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엄마가 그랬어요, 외로운 사람이 있으면 곁에 있어 줘야 한다고.”
“외롭지 않아.”
꼭 감은 두 눈 위로 인상이 써졌다. 가슴에 걸린 응어리가 삼켜지지 않고 있다가 이때가 기회라는 듯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난 늘 혼자였어, 내 곁엔 항상 아무도 없었단다.”
제인은 그 말을 하면서 마네가…. 녹스가 떠올랐다. 지독하게 괴롭히던 그가 왜 떠올랐는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외로운 거 아니에요?”
아이답지 않은 수심에 잠긴 눈이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깃털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제인은 답하지 않았다. 멜로디는 대답 같은 건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소중히 들고 있던 깃털들을 바닥에 흩뿌렸다.
“천사님의 날개는 어디 갔어요?”
“인간이 잘라냈지,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아무리 어리다 한들, 자신이 주워온 깃털들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찾으러 돌아다닐 때도, 깃털에 묻은 흙을 털어 낼 때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제가 천사님을 돕고 싶어요.”
알고 있었지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모래 먼지 때문에 코 밑이 새카매질 때까지 뛰어다녔다. 단지 그 이유였다.
* * *
“대장님, 헤티아에게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급한 와중에도 전서구를 챙겨 데려간 헤티아는 약도와 함께 간략한 쪽지를 적어 보내었다. 곧 제인이 수도로 보내질 것 같으니 급히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제인….”
녹스는 율리나에게 분노하기보단, 제인을 걱정했다.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옷만 입혀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됐구나.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책에 상심이 커져만 갔다.
“루이스를 불러. 당장 출발한다.”
뜸들일 새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녹스가 옷걸이에 걸려진 케이프를 챙겼다. 셰이단은 그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잘 이해하면서도, 차마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루이스 경을 보내고, 대장님께선 성에 남아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리를 비우시면 병사들이 불안해할 거예요. 수도의 기사들이 죽은 건 아직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셰이단.”
가라앉은 목소리가 셰이단을 불렀다. 전처럼 명령조의 말투가 아니었다. 그보다 간절한,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약속하지.”
셰이단은 녹스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말뿐인 약속을 얻어낸 그는 하는 수 없이 녹스보다 먼저 나가 루이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네? 지금 당장요?”
하지만 충성에 목매는 루이스 또한 난색을 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곤란한 티를 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아마 곧 파수대 단장이 보고하러 갈 텐데…….”
“아직 전해 들은 건 없는데, 무슨 일이 있나?”
셰이단이 돌아오는 그새를 참지 못한 녹스가 기사 숙소 앞에 서 있는 그들의 뒤로 나타났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는지, 검까지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대장님. 방금 정찰 나간 파수대 말로는, 노스어 탈영병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안 좋은 소식이었다. 루이스는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듯 콧잔등을 쓸었고, 셰이단 또한 안경을 추켜올렸다. 녹스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응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루이스, 네 기사 모두 준비시켜. 제인의 행방을 알아냈다.”
“대장님!”
녹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셰이단이 반발하고 나섰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었다. 제인이 수도에 도착하면 더 이상 그녀를 되찾아올 수 없었다. 한 번 추방당한 수도는 녹스가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는 구역이었다. 이미 굳게 결심한 마음이, 엑젤리스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소식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 그 약속, 반드시 지키겠네.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령을 보내.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붉은 깃발을 올려.”
루이스가 어깨를 늘어트리고 기사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근심이 가득한 뒷모습을 보면서 셰이단이 타박하듯 읊조렸다.
“제인, 그 여자가 주인님껜 무척 중요한 존재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대신, 모든 게 무사히 해결된다면….”
셰이단이 몸을 돌려 녹스를 바라보았다.
“된다면?”
“제발 제 말 좀 들으세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지 마시고요.”
성질을 내는,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다. 단 한 번도 제 주인께 이런 식으로 말해본 적이 없는 셰이단은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놀라웠다.
“…셰이단. 혹여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부탁하겠네.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 말에 피식 웃어버린 녹스가 셰이단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했다.
* * *
“로난. 다락방 노예, 아버지께 데려다주고 오세요.”
손톱 관리를 받으며 반쯤 누워있는 율리나가 로난이라 불린 남자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레이스 백작 다음으로 권력 있는 아가씨의 말이었지만, 로난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병사 전원의 5일 치 식량과 말 10필, 마차 한 대를 준비해 주십시오.”
로난은 율리나가 제 약혼자를 만나겠다 떼를 쓰는 바람에 호위 목적으로 끌려온, 임시 경비 대장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불만은 백작도 아니고, 철부지 아가씨를 모시게 된 것에서부터 비롯된 짜증이었다.
소문으로는 짝사랑 때문에 매년 상사병을 앓는다던데, 로난은 그 한심한 소문의 주인공인 율리나를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5일? 수도까지 3일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하….”
철없는 아가씨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일부러 한숨을 흘렸다. 더 이상 멍청한 머리로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조목조목 반박해 주리라, 주인 아가씨의 머리 꼭대기에 앉을 생각을 대범하게 드러냈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 3일이면 가겠죠, 아가씨.”
반항적인 눈을 하고 어디 더 이야기해 보라는 눈빛에 율리나가 손톱 관리를 해주던 하녀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순진한 표정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마치 마녀처럼, 표독스럽게 변해갔다.
“잠도 자지 말고, 밥도 먹지 말라는 건데?”
밝고 경쾌한 목소리는 말에 담긴 살벌한 느낌을 지우기엔 버거웠다. 로난은 순간 겁을 먹었나 싶을 정도로 섬뜩했지만, 오히려 더 태연한 척 굴었다.
“하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저희보고 가다가 객사라도 하라는 겁니까?”
“무슨, 그럼 제가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요?”
분명 율리나가 한발 물러섰다고 생각한 로난은 이때다 싶어 요구를 더 했다. 그의 이기심이나 율리나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기보단 ‘경비대장’으로서의 당연한 요청들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노스어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희 병력으로 마주쳤다간 병사들도 그렇고 노예의 목숨을 보장하긴 힘들 겁니다. 용병이라도 붙여주셔야 그나마….”
그 말을 집중해서 듣던 율리나는 느닷없이 로난의 가슴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판금 소재의 갑옷이 텅텅, 하고 묵직하게 울렸다.
“밥값을 못하는 걸 알면 경비 대장님도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을 텐데요?”
“전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당연한 요구를 하는 겁니다.”
율리나도 이 가문에서 본인의 평판이 안 좋다 못해 바닥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귀족과 평민은 엄연히 다른 개체라 생각해, 굳이 제게 반발하는 고용인을 달래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율리나에게 도구, 그 이하의 존재였다.
“유모, 주방에 전해요. 식량 3일 치를 준비하라고.”
유치하게도 율리나는 표정이 어두워져 가는 로난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와 말 두 필. 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노예만 무사히 아버지께 데려다 놔요.”
모래바람이 한 시도 멈추지 않는 이 지역을 걸어서 가라는 말과 같은 소리였다. 유모는 발로 땅을 차며 불만을 표현하는 경비 대장이 안쓰러웠지만, 별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주방으로 자릴 옮겼다.
* * *
아직 식사 준비 전의 주방은 가까운 마을에서 공수한 재료들을 가져다 놓는 인원 말고는 한산했다. 멜로디도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상자를 낑낑대며 겨우 옮겨 놓고 상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재료들을 샅샅이 살펴보는 눈에 한 상자가 보였다. 열악한 주방 환경에 쿠키 등의 디저트를 구울 수 없어 외부에서 사들여 온 디저트였다. 어차피 이 시간이라면 올 사람도 없겠다, 멜로디는 자주 해 본 능숙한 솜씨로 딴청을 피우며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티 나지 않게 가져가기 위해 상자의 아래쪽까지 손을 넣은 순간, 벼락같은 호통이 들렸다.
“이 못 배워먹은 계집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주방에 율리나의 명령을 전달하러 온 유모였다. 그녀 또한 주인 아가씨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조금 전까지 시달려 온 스트레스 탓에 주방에 숨어든 쥐새끼에게 과도하게 폭발하고 말았다.
“도둑질이나 하고 사니까 네가 이 모양이지!”
폭발한 분노는 폭력이 되었다. 겨우 허리께에 닿을만한 멜로디의 뺨을 후려친 유모는 그걸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여전히 뜨거운 김을 뿜으며 씩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