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그들의 검술은 형편없었으며, 지친 팔은 검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키겠다는 다짐만큼은 진심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출발해 어느새 선두에 선 녹스는 과거 전쟁귀로 불렸던 악명을 다시금 재현하고 있었다.
쇠가 부딪히는 힘겨루기에서 밀려난 적이 검을 떨어트리고 뒤로 나자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녹스는 그 틈에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전방에서 괴기한 함성을 내지른 적을 가볍게 피한 그가 등에 칼을 꽂아 넣어 반 바퀴를 돌리자 역겨운 살점이 튀었다. 꽂힌 칼을 빼내려 세게 잡아당겼지만, 갈비뼈에 걸린 날이 쉽사리 빼내 지지 않았다.
“녹스 로드게릭스.”
자신의 옛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광명을 담은 화살촉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급한 대로 옆에서 달려드는 적의 어깨를 끌어당겨 내세웠다. 덕분에 가까스로 화살을 피한 그가, 울컥대며 피를 토하는 몸뚱이에 꽂힌 화살을 도로 수거했다.
원망 어린 눈이 녹스를 바라보며 털썩 쓰러졌다. 화살을 챙긴 녹스는 그대로 손에 쥐고 활시위를 다시 잡아당기는 적에게 달렸다. 마치 고양이처럼 커진 동공에 화살이 박혔다.
“아버지의 원수를…!”
마지막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그를 뒤로한 채 녹스가 시체를 발로 밟아 박혀 있는 검을 뽑아냈다. 손잡이를 감싸는 손바닥이 간질거리면서 아까 느껴졌던 기묘한 전율이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원수….”
그 기묘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복수의 감정.
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노스어 인을 썰고 베는 게 못내 짜릿해 전율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그리고, 노스어 인을 학살했던 자신도 이 들이게는 악인이자 복수의 대상이라는 아이러니한 죄책감까지.
깊게 숨을 들이켠 그는 이상한 잡념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털었다. 그저 죽이고, 살아남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뺏기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던 과거의 노스어 전장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불이야!”
“성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어느새 마을의 중심지까지 밀고 내려온 녹스가 주변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성에서 새까만 연기가 거대한 먹구름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녹스의 눈에 그 검은 먹구름이 여과 없이 담겼다.
서 있는 곳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임을 잊은 것인지, 말뚝을 박아둔 것처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절벽을 조각하듯 깎아낸 성의 건축자재는 모두 단단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구 등을 제외하면 탈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나 연기가 나다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직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돼, 안돼, 안돼.
턱이 아플 정도로 세게 다문 입 때문에 입술이 비틀거렸다. 속에서 외친 소리가 바깥에도 들렸는지, 계속 녹스의 주변에 따라붙던 루이스와 해일러가 상대하고 있던 적을 단숨에 베어버리고 성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성은 저희가 가 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일러가 뒤를 돌아보며 외친 말을 끝으로 둘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해하는 적들을 어떻게 치워 냈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그들은 없는 체력을 쥐어짜 전속력으로 달렸다.
루이스는 그 와중에도 내일 있을 근육통을 걱정했고, 해일러는 좀 더 감정적인 생각을 했다. 녹스의 스러질 것 같은 얼굴을 보기 싫다는 생각. 그녀는 그 슬픈 얼굴을 안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마음이 있었다.
“집사님, 괜찮으세요?”
하늘을 검게 적셔 버린 연기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은 안개가 되었다. 매캐한 냄새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를 느낄 때쯤,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셰이단이 연기를 해치고 튀어나왔다.
“루이스 경, 해일러 경. 우린 괜찮습니다.”
“어디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은 거죠?”
“어디랄 것도 없이 하늘에서 갑자기 기름병들이 쏟아져서요, 그 후 불화살들이 날아와 불이 붙었습니다. 다행히 사용인들과 민간인들은 아래에 있는 병사 숙소를 대피소로 쓰고 있어서 인명피해는 아직 없습니다.”
셰이단이 짧게 상황을 공유하며 뒤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비예단, 제인과 멜로디가 서로 꼭 붙어 셰이단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
“제인은 이제 괜찮은 건가요?”
“네, 멀쩡해요. 걷는데에도 지장은 없을 거예요.”
해일러가 말쑥해진 제인에게 걱정스레 물었고, 비예단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제인은 걷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혹여나 혼란을 틈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비예단이 겨우 목숨만 붙여 놓은 탓이었다.
“그럼 대피소까지 호위하겠습니다. 병사 숙소라고 하셨죠?”
“저희 옆으로 바짝 붙어 계십시오.”
루이스와 해일러는 그들의 앞뒤로 주변을 경계하며 서서히 대피소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져, 근처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다들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다행히도 아까 전, 광장까지 내려가는 길을 모두 정리해 둔 터라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바로 저기에요.”
루이스가 대피소를 가리키며 말하던 그때였다. 미처 살필 겨를이 없던 위쪽에서 사람 하나가 떨어져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떨어진 사람은 엑젤리스의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였다.
“으앗!”
멜로디가 놀라 넘어지자, 해일러가 곧장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주변을 살폈고,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다.
주변에 쌓여 있는, 다쳐 신음하는 사람들, 즐비한 시체. 모두 대피소를 지키다 사망한 이들로 보였다.
“줄줄이 달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뒤의 절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위를 쳐다보았다. 루이스가 보호해야 할 인원들을 자신의 등 뒤로 보내며 막아섰다.
“사격 준비!”
하지만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탈영병 무리를 대적할만한 마땅한 수가 없었다. 상대가 활시위를 놓는다면, 모두 화살에 몸이 뚫려 죽을 목숨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말하기에도 웃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해일러와 루이스가 바짝 긴장했다.
어떻게든 대피소 안으로만 들어간다면…….
루이스는 눈을 흘기며 거리를 가늠했지만, 체력이 떨어진 제인과 겁먹은 아이를 데리고 화살을 피해 순식간에 돌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신이 미끼가 되어 적들의 이목을 끌고, 해일러와 다른 이들을 도주 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해일러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안돼, 안됩니다, 단장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루이스의 눈빛을 보고 그의 계획을 짐작한 해일러가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이고만?”
이미 승리감에 도취한 탈영병들이 죽음을 예감하고 긴장하는 이들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루이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도발을 받아들였다.
“쥐새끼들 털어먹으려고 탈영했나? 명예도 모르는 놈들이 쥔 칼이 불쌍하군.”
“허, 마지막 유언은 그게 끝인가?”
“모가지에 화살이 꽂히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고.”
그를 비아냥대는 말이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그러나 루이스는 흔들림 없이 닿지도 않을 검을 쥐었다. 탈영병들에겐 마냥 즐거운 유흥이었겠지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루이스와 해일러에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제인!”
그 긴장의 끈을 끊어 버린 건 탈영병들의 화살도, 루이스의 검도 아니었다. 앳된 목소리가 힘에 부쳐 몸이 넘어가는 제인을 불렀다.
“비예단 님! 물러나세요!”
그녀의 몸을 받치느라 앞으로 쏟아져 나온 비예단에게 화살이 향했다. 루이스가 다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미 한참은 늦은 뒤였다.
“비예단 님!”
쏟아져 내린 4개의 화살 중, 두 개가 비예단의 팔과 등에 박혔다. 처음 겪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릎 꿇은 비예단 곁으로 제인의 몸이 쏟아졌다.
“안,안돼…….”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처음 본 멜로디가 놀라 뒤로 넘어졌다. 셰이단이 제인과 멜로디를 챙기면서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예상했다.
주인님, 어디 계십니까.
당연하게도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사제 죽이면 지옥 가는 거 아니야?”
“넌 아직도 신을 믿냐!”
그들은 누가 맞췄네, 못 맞췄네 하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땅을 짚고 있는 비예단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에 녹진해진 흙이 손바닥 크기에 맞게 자국을 냈다.
“모두…물러나…세요…!”
비예단이 헐떡거리는 숨으로 팔에 박힌 화살을 뽑으며 말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적들의 활시위가 겨뉘어 졌고, 해일러가 비예단을 감싸 안았다. 비예단이 실성한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대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해일러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