
“치료는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더 필요해 보여.”
녹스는 비예단의 손길을 거부했지만, 그 의지는 말 한마디에 저지당할 것이 아니었다. 그가 손에서 따뜻한 빛을 뿜어내며 치유를 받으라고 팔을 뻗는 순간, 녹스는 비예단의 눈이 두 번 깜빡이는 걸 보았다. 하지만 알아차린 후엔 이미 늦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