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83)화 (83/95)

83화.

“어미나 자식이나 하여튼 손버릇은 남 못 준다니까.”

결국, 어머니까지 욕보인 유모가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입을 가렸다. 멜로디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서 쫓겨나면 굶어 죽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는 걸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신…손 대지 않겠습니다.”

의연하게 사과하고 붉게 올라온 뺨을 감싼 뒤, 뛰듯이 뒷문으로 빠져나간 멜로디는 딱히 갈 곳이 없어 문가를 서성였다. 누가 봐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는데도 함께 일하는 사용인들은 길을 막고 있는 멜로디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멜로디!”

부딪힌 어깨를 감싸고 벽에 붙어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혹시나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기대감에 얼굴을 들었다.

“이거.”

그러나 머리 위에 올라온 딱딱하게 굳은 빵이 차올랐던 기대감을 단숨에 짓눌렀다. 무겁지도 않은데, 무겁게 느껴졌다.

상처 받은 눈을 봤을 텐데, 부어오른 뺨을 봤을 텐데 그 사람은 그저 빵만 던져 주고 바쁘게 뒤를 돌았다.

방금 전까지 고급스러운 쿠키를 훔치려던 손에 수분기 하나 없는 퍼석하고 단단한 빵이 들려졌다. 오늘의 허기를 책임질 식사였다. 매일 이런 거나 받아먹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매일 내게 귀족 영애들이나 먹는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신 걸까? 우리 엄마도 나처럼 주방의 쥐새끼였던 걸까?

멜로디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천사님을 생각했다. 다락방의 천사, 다행히 어머니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지만, 천사님은 가까이 있었다.

* * *

“…어디 다쳤니?”

제인은 문을 열고 들어온 멜로디의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폭력의 흔적을 발견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락방을 들어오기 전까지 내내 죽상을 하고 있던 멜로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나이대에 맞는 활기찬 얼굴을 되찾았다. 어쩌면 걱정이 담긴 제인의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 걸지도 몰랐다.

멜로디가 단단하게 뭉쳐 있는 밀가루 덩어리, 오늘 하루 치의 식사를 책임질 빵을 건넸다. 내미는 손이 부끄러운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인의 시선을 억지로 회피했다.

“죄송해요, 맛있는 걸로 드리고 싶었는데.”

제인이 빵을 받지 않자 멜로디가 멋쩍은 듯 발끝을 올리면서 사과했다.

“…난 안 먹어도 돼.”

멜로디가 무슨 마음으로 건넨 지는 몰라도, 이것이 동정이 아닌 호의라는 걸 짐작한 제인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인간들은 날 이종이라고 불러, 그게 뭔지 아니?”

착잡한 심정으로 아이에게 현실을 알려 주는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네가 생각하는 천사 같은 게 아니라고, 내게 잘해 주면 안 된다고 모두 말해 버릴 심산이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전 종일 이거 하나로 버텨요. 숙식을 제공 받아서 봉급도 반 토막이고, 평생 이 가문에서 일해온 저희 엄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엄마가 오래 당신네 가문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재산은 그 사람들이 몽땅 가져갔는데, 장례 치를 돈이 없어서 엄마 시체는 쓰레기장으로 갔고요. 제 신세가 이종이랑 다를 것도 없죠?”

먼저 선수를 친 건 멜로디였다. 아이는 힘겹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 어제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이종이라는 건 이미 별장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저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요. 제 이름은 멜로디고, 엄마 말씀으로는 이 가문의 높은 사람이 지어준 거래요.”

속사포처럼 말을 뱉는 멜로디가 숨이 차는지 길게 호흡을 삼켰다. 갈비뼈가 크게 부푼 아이는 누가 들어도 안쓰러운 이야기를 꺼낸 직후인데도, 뭐가 좋은지 눈매가 잔뜩 휘어져 있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제인은 이 아이가 왜 제게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저 불쌍하죠?”

어쨌든 멜로디는 본론을 꺼냈다.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결의 동정을 받고 싶다는 게 본론이었다.

“…나는 제이나 숲에서 살았어. 그곳에서 잡혀 온 내 동족들은 그 숲의 이름을 따서 제인이라고 이름 붙여. 내 이름도 제인이야.”

누가 누가 더 불쌍한지 대결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멜로디는 제인의 옆에 나란히 앉았고, 제인은 머뭇거리다 아이의 작은 손을 느슨히 잡아 주었다.

“난 많은 인간의 손을 거쳤어, 처음엔 풀려날 거란 희망이 있었고, 그다음엔 매일매일 인간들을 저주했고, 또 그다음엔 죽어 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결국 죽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흘러왔지. 기회는 많았는데, 너무 억울하고 무서웠거든.”

이 아이가 뭐라고 속에 담긴 걸 멋대로 지껄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곧 눈도 멀고, 귀도 짓이겨지고, 말도 못 하게 될테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 삶을, 이 지옥을 뱉어 놓고 나면 속이 후련해 질테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속은 더 답답해졌다. 객관적으로 바라본 제 인생이 너무나 시궁창이여서, 이 어린아이 앞에서 괜히 울고 싶어졌다.

“죽지 마세요, 천사님. 달님이 슬퍼할 거예요.”

동화책의 내용을 모르는 제인은 멜로디의 생뚱맞은 말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두 눈덩이를 꾹꾹 눌러댔다.

“천사님이 울면 달님이 기적을 내려 준다는데, 진짜예요?”

질문에 멈칫한 제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멜로디가 또다시 물었다.

“달님이랑 대화할 수 있어요?”

어째서 갑자기 그가 생각났는지, 왜 커다란 달 아래 가면을 벗어내던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제인은 힘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달이랑 비슷한 사람은 있었지.”

* * *

제인이 이곳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율리나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뜰 때부터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유모도 그 장단에 맞추느라 부러 즐거운 척 살갑게 말을 붙였다.

“아가씨,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그럼, 당연하지. 아버지께 선물을 보내는 날인데. 얼마나 기뻐하실까!”

“원래도 강성했던 레이스 가문이 더 번창할 일만 남았네요, 아가씨.”

기도하는 것처럼 양 손바닥을 맞댄 율리나가 거울을 보고 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즐기고 있었다. 제인의 붉은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불티나게 팔릴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돈방석에 앉은 것처럼 돈 냄새가 풍기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도 갈 준비는 다 된 거지?”

“예, 아까 보니까 다 모여 있는 것 같던데 더 챙겨야 할 게 있나…. 다시 가서 확인해 볼게요.”

원래 업무가 아가씨의 뒤치다꺼리였던 유모가 병사들의 행동만 보고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율리나가 인상을 쓰고 한 마디를 얹었다.

“유모, 정신 좀 차려요. 옆에 있으면 나까지 짜증 난다니까.”

갓난아이 때부터 키워준 지긋하게 나이 먹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요, 내 정신 좀 봐. 그럼 다녀올게요.”

“여기로 오지 말고 다락방으로 와요, 노예도 챙겨 가야 하니까.”

유모가 나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문이 닫히자마자 침대 옆 서랍으로 다가갔다. 오래된 서랍은 문이 덜걱대느라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깊이 넣은 손에 잡힌 건 네모난 상자였다.

혹시를 대비해 아버지가 챙겨 주신 상비용 의약품이 가득 들어 있는 그 상자에서 율리나는 지혈제를 챙기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녹스를 만나러 갈 때만큼 즐거운 얼굴이었다.

“안녕?”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인사하고, 몸을 밀어 넣은 율리나는 제인을 보면서도 방긋 웃어 주었다. 어쩐지 불쾌한 기분에 제인은 그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시야 가득 얼굴을 내밀어 오는 탓에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차갑게 굴어? 우리 집 가면 지금보다 훨씬 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다니까.”

정말 서운하다는 듯 뾰로통하게 볼에 바람을 넣은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칼을 주워 왔다. 전의 광나던 칼날이 그새 먼지에 둘러싸여 빛을 잃었다.

“근데 수도에 들어가기 전엔 검문을 해서 말이야, 나는 노예 증서가 없거든.”

빈말로라도 능숙하다고 할 수 없는 솜씨로, 칼의 손잡이를 쥔 율리나가 망설임 없이 제인을 향해 겨눴다. 뾰족한 칼끝이 눈을 찌를 것처럼 다가와 제인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아, 눈이 아니라 여기.”

입술을 찌른 칼날에 피가 배어 나왔다. 여린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따가움에 몸을 뒤로 젖힌 제인의 머리가 율리나의 손바닥에 막혔다. 가는 팔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체중을 실어 밀어도 한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네가 도와 달라고 소리라도 지르면 큰일이잖아, 그렇지?”

먼지 낀 과도가 갈라진 입술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입안에 욱여넣어 질까 감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이 또 쏟아졌다.

“괜찮아, 지혈제도 있어. 안 죽을 거야.”

억지를 부리며 제인을 달래는 율리나의 고양된 기분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즐거워 보였고, 실제로 짜릿했다. 녹스 님이랑 바람난 여자가 인간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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