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로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 땅에 강림해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죄없이 죽어간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소서. 로테의 축복이 깃들도록, 당신의 힘을 허락하소서…….”
비예단은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땅을 타고 성스러운 빛무리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그 빛무리는 비예단의 몸에 흡수되어 구멍 뚫린 몸을 메꾸었고, 방금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를 포함하여 팔이 잘려나간 사람, 방금 막 숨이 끊어진 사람, 상처를 붙잡고도 검을 휘두르는 사람……. 주변의 모든 병사에게 스며들었다.
“지금! 빨리! 해일러, 애 챙겨서 뛰어!”
루이스가 비예단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대피소를 향해 달렸다. 방금 전, 비예단의 능력으로 몸을 완전히 회복한 제인이 셰이단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고, 해일러 또한 울먹이는 멜로디를 업은 채 여태 달려본 가장 빠른 속도로 대피소로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시도해본 건 처음이었던 비예단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쓰러져있던 엑젤리스의 병사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뭐,뭐야…! 저주다, 저주야!”
“다시 죽여! 일어난 놈들은 다시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비예단의 능력은 대상을 선택할 수 없었다. 일어난 사람들은 엑젤리스의 기사 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생기를 찾고, 검을 쥔 사람들엔 노스어 인도 포함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불리한 전세를 비예단의 능력 하나로 뒤집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시 한번 치열한 접전에 불이 붙었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안락한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행해지는 살인에는 양측 다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루이스와 일행을 위협하던 적들이 되살아난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붓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그들은 대피소의 처마 밑으로 달렸다. 그러나 안쪽에서 단단히 봉쇄한 문은 아무리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가요!”
제인이 인간에게 갖는 적대심도 잊은 채 소리쳤다.
겨우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창문, 작고 왜소한 체격의 비예단이나 멜로디는 무리 없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지만, 키가 큰 제인이나 갑옷을 입고 있는 루이스, 해일러에겐 무리였다.
“비예단 님, 제인은 저희가 책임지고 지킬테니 먼저 회복하고 계세요.”
“안, 안돼요! 전 제인 옆에 있어야 해요!”
지쳐 있는 비예단의 무력은 루이스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짐짝처럼 그를 욱여넣은 루이스가 해일러에게 손짓했다.
“안돼요! 천사님, 천사님도 같이 가요!”
이어 멜로디를 창문으로 집어넣자, 발버둥을 치며 창틀을 붙잡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지금 떼쓸 상황이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해야 저희가 조금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
해일러를 대신해 계속해서 아이를 돌봤던 셰이단이 조금은 강압적으로 멜로디의 작은 손을 떼어 대피소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천사님은 곧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사제님이랑 여기서 기다려요.”
천사가 제인을 의미한다는 걸 진작 눈치챈 셰이단이 창문 너머로 멜로디의 머리를 쓰다듬고 도로 문을 닫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지만, 이곳에 있다간 자신들을 포함해 대피소 안 인원들도 위험해질 것이다. 적어도 제인만은 최대한 안전하게 지켜줘야 했다. 루이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를 숨길만 한 민가를 찾아보고 있었다.
“루이스 경!”
잔뜩 인상을 찡그린 루이스가 소리 난 곳으로 달렸다. 헐떡이는 숨이 껴있는,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빅토르 님?”
무너진 잔해의 모서리 사이에 작은 방어막을 펼쳐 놓고, 뒤의 사람들을 지키는 빅토르는 척 보기에도 힘에 부쳐 보였다. 뒤의 사람들은 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이해할 수 없는 주문들을 외우고 있었다.
“저주…저주예요….”
여태 걷고, 뛰는 것만 집중하던 제인이 루이스의 뒤에 숨으며 말했다. 바닥에 그려진 동그란 그림과 여러 명이 외고 있는 불쾌한 주문을 오래전 본 적이 있었다. 처음 잡혀가 봉인의 저주에 걸릴 때, 그 주술사들도 이런 짓을 하고 있던 게 기억났다.
“그래, 불법이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 도덕을 따지는 건 사치야.”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이 놈팡이 마법사 놈들, 운동이라곤 영 안 해서 기력이 부족하긴 했는데, 아까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빛무리 덕에 괜찮아졌네.”
“비예단 덕분입니다. 저주라면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까?”
“괜찮아, 그리 거창한 건 아니고 협곡의 입구만 막는 거니.”
빅토르가 턱짓으로 협곡 입구를 가리켰다. 고갯짓하는 것만으로도 힘든지 숨이 턱까지 찬 그는 곧 쓰러질 것 같은 파리한 안색이었다.
“예? 그럼 만일의 사태에 우린 어디로 도망갑니까?”
“대장께서 명령하셨다. 엑젤리스가 함락되어도 주변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봉쇄하길 원하셨어.”
병사들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언제 또 그런 걸 전하신 건지, 대체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인건지….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루이스는 결국 모든 고민을 털어내고, 대장을 찾기로 했다.
“혹시 대장님 보셨습니까?”
“한참 전에 보고 통 못 봤네, 잘못되신 건 아닐 테지만…아이고, 상황이 안좋다 보니 걱정만 늘어.”
“…그분은 녹스 엑젤리스에요, 절대 저희를 두고 쉽게 가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 내가 주책을 부렸어. 우린 다 준비가 되어가니 어서 가서 저 망할 놈들 한 놈이라도 더 죽여!”
빅토르가 우쭐거리며 웃더니, 목소리만큼은 패기 있게 외쳤다. 이마에 맺힌 흥건한 땀이 몇 방울 떨어졌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루이스가 짧게 목례를 전하고 다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해일러.”
“예, 단장.”
같은 노스어 인을 베는 게 꺼림칙하진 않은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진중한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녀의 고향은 더 이상 노스어가 아니었다.
“…아니다. 힘들면 이야기해.”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인이 한계인 것 같아요.”
셰이단에게 부축받으면서 힘겹게 뛰어오고 있는 제인은 이미 숨이 턱까지 차 과호흡 증세를 보였다. 좁은 공간에 움직임 없이 갇혀 지내던 그녀가 이런 무리한 행군에 쓰러지지 않고 버틴다는 것 자체가 용했다.
“우선 대장을 찾자.”
“네, 어디 계시는지 통 안 보이네요.”
“…그럴 리 없겠지만.”
“불길한 소리 마십시오. 대장님이 아시면 화내십니다.”
루이스도, 해일러도 모두 녹스가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종일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건 모두 매한가지였어도, 근래 들어 그가 보인 불안정한 행동들 때문에 선뜻 그의 생존을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내를 터놓을 수가 없었다.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신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고 있었다.
“저기, 잠시 제인을 부축해 주겠습니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광장에서 벗어나 파수대의 거처에 있는 숲길로 들어오자, 아까까지의 소란스러움이 다 거짓인 것처럼 고요해졌다. 셰이단의 요청에 해일러가 나서서 그녀를 건네받았다.
당연히 힘들어서 교대를 요청하는 건 줄 알았던 해일러는 셰이단이 숲의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를 말리고 나섰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됩니다!”
“셰이단 님!”
나무에 기대 쉬려던 루이스가 도로 검을 들고 셰이단을 따랐다.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적들 때문에라도 숲 안에는 무방비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인데, 대장과 오랜 시간 함께했던 셰이단이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점점 호흡이 진정되고 있는 제인과 그녀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몸을 낮춰준 해일러, 사방을 주시하며 경계하던 루이스가 셰이단이 가는 방향을 의식했다.
그가 버려져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에 손잡이에 말라붙은 피가 엉겼다. 손잡이의 끝에는 조각된 늑대의 얼굴, 녹스가 쓰고 있던 가면과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그 검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녹스의 검이었다. 검의 전신에 칠해진 붉은 자국, 낙엽 사이로 보이는 무수한 발자국들. 불길한 상상을 하기엔 아주 알맞았지만 모두 애써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그렇죠? 대장님이, 그, 시체도…없잖아요….”
결국, 해일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쳤고, 루이스 또한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나무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들은 엑젤리스의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녹스가 죽었다고, 믿고 따르던 주군이 떠나버렸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기….”
제인은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근육통이 찾아왔지만, 굳이 몸을 일으켰다. 목에서 짭짜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늑대.”
짧은 말과 함께 팔을 뻗어 가리킨 곳에는 성인의 신장을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늑대가 탐스러운 은빛 털이 너울거리며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한 곡선이 잘 뻗어 있는 늑대는 탄탄한 근육이 잡힌 앞발 아래에 탈영병의 시체를 쌓아 놓고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주둥이에 시체 한 구를 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