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가만히 있어, 거슬리니까.”
“네….”
아, 내가 또 살아 버렸구나.
땅으로 추락할 때 느꼈던 죽음의 직감은 그녀에게 꽤 달콤한 해방감을 준 터라, 어쩌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인생은 죽음조차도 쉽지 않았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살갗을 애는 추위가 느껴졌다. 제인이 저도 모르게 등 뒤의 따스한 온기를 찾아 파고들자 녹스가 몸을 불편하게 굳혔다.
“눈….”
두 개의 보라색 시선이 품에 안겨 있는 제인을 쫓았다. 그 묘한 기색이 주마등이라 생각했던 기억 속 그 눈과 비슷했다. 동정이나 혐오가 아닌, 무언가가 담겨 있는 눈. 찬 바람에 혼미했던 정신이 점차 깨어나자 하나둘 떠올랐다.
“…말하지 말고 쉬어.”
가올테의 폐저택에서도, 엑젤리스에서 깨어난 제인을 처음 봤을 때도, 도망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에도, 절벽 위에서 제인을 농락했을 때에도, 그는 지금과 같은 묘한 시선을 보냈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야 물어보고 싶었다. 몇 번이고 기회는 많았었는데, 비로소 지금에야 궁금해졌다.
왜 날 구해 줬나요? 내게 원하는 게 뭔가요?
기대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은 한 번도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일축했다.
그녀는 뭐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더니, 도로 눈을 감았다. 기력이 다해 기절한 것인지, 잠에 빠진 것인지는 몰라도 따뜻한 몸이 점점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녹스는 위독해 보이는 제인과 엑젤리스 때문에 좀처럼 날뛰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심란함은 어쨌든 성에 도착하면 해결될 것이었다. 그가 점점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앞서나가는 녹스를 루이스와 해일러가 버겁게 따랐지만,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내성으로 진입한다, 성의 잔류 인원과 대피소 인원들부터 확인해.”
녹스가 뒤를 흘깃 보며, 누락 된 인원이 없는지 확인하고 명령을 내렸다. 높게 솟구친 엑젤리스 성이 시야에서 점점 커졌다. 멀리서 커다란 함성과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이자, 그들은 긴장하면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좁게 나 있는 가파른 바람 협곡의 사이엔 검붉은 피가 즐비했다. 파수꾼들의 화살이 온몸에 꽂혀 있는 시체 중엔 다행히 엑젤리스의 갑옷을 입은 것은 없었다. 흥분에 날뛰면서 앞만 보고 달리는 말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여있는, 생전 살아 움직였던 것들을 짓밟아 심하게 덜컹거렸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 피 웅덩이를 첨벙대는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함성이 가장 먼저 들려왔다. 실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엑젤리스의 병사들이 지휘관도 없이 제멋대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고, 탈영병들은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라도 하듯 달라붙고 있었다.
“대장님!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
루이스가 말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다른 기사들도 제각각 무기를 챙겼다. 제인이 떨어질까 최대한 자세를 낮추면서 질주하던 녹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민간인의 시체를 보면서도 눈을 감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탈영병들이 아직 내성까지 들어오진 못했는지 성문을 지키는 병사 몇을 제외하곤 한산했다. 다급히 들어오는 대장의 모습에 허겁지겁 문을 개방한 병사들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오는 녹스와 제인을 부축했다.
“비예단을, 사제를 불러라.”
숨도 고르지 못한 목소리에 흐트러진 녹스의 모습을 처음 본 병사들이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성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신의 겉옷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제인을 눕힌 그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주인님!”
창문으로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셰이단이 녹스가 뛰어 들어온 걸 보고 가장 먼저 내려왔다. 그 뒤를 따라 침대 밑에 숨어 기도를 올리고 있던 비예단이 양팔이 붙들린 채 끌려 나왔다. 무언가를 뺏고자 하는 목적의 전쟁을 처음 마주한 비예단은 겁에 질리는 게 당연했고,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만, 그를 데리고 나온 병사들은 뒤돌아가며 겁쟁이라 모욕했다.
“제인!”
비예단은 그깟 모욕 따윈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제인의 안색이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구해온 녹스에게 마치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사를 전하고, 또 전했다.
“뭐라 감사를 전해야 할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감사는 됐어, 기억하고 있겠지.”
녹스가 주저앉은 비예단을 보며 검은 가면을 벗어냈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의 하얀 얼굴과 여린 선으로 이루어진 이목구비가 예전, 그날과는 다르게 침통해 보였다.
“네?”
의미불명의 말에 이 상황에서조차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비예단의 금발 머리에 녹스의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지만, 제 머리를 몇 번 흐트러트리고 손을 거두어가 도로 살며시 눈을 떴다. 녹스는 그런 비예단을, 마치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미소로 마주했다.
“저번에 내게 말하지 않았나. 분명 목숨을 구해 준다 하였지.”
“…네.”
“제인을 구해 주게, 오는 내내 숨이 넘어갈까 걱정이었는데 아직 살아있어.”
제인과 비예단을 번갈아 보던 그는 들고 있던 가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가면을 줍기 위해 셰이단이 가까이 다가갔으나 녹스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로 줍는 걸 제지하곤 성의 방어를 위해 남겨진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 *
빼먹고 있던 정신을 도로 되찾았을 뿐인데, 아까는 미처 느끼지 못한 불쾌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건조한 입이 까끌 거렸지만, 그마저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녹스는 지금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일방적 우위를 점하고 학살을 자행했던 적은 멀지 않은 과거에도 몇 번 있었지만, 이런 치열한 전투를 마주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노스어 인들은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이기도 했으며 모든 걸 앗아간 원인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사기가 올랐다.
“대장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전방에서 루이스와 해일러를 포함한 기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늦지 않게 도착해 다행이었다. 스무 명 남짓의 적은 인원이었지만, 제1 기사단 소속인 그들은 녹스가 가장 신임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엑젤리스 주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난민 혹은 포로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기사가 되었다 한들,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온 탈영병들과 동등하게 싸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녹스는 이 오합지졸들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불리한 판국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랐다.
“왔나.”
“저희는 준비되었으니,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비록 경험이 부족할지언정, 겁먹어 떨고 있는 자는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포악하게 굴어 대는 말에서 몸을 내던지듯 내린 기사들이 순식간에 녹스의 앞에 대열을 다듬었다. 적군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숫자라는 게 더욱 실감 났다.
과한 사병을 모집했다가 괜히 수도의 늙은이들 눈총을 받을까 싶어 소수의 인원으로 꾸린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그깟 노인네들이 뭐가 무섭다고, 수도에서 쫓겨나고서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구나. 그러나 그런 후회는 전장에선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녹스는 쓸모없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애썼다.
“기사들이여.”
그가 오래전 황제 폐하께 하사 받은 검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날붙이가 검집과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지친 기색을 뒤로하고, 기사들도 모래로 뒤덮인 검의 손잡이를 뽑아 들었다. 절도있는 동작에서 결의가 보였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그대들의 터전을 위해 싸워 주게, 나 또한 그대들의 주군이 아닌 동료로서 긍지를 증명할 테니.”
녹스의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끔찍한 비명과 함성을 뒤덮었다. 벌써 내성을 오르는 좁은 언덕길에 적들이 몰리고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머릿수, 더군다나 지칠 대로 지쳐있는 기사들.
이 병력으론 절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생각은 대열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 내일이 있을 거라 믿는 이가 몇이나 될까. 다들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높이 치켜든 녹스의 검에 이제 막 일출을 시작한 태양이 반사되었다.
“새로운 여명을 위하여.”
칼끝이 도로 허공을 가르고 땅에 박히자,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외치며 달려나갔다.
“엑젤리스를 위하여!”
아이가 있는 여기사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앳된 남기사도,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은퇴한 용병 출신의 기사도, 누군가는 오합지졸이라 흉보겠지만, 모두 각자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