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86)화 (86/95)

86화.

그대로 단단한 바닥에 추락한 제인의 위로 아직도 빛 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와중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싼 팔이 울긋불긋한 타박상으로 뒤덮였다. 흙먼지에 범벅이 된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은 회색이 되었고, 고통에 허덕이는 제인이 얕게 신음을 내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눈앞에 펼쳐졌던 신기루에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넋이 빠져있는 병사들은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머리맡에 그늘이 질만큼 거대한 날개, 안개처럼 휘날리던 반짝이는 가루들은 단체로 최면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순식간에 사라졌다.

멍청히 서 있는 병사들을 비집고 로난이 제인에게 달려왔다. 처참히 늘어져 있는 제인의 팔을 잡아 올리자 우악스러운 힘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몸이 부자연스럽게 일으켜졌다. 그는 짐을 옮기는 모양새로 제인을 어깨에 둘러멘 후 아직도 환상과 현실 사이를 헤매고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아가씨께 보고하고 올 테니 대기하고 있어,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그 말을 시작으로 시장통처럼 웅성거림이 번졌다. 로난은 그들을 제지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란 걸 깨닫고 우선순위를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그도 방금 눈에 담았던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장면들이 아직도 아른거리긴 했지만, 발이 달린 귀중한 재산이 도망가는 걸 막은 대가로 받을 어마어마한 보상이 더 기대되었다.

“탈출하려는 노예를 붙잡았습니다. 아가씨께 보고 드릴 내용이 있습니다만.”

곧장 율리나의 방으로 올라가려던 로난이 로비를 지나치다가, 응접실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유모를 발견하곤 말을 붙였다. 유모는 조금 전 제인이 벌인 사건으로 인해 난리가 난 것 이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등에 들쳐멘 제인을 힐긋거리며 말하자 유모도 대강 뜻을 알아들었다.

“중요한 일인 건 알겠지만…지금 아가씨가….”

유모는 로난을 앞에 두고도 계속해서 난색을 보이며 곤란한 티를 냈다.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고 따지려다가 결국 예의를 갖춰 그 ‘곤란’의 이유를 물었다.

“응접실에 다른 손님이 와 계신 겁니까?”

손님이 와 계시는데, 이런 꼴을 보이면 분명 좋지 않을 거란 것쯤은 로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면서 마당에서 대기하는 동안 다른 외부인이 들어간 걸 본 적이 없는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을 일부러 더 과장했다.

“아휴, 그런 게 아니라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절절매고 있던 유모가 결국 상황을 설명하길 포기하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 할거라며 중얼대는 유모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아가씨?”

로난은 자신이 엉망진창이 된 노예를 끌고 왔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율리나를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한 번 불렀다.

“뭐야? 녹스 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멍청한 아랫것들이 절 가만두질 않네요.”

로난과 유모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율리나는 바닥에 내던져진 제인을 흘깃 보고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말했다.

“용건만 말해.”

신경질적인 어투에 로난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고자 유모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예가 창문을 뛰어내려 도주하는 걸 붙잡았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부상이 있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바닥에 누워있는 제인을 발끝으로 건드리며 용건만 빠르게 전달한 로난은 계속 율리나의 옆자리를 힐끔거렸다.

“녹스 님, 어떻게 할까요? 괘씸하긴 하지만,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 준 은인이잖아요.”

그러나 녹스는 응접실에 로난이 왔을 때부터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율리나는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여겼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해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을 해뒀어야 했는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앞에 서 있는 로난과 유모에게 쏘아붙였다.

“나가! 내다 버리든지 알아서 해, 아무도 이 방에 못 들어오게 하고. 알았어?”

“예, 예….”

완벽한 저자세로 율리나의 말에 고분고분 알겠다고 대답하는 유모는 응접실에 돌아올 때부터 숙이고 있던 허리가 펴질 줄을 몰랐다. 로난은 계속해서 기묘한 표정을 하고 율리나와 그 옆자리를 살폈지만, 결국 등을 떠미는 유모의 손에 의해 응접실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로난이 마당에 있는 병사들을 해산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코앞에서 응접실의 문 한쪽이 기별도 없이 벌컥 열렸다. 부딪힐 뻔했네. 구시렁대는 그가 예의 없는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어 제낀 사람은 다름 아닌 멜로디였다. 창문에 달라붙어 제인이 천천히 비상하는 것과 추락하는 것을 모두 목격한 그녀는, 로난이 제인을 들쳐 메고 응접실로 가는 것까지 확인하자 무작정 응접실로 달려왔다. 그러나 제인의 목숨을 구걸하러 온 목적이었다면 때를 한참 잘못 짚었다. 율리나가 결국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소란이지? 손님도 와 계시는데!”

날카롭다 못해 우렁찬 호통에 주눅이 든 멜로디가 흠뻑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떨면서도 율리나의 앞에 쓰러져있는 제인에게 기어코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제가 그런 거예요. 제가 도망치라고 한 거예요, 저를 벌해 주세요…!”

여기저기 상처가 나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는 제인을 몸소 막아서서 주인 아가씨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용서를 구하는 멜로디는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아닌 쇠를 긁는 소리가 났다. 애절하다기보단 절규와 비슷한 그 쇳소리는 율리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게 어딜!”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멜로디의 손을 걷어찬 율리나는 귀까지 붉게 물들어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모습이었다. 소리를 지르기 전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생긴 정적이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로난! 당장 이년 손가락을 잘라 가져 와.”

주인의 드레스를 잡은 죄치고는 과한 처사에 로난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율리나는 옆에 녹스가 있는 것도 잠시 잊었는지 무릎 꿇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멜로디의 손가락을 발로 밟았다. 뼈마디가 짓이겨지는 아픔에 비명이 따라붙었다.

“끄아아악!”

“로난, 내 말 안 들려!?”

로난은 그 악을 지르는 명령에 결국 허리춤에 찬 검을 빼내었다. 꿀꺽거리며 넘어가는 침이 조금씩 다가갈수록 메말라갔다.

“안돼, 안돼!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멜로디는 억지로 밟힌 손가락을 빼내 로난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동경했던 천사님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린아이에게 이 끔찍한 형벌은 차마 인내로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눈앞에 그려진 공포에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천사님, 정신 차려요! 천사님, 살려 주세요!

로난이 들고 있는 검에 무게가 실려지는 걸 본 멜로디는 더 이상 언어로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그저 곧 잡아먹힐 닭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속으로 멀리 있는 천사를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아비규환 같은, 이 응접실에서 홀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유모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혼미함이 느껴졌다. 현기증에 바닥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이 끔찍한 현장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핏기없이 창백해져 있던 주름진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아가씨!”

이 사람이야말로 이 정신 나간 상황을 구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유모가 율리나를 불렀다.

아가씨가 그리워 마지않던 손님이 왔어요, 아가씨! 정신 좀 차려보세요!

당장이라도 아가씨에게 달려가 외치고 싶었지만, 온몸이 굳어선 유모가 눈알만 굴려 검은 가면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눈빛을 피했다.

“…….”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방금 들어온 불청객을 바라보고 있자 일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그 불청객이 방을 한 번 둘러보곤 율리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뒤로, 헤티아와 루이스, 해일러까지 모두가 따라 들어와 그들의 웃기지도 않는 횡포를 구경했다.

“녹스 님, 이런 모습 보여 드려서 정말이지, 죄송하다는 말 밖에….”

율리나는 여전히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계속 허공을 향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보군, 놀랍지도 않아.”

엑젤리스에서부터 내내 달려온 불청객, 녹스가 혀를 찼다. 누가 봐도 미쳐 버린 그녀의 모습에 안쓰러워하거나 안타까운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약간 이상하긴 했죠.”

전서구를 통해 율리나의 별장 위치를 말해 준 헤티아가 옆에서 깐족거렸다.

“아가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유모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면서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있었다. 로난은 그 불청객 중 검은 가면을 쓴 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뽑아 든 검을 다시 채워 넣고 거슬리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율리나 레이스.”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지만, 율리나는 과하게 몸을 흠칫거렸다.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지 여전히 옆을 보면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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