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87)화 (87/95)

87화.

“녹스 님, 어서 무례한 손님들을 내쫓고 단둘이 있어요, 평생 우리 둘만 있고 싶어요, 사랑해요…….”

율리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녹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환상 속 녹스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레이스 가문의 금지옥엽 외동딸인 그녀의 눈은 이미 환각에 젖어 들어 생기 없이 탁했다. 교양있고 총명한 백작가의 영애였던 율리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남자와 함께 평생을 갈망하던 꿈속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단둘만의 행복이 펼쳐져 있는 꿈속에.

그녀와 더는 대화가 불가능하리라 판단한 녹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이곳까지 온 용건을 꺼냈다.

“내 것을 돌려받으러 왔네.”

간략한 말과 함께 쓰러져있는 제인을 가볍게 들어 안은 녹스를 유모가 제지하려 다가섰다.

“저, 각하! 아가씨께서 정신이 좀 이상하세요…!”

용기를 겨우 쥐어짜 힘들게 한 마디를 꺼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과 함께 조롱의 말이었다.

“글쎄, 늘 미쳐있지 않았나.”

그대로 뒤를 돌아나가는 녹스의 뒤로 넋이 나간 멜로디를 해일러가 챙겨 함께 데리고 나왔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분명 좋은 꼴은 아니었던 아이를 챙기려는 그녀의 동정심이었다.

“꼬마야, 일어나. 같이 가자.”

루이스는 제인을 건네받으려 다가갔지만, 녹스는 끝끝내 자신이 안고 가 조심스레 말에 태웠다. 몸을 가누지 못해 계속해서 옆으로 쓰러지려는 제인을 뒤에서 지탱한 채 마당을 나가려는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둘 앞을 가로막았다. 제인을 훔쳐 가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는지, 그 무리는 녹스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펼치고 있었다.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불청객 무리는 헤티아와 해일러, 루이스뿐만이 아니었다. 율리나의 병사들이 검을 뽑을 낌새를 보이자 별장의 앞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응접실에 있던 로난이 다급히 달려 나왔다.

“해산해라.”

아가씨만 바라보고 살았던 백작님과 정신 나간 아가씨. 이 가문은 이제 끝이구나.

로난은 맞서 싸우지 않고, 그들을 곱게 보내 주길 택했다. 어차피 싸워봤자 질 게 뻔했다. 상대는 그 유명한 녹스 엑젤리스이니. 불필요한 피를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로난은 해산을 명령했다.

“수도로 돌아가는 계획은 무산이다. 어서 해산해!”

머뭇대는 병사들을 향해 로난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대로 수도로 돌아간다면 분명 백작님에 의해 목숨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과 승산 없는 결투를 하기 전에 자신과 남아 있는 병사들의 살 궁리가 우선이었다.

“그대의 주인에게 전해. 율리나 레이스가 정신이 온전치 않아 불가피하게도 파혼을 결정했다고.”

녹스는 말을 출발시키기 전, 자신을 바라보는 로난에게 말했다. 덧없는 율리나의 짝사랑이 드디어 종결을 맺었다.

* * *

멜로디는 해일러와 함께 말을 타고 가면서, 가장 선두에 있는 녹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게 생긴 가면을 쓰고 있어 나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은빛의 머리카락이 뒤덮은 뒤통수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보였다.

나까지 구해준 걸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걸까?

그에게 안겨있는 제인을 보기 위해 목을 최대한 치켜들자 고삐를 쥔 해일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 위에선 함부로 움직이면 큰일 나.”

“앗,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을 듣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사과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 멜로디는 해일러의 품에 깊이 파고들었다. 딱딱한 갑옷인데도, 품이 따뜻한 덕에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자신을 왜 데려가는 것인지, 혹시나 나쁜 사람들은 아닐지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탁 트인 시야가 갑갑했던 속을 뚫었다. 아까 전 있었던 일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천사님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볍게 몽글거렸다. 이대로 밤새워 말 위에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감옥 같은 레이스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복수까지 했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나겠지, 행복한 상상에 바람을 맞아 꽁꽁 언 얼굴에 아이다운 미소가 번졌다.

“대장님, 전령입니다.”

그러나 엑젤리스는 당장 멜로디의 기대를 채워 줄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지평선을 넘어온 전령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자 일동 긴장감이 맴돌았다. 전령이 들고 있는 기다란 막대 위에 펄럭이는 천이 흐릿하게 윤곽이 잡혀갔다. 해가 넘어간 시간이라 색까지 구별하긴 어려웠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품에 안겨 겨우 숨 쉬고 있는 제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녹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숨만 붙여 간다면 비예단이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전령이 들고 온 깃발이 부디 검은색이길, 녹스도 그들도 바라고 있었다.

“으윽…….”

거칠게 흔들리는 몸체에 제인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 떨림을 전해 받은 녹스는 속도를 늦춰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어쩌면 공격받고 있을지 모르는 엑젤리스를 위해, 지금 내뱉는 숨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제인을 위해 멈출 수 없었다.

“붉은색입니다!”

겨우 전령이 달고 온 깃발을 가늠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루이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곧이어 그들의 코와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위험을 알리는 붉은 깃발.

아니길 바랐지만, 최고의 요새인 엑젤리스는 결국, 조국과 주군을 버리고 뛰쳐나온 노스어 탈영병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지체 없이 곧장 간다. 낙오되는 자는 해일러, 그대가 챙기게.”

“알겠습니다!”

어쩌면 아이를 안고 있는 해일러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는 녹스의 말에 그녀가 말발굽 소리에 묻히지 않을 만큼 큰소리로 대답했다. 출발할 즈음부터 가졌던 불안이 피부에 와닿자, 비로소 모두가 헛된 기대를 내려놓고 해가 뜨기 전까진 어떻게든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녹스의 가장 가까이에 있고 싶었던 율리나의 바람대로 그녀의 별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통행이 어려워 지체되는 구간도 없었다. 온종일을 말 위에서 보내는 강행군에도 군말 없이 따른 그들은 최단 루트를 파훼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 * *

심하게 흔들리는데도 눈 한 번 뜨지 않고 쓰러져 기대 있던 제인이 흐려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나름의 애를 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지독한 졸음이 눈꺼풀을 무겁게 하고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지만, 한 줌 남아 있던 삶에 대한 미련은 희미한 가닥을 아슬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미련은 안개에 가려져 망각하고 있던 기억을 기꺼이 꺼내 주었다. 제인은 그것이 주마등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눅눅한 나무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온몸에 들러붙던 그곳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꿉꿉한 냄새가 익숙하게 코를 지치게 만들고, 무기력이 온몸을 짓눌러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물속에 잠겨있는 듯 답답했다. 주마등의 모습을 한 악몽이구나, 제인이 이젠 익숙하지 않은 결박에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비틀었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악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제 그만, 이 안타까운 삶을 포기하자고, 가시밭길에 놓인 질긴 목숨을 놓아 줘야겠다며 죽어 가고 있던 그 시절을 다시 마주하자 당장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심장을 감싼 마음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발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수마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가라앉으니 한결 편해졌다. 이만큼이나 참아온 자신이 대단했다. 이 정도 버텼으면 할 만큼 했다는 위안이 자장가처럼 기억 속의 제인을 잠재웠다. 꿈에서조차 몽롱해질 때쯤 오래 전, 갇혀 있던 폐저택의 낡은 바닥이 삐걱대는 게 느껴졌다.

‘시체…냄새도……군.’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치 미래도 보이지 않는 지옥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나, 싶어 덜컥 겁을 집어먹은 그때, 시원한 손이 몸을 감쌌다. 그 손의 주인이 무심한 눈길로 제인을 보고 있었다.

‘나…동의해…….’

늘 마주해 왔던 인간들이 던지는 경멸이 아닌 시선. 그저 철저히 타인을 대하는 평범함. 그녀는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는 깊은 수마의 늪에서 갓 피어난 제비꽃을 닮은 연보라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악몽같은 끔찍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아…….”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 제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단단한 양팔이 그녀를 꼼작도 못 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으윽.”

몸이 불규칙하게 위아래로 흔들려 멀미가 나는 데다, 흔들림에 따라 온몸의 뼈마디가 아우성을 쳐 저절로 입에서 아픈 소리가 났다.

“깼나.”

이제야 드디어 제대로 눈을 뜬 제인에게 녹스가 태연히 물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기대고 있는 이 단단한 벽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놀란 나머지 다급히 그와 떨어지려고 몸을 들썩이자, 제 기능을 못 하는 관절들이 삐거덕거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순간, 녹스가 그녀를 끌어안아 더는 발버둥 치지 못하게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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