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연적에게 이렇게 직접 복수할 수 있다는 게, 마음껏 엉망으로 만들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잔혹한 본성을 일깨웠다. 한 번도 흉기로 누구를 해 입혀 본 적은 없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인은 그녀의 눈에서 녹스와는 결이 다른 광기를 보았다.
“입 벌려.”
양 볼에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들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턱관절이 으스러질 만한 압박이 느껴졌다. 제인은 곧 숨이 넘어가는 듯한 기괴한 신음을 내며 어금니를 꽉 다물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과도의 표면에 묻은 먼지에서 익숙한 쓴맛이 느껴졌다. 안된다고, 제발 멈춰 달라고 빌고 있는 제인의 눈에 거울처럼 웃고 있는 율리나가 비췄다. 커다랗게 뜬 눈과 집중한 눈썹, 살짝 벌린 채 찢어지게 웃고 있는 모습이 흡사 악마의 모습이었다.
혀에 느껴지는 뜨겁고 쓰라린 고통이 전신에 전해졌다. 제인은 온 힘을 다해 율리나를 밀쳐냈고, 복수에 눈이 먼 율리나는 과도를 꼭 잡은 상태로 비명도 없이 뒤로 넘어졌다.
욕이라도 하면서 다시 달려들 줄 알았던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세 번, 좁디좁은 다락방에서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밀쳐 냈다 한들 그 거리가 전부였다.
“제발…!”
애원과도 같은 흐느낌은 광기의 흐름을 끊어내지 못했다. 율리나의 손이 서서히 얼굴에 다가올 때마다 불안에서 비롯된 초조함이 마음속을 날뛰었다.
왜 하필 나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제발, 안돼. 부탁이야….
내 뜻이 상대방에게 가 닿지 않고 튕겨 내질 때의 그 숨 막히는 답답함, 사지를 동동 구르게 만드는 안타까움이 결국 율리나의 다리를 붙들었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는데 혀를 잘라간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요. 속에 담긴 수많은 감정은 제 신체를 농락하는 사람에게 단 한 가지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넌 녹스 님과 내 사랑을 방해했어, 응당한 죗값을 받아야지?”
“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모두 오해에요, 믿어주세요!”
이미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오해에 진실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율리나는 녹스가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설움에 대한 화풀이가 필요할 뿐이었다.
“녹스 님은 내 꺼야, 내가 10년을 넘게 기다렸다고! 그럼 당연히 내 꺼 아니야!?”
사랑을 배워본 적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제인은 그 감정의 형체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몰랐으나, 율리나의 감정을 ‘사랑’으로 치부하기엔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집념, 상대를 향한 이유 없는 목적의식이 거대하게 몸집을 키워냈다.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
그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에 대한 의지가 마침내, 제인에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가닥을 제공했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죠?”
구차하게 목숨을 빌던 아까와는 모습이 전혀 달랐다. 율리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단숨에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었지만, 이어지는 침착한 말투에 솔깃한 제안이 마음을 흔들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게 해 줄게요.”
그녀는 녹스가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는 이유가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해 늘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권력과 평판에 눈이 먼 아버지가 녹스를 배신해서 둘의 사이가 틀어진 거라고 평생을 믿었다. 비뚤어진 사랑이 원인일 거라곤 전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다.
“…어떻게?”
그에게 단 한 번이라도 눈길을 받고 싶어서 해 보지 않은 게 없었다. 집안 재정이 흔들릴 만큼 사치품을 사 치장하고, 머리에 교양을 채워 넣기 위해 혹독하게 공부했다. 여태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어본 적도 없는 데다, 훗날의 내조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업 경영에 매진했다. 구역질 나는 사람들과의 사교 자리에서도 인상 한 번 쓴 적 없는 율리나는 오직 녹스를 위해 지난 세월, 자신의 최선을 바쳤다. 그 세월의 대가는 비정상적인 집착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으로 긴 세월을 버텨온 율리나에게 제인의 속삭임은, 마치 절박한 상황에 마주한 지푸라기였다. 제인은 그녀의 심정을 본의 아니게 이용했고, 율리나는 의심하면서도 혹시나 한 마음이 들어 어쩔 수가 없었다.
제인이 율리나의 팔을 핥듯이 쓸어 서툴게 과도를 쥐고 있는 손까지 닿았다. 무기를 힘없이 건네준 율리나는 순간 경계의 태세를 취했지만, 칼을 건네받은 제인은 날 끝을 자신에게 겨눴다.
어제 났던 상처가 새살로 덮어 쓰이기도 전에, 그 위로 다시 긴 상흔이 그어졌다. 붉은 핏줄기는 팔의 굴곡을 따라 느리게 흘러내려 맺혔다.
“인간들은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 구슬은 ‘염원’이에요.”
“…염원?”
“당신과 내가 같은 것을 바라면 결국은 이루어질 거예요.”
목숨이 경각에 달했어도 끝까지 비밀로 지켜왔던 종족의 비밀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제인은 더는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마음을 다해 빌어야 해요, 나도 당신을 위해 진심을 다할 테니까.”
“…이깟 구슬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말이야?”
불신이 가득한 믿지 않는 뉘앙스였다.
“믿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명심해야 해요. 절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테니까….”
“…….”
“믿을 수 있겠어요?”
“……믿어.”
율리나는 이런 종류의 미신을 다양하게 시도했었다. 녹스의 머리카락을 매일 밤 베개 밑에 넣고 자거나, 그의 소지품을 태운 가루를 몸에 지니고 있다거나 하는 부류의 것들은 모두 해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것 또한 미신일 거라 치부했지만, 그 단호한 검은 눈은 결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믿어 보기로 했다.
“녹스 님이…날 사랑하게 해줘, 평생, 단둘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율리나가 천천히 눈을 감고 매일 꿈꿔 왔던 한 문장을 이야기했다. 대책 없이 눈부신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제인이 피 묻은 손으로 율리나의 손을 맞잡았다. 어쩐지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율리나가 눈을 떴다. 하지만 소원을 들어 준다기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눈 부신 빛도, 환청처럼 들려오는 종소리도, 사랑을 시작하는 설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이런 황당한 장난에 속아 넘어가다니, 온몸을 끼얹는 모멸감에 율리나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제인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붉은 구슬을 아무 말 없이 건네주기만 했다. 원래보다 조금 더 탁한 빛의 그 ‘염원’이라는 구슬은 기묘하게도 율리나를 끌어당겼다.
“이까짓게 뭐라고 내가…!”
잡아채듯 건네받은 구슬을 집어 던지려는 순간, 다락방의 문이 열렸다. 율리나는 당연히 유모가 자신을 찾으러 왔겠거니 싶어 당장 꺼지라고 소리칠 생각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이든 중년의 여자가 아니었다.
“율리나.”
갑갑한 가면을 벗어던진 녹스가 서글픈 눈으로 율리나를 불렀다.
“녹스 님…? 여긴 어쩐 일로…?”
“그대가 갑자기 떠난 게 마음에 걸려 급히 쫓아왔네, 내 무례했던 행동을 부디 용서해 주겠나?”
처음이었다.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그 제비꽃을 닮은 눈이,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고 말랑하게 움직이는 그 얼굴이 모두 처음이었다.
이게 사랑이구나.
율리나는 심장이 뛰고 있음이, 자신이 율리나 레이스임이 감사했다.
녹스 님, 녹스 님, 녹스 님!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도 그는 그저 다정히 바라봐 주었다. 벌레를 보는듯한 그 경멸의 눈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평생을 꿈꿔 왔던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맞잡은 손, 서로를 바라보는 눈, 애정 어린 말투까지. 율리나는 완전히 달라진 녹스의 태도에 어찌할 줄 모르면서도 여태 담아둔 말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대부분은 사랑 고백이었지만 녹스는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율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가 녹스 님을 사랑하게 된 건 필시 운명이었어요. 절 매몰차게 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졌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이유는 우리가 결국엔 이렇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그대를 내쫓을 때마다 늘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대가 또 홀로 방에 틀어박혀 눈물지을까, 그게 가장 걱정이었지.”
“녹스 님께서도 늘 제 생각을 해주신 거군요, 전 그걸로 됐답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둘은 제인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인지 계속해서 연인의 대화를 나누었다. 제게 집착하던 녹스가 갑자기 돌변한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었다. 자신을 놓아 주고, 둘이 행복했으면 그걸로 모두가 좋은 것이라고. 상처가 난 입술 틈으로 피식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녹스와 율리나는 이 더러운 다락방이 사랑을 이야기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동시에 일어나 다락방을 떠났다. 녹스와 율리나, 둘 중 누구도 초라하게 앉아 피가 굳은 딱지를 매만지고 있는 제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