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녹스는 어떤 마음으로 제인을 외면했는지 모르겠으나, 율리나는 의도한 행동이었다. 제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긴커녕 그녀답게도 소소한 복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능력으로 사랑을 이루어 준 사람의 표정이라기보단, 저주를 내린 사람의 승리 미소와도 같았다.
그들이 나가는걸 지켜보는 건 제인 뿐만이 아니었다. 몰래 복도 기둥에 숨어, 아까부터 다락방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멜로디는 율리나가 어쩐 일로 저렇게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늘 못된 눈을 치켜뜨고 사용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던 아가씨가 어쩐 일로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모시는 아가씨보다, 천사님에 대한 걱정이 더 깊었다. 분명 큰 소리가 들렸더랬지.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주변을 둘러본 멜로디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허겁지겁 닫힌 다락방 문으로 뛰어갔다.
“천사님!”
방 안에 들어온 멜로디는 지쳐 보이는 제인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끔찍한 시간을 보낸 건 제인인데도, 멜로디는 그 고통을 나눈 마냥 괴로운 얼굴이었다.
“제가 도와드린다고 해놓고 아무 도움도 안 돼서 죄송해요, 천사님.”
울먹이는 사과에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농밀한 슬픔이 묻어났다. 제 잘못도 아닌데 멜로디는 크게 상심하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요. 많이 아프죠….”
제인의 입술엔 피가 굳어 있었고, 머리칼은 죄다 헝클어져 길바닥 거지만도 못한 꼴이었다. 팔에 난 상처에서 여태 흘러내리지 못한 피가 맺혀 있었다.
멜로디는 그녀의 상처 난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바람을 불어 열심히 열을 식혔다. 이런 걸로 나을 리 없었겠으나, 제인은 아이의 행동에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괜찮아, 별로 안아파.”
괜찮다는 듯 붙들린 팔을 빼냈다.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던 녹스는 율리나에게 빠져 버렸고, 새로운 주인은 저의 혓바닥을 자르려 했지만,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며 우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멜로디가 바로 찾아온 것만으로도 제인에겐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죄송해요, 아무런 도움도 못드려서….”
울상을 짖는 아이를 위로해 줄 여력은 없었다. 율리나가 떠났다 해도 누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제인은 멜로디의 작은 손을 덥썩 붙들었다.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차례였다.
“날 도와줘.”
여태 모든 게 순조로웠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헛된 꿈이 아니기를. 그녀는 오직 그 생각에 오랜만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멜로디도 꿀꺽, 침을 삼키곤, 긴장한 눈빛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뭐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이미 제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종교처럼 그녀에게 빠져든 멜로디가 제 손을 잡고 있는 제인을 꼭 붙들고 뭐든 돕겠다 말했다.
“날 위해 말해 줘, 내가 무사히 도망치게 해 달라고.”
델단과 함께 도망갈 때처럼, 그녀는 또 다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부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황당한 요구를 한 제인의 눈은 진지했다. 다행히도, 멜로디의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동심은 제인의 요청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맞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아이가 그녀를 위해 빌었다.
“천사님에게 커다란 날개를 주세요, 이곳에서 도망쳐서 달님에게 갈 수 있도록 밤하늘을 닮은 날개를 주세요.”
여전히 망상에 빠져있는 소원이었으나 간절함만큼은 진심이었다. 서로를 맞잡은 손 위로 제인의 눈물이 몇 방울이나 떨어졌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멜로디의 바람은 서서히 투명한 눈물에 스며들어 염원이 되었다.
“이건….”
율리나에게 주었던 그 ‘염원’과는 달리, 어두운 빛 하나 없이 빛나는 은색의 구슬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들의 종족이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보석이 제인과 아이의 간절함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시시때때로 반짝였다.
“난 많은 인간을 만나왔어. 그들은 모두 나를 위해 소원을 빌어 주었지만,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단다.”
“혹시…. 이번에도 안된 거예요?”
멜로디의 걱정 어린 말에 염원을 손에 쥔 제인이 멜로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감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빌어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은 제인이 다락방에 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천사는 착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데…!”
곧장 떠나 버릴 것 같은 뒷모습을 멜로디가 붙잡았다.
가슴께에 꼭 끌어안은 손, 불안한 얼굴, 주춤거리는 행동.
모든 것들이 아이가 뭘 원하는지 확연히 나타냈다. 어머니를 위한 복수, 인륜을 져버린 자들에 대한 죗값이었다. 제인은 그제야 알아챘다. 멜로디가 순수하게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도운 게 아니라는 것을.
“주인 아가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천사님! 떠나시기 전에 제발…!”
혹시 제인이 이대로 사라질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몇 발자국 뒤에서 본심을 내뱉는 멜로디를 처연한 얼굴이 마주했다.
“이 힘은 누군가를 해칠 수 없어, 미안해.”
“…아.”
반드시 다른 종족의 누군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빌어야 비로소 제 능력을 발휘하는 제인의 ‘염원’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기적과도 가까운 능력을 갖추고도 인간들의 밑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천사가 누굴 해칠 수 있을 리 없지, 당신은 천사니까요.”
멜로디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으니 너무 상심하지마.”
그녀는 녹스의 앞에서 수줍은 얼굴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던 율리나를 떠올렸다. 자신의 혀를 잘라내려 했던 여자는 비록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됐지만, 오직 둘 밖에 없는 세상에 갇혀 지내게 될 것이다. 최고의 선물이자, 최악의 저주였다.
멜로디 또한 복도에서 훔쳐봤던 주인 아가씨를 생각했다. 사뿐사뿐한 걸음, 즐겁게 조잘대는 어투, 설렘이 가득했던 얼굴. 그제야 멜로디는 제인이 말했던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감사해요, 천사님.”
주인 아가씨의 행복을 짐작한 멜로디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인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제인도 상처 난 손을 작게 흔들곤 다락방의 창문에 마저 올라섰다. 까마득한 아래를 보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으나, 자신을 위해 울어 주던 아이의 진심을 믿었다.
제인이 아슬아슬하게 짚고 있던 창틀에서 발을 떼어 밑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창문 아래로 곤두박질친 천사가 걱정된 멜로디가 창문에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사님!”
바람결을 따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커다란 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새카만 날개.
제인은 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랜만의 비행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공중에서 비틀거리던 그녀가 다시금 날갯짓했다. 우웅, 하고 창문을 때리는 커다란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고마웠어.”
더 높이 날아오른 제인은 두 번 다시 못 느낄 거라 여겼던 창공을 가르는 쾌감을 마음껏 즐기며, 광활한 황무지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별장의 널따란 마당을 벗어나던 제인의 시야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보인 건, 델단과 함께 도망쳤던 날 보았던 타오르는 불꽃들이었다.
“…윽!”
날카로운 화살이 매섭게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당에서 한참이나 율리나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병사들이 제인에게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고 있었다. 가장 화가 많이 났을 거라 짐작되는 경비 대장 로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격추하라 명령하고 있었다.
“쏴라! 절대 놓치지 마! 화살을 전부 털어서라도 추락시켜!”
작살도 아닌 화살이 높이 떠 있는 제인에게 닿을 리 없었지만, 발끝을 스친 화살에 중심을 잃은 제인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마음의 동요가 아직 낯선 비행에 영향이라도 끼친 것인지 불안정한 날갯짓은 고도를 점점 낮추게 했다.
“천사님!”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위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 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염원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날개에 관통한 화살이 모든 신기루를 흩트렸다. 작은 별빛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장면은 물가에 비친 별들처럼, 산속에서 흩어지는 반딧불이처럼, 횃불의 끄트머리에서 타오르는 잿가루처럼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제인에겐 안된 일이었으나 아래에서 무자비하게 화살을 퍼붓던 병사들은 잠시나마 당기던 활시위를 내려놓고 장관에 빠져들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눈에 담지 못한, 밤하늘을 수놓은 별가루들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