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인은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태 누렸던 호사들을 뒤로하고, 다시 침묵하고 살아야 하는 환경. 한 번 풀렸던 목줄을 다시 채우려니 못 견디게 답답했다.
하지만 완벽한 절망은 없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희망은 생각보다 찬란한 빛을 띠진 않았지만, 어쨌든 존재하긴 했다. 자신에게 목매던 녹스가 오늘 밤에도 다시 찾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 어쩌면 오늘 밤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찾아와 ‘오늘도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나?’ 하고 태연히 묻지 않을까, 라는 희망.
끔찍하게 싫었던 녹스가 이젠 그녀의 실낱같은 희망이 되었다.
매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이 더 안 좋은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느 날 눈앞에 펼쳐진 높다란 하늘의 휘몰아치는 노을,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던 밤의 시장, 둥근 달이 떠오른 밤, 오색의 찬란한 꽃들, 아름답게 반짝이던 유일한 나의 것, 오랜만에 맡아본 숲의 향기는 놀랍도록 선명했다.
그 선명한 기억들은 애써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더러운 호수에 떠오른 연꽃처럼 계속 싹을 틔웠다. 연꽃은 더러운 호수를 빨아들였고, 억압당하던 기억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미화된 추억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오히려 손에 칼이 쥐어져 있음에도, 스스로 이 불행을 끊을 수 없게 만드는 독이었다.
목에 칼날을 겨눠도 봤지만, 다시 맛본 삶이 너무 괜찮았던 탓이었는지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녹스와 함께했던 그 시간은 죽을 용기마저 빼앗아갔다.
나는 결국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매번 목숨만큼은 살려 달라고 구걸한 삶이 결국 이런 모양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쓰레기처럼, 파도 앞에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제인이 얼굴을 감싸며 절규했다.
‘죽고 싶지 않아.’
그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 바람이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고, 남은 삶 때문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이유였다. 절규에 담긴 그 눈물겨운 마음을 어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또 홀로 남았으니까.
좀 더 그 사람 말을 잘 들었더라면, 웃어주고, 함께 대화하고, 다정히 굴었더라면, 가고 싶은 곳이 있냐 물었을 때 어디든 말했더라면, 그가 아픈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위로해 주었더라면….
제인은 좌절을 지나치고 나면 도돌이표처럼 녹스를 떠올렸다. 그에게 지겨운 장난감이 된 탓에 다시 팔려 온 자신을 탓하고 혐오했다.
‘차라리 그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녹스가 이 시궁창 같은 삶 속 유일한 차악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배는 정직하게 소리를 냈다. 허기에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아까 왔던 꼬마 아이가 두고 간 과자 조각에 눈길이 가 결국 한입에 털어 넣었다. 몇 번을 느껴도 지겹지 않은 달콤함. 오래되어 눅눅한 식감은 그 달콤함을 즐기는 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래 입에 머금고 싶어 한참을 씹었지만 결국 목구멍 뒤로 전부 넘어가 버렸다. 이 와중에도 살겠다고 뭔가를 먹고 있는 게 웃겼다.
가득한 허망이 결국 웃음으로 튀어나올 때, 혼자만 남아 있던 세상의 문이 열렸다. 농축된 복숭아향, 제인의 새로운 주인이었다.
“어머, 배가 불렀나 보네. 밥을 다 남기고.”
율리나가 문가에 놓여있는 감자 껍질이 수북한 그릇을 구두 끝으로 몇 번 치더니 못마땅하게 비아냥댔다. 대꾸할 기운도 없는 제인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결정은 했어?”
더러운 것이 묻을까,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앞까지 다가온 율리나가 제인의 턱을 붙들었다. 잘 관리된 손톱은 빛이 없는데도 광이 났다.
“…….”
이 다락방에 내던져지고 얼마 뒤, 그녀가 찾아와 칼을 건네며 한 말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새 주인은 참 자비롭게도 제인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네 손으로 할래, 내가 해줄까?’
바닥을 더듬거리는 손끝에 칼의 둥근 손잡이가 잡혔다. 당장 앞에 선 여자에게 찔러 넣을 수도 있지만, 학습된 패배감과 무력함은 무기를 겨눌 수 없게 했다. 어차피 안될 거야, 지능을 가진 짐승은 다루기가 더 쉬웠다.
“옳지, 그래.”
제인이 칼로 팔을 베었다. 마치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살며시 가로질렀을 뿐인데도 핏방울이 맺혔다. 몽글하게 올라온 것들이 한줄기씩 바닥에 떨어졌다.
“잘했어, 매일 이렇게만 해 주면 돼.”
떨어진 붉은 보석을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던 율리나가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귀한 것들이 왜 귀해졌는지 아니? 쉽게 볼 수 없어서 그래.”
보석들이 구두에 짓밟혀 가루가 되었다. 몇 번이나 짓이겨 뭉개진 조각들을 보는 율리나의 눈에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제인의 엉킨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읊었다.
“널 아주 귀하게 대접해 줄게, 둘도 없는 우리 레이스 가문의 파트너가 될 거니까.”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율리나의 하얀 손가락이 박혔다.
“대신 네 눈을 파낼 거야, 달군 쇠꼬챙이로 고막을 지져 버릴 거야, 혀를 뽑아낼 거야.”
제인이 내리깐 눈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두어 번의 깜빡임 끝에 율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뭘 놀라고 그러니?”
“…도망가지 않을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도망가고 싶으면 가봐, 너 하나 잡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럼 왜?
얼빠진 얼굴에 율리나가 머리카락에 박아넣은 손가락으로 제인의 머리를 빗질했다. 엉키고 설킨 머리카락들은 부드럽게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뽑혀나갔다.
“내 약혼자를 더 눈에 담을 수 없게, 그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게, 녹스 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더 이유가 필요해?”
“그 사람이랑은 아무런…….”
아무 자극도 없는 어둠 속에 평생 고립된다 생각하니 벌써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둠은 지독히도 끈적거려 한 번 발목이 빠지면 머리끝까지 송두리째 집어 삼켜진다는 걸, 제인은 잘 알고 있었다. 나 자신조차도 누군지 잊을 정도의 깊은 어둠, 그런 걸 평생 감내할 자신 따위 없었다.
“으음, 발뺌할 생각하지마. 죽이고 싶어지거든.”
쉿, 율리나가 손가락을 제인의 입술 위에 올렸다. 억눌린 목소리는 극도로 분노를 참고 있었다.
“네가 협조만 한다면 그리 못살게 굴진 않을 거란다. 넌 엄연히 돈이 되고, 난 돈을 좋아하거든.”
제인의 팔 안쪽, 아직도 피가 맺히고 있는 길게 늘어진 상처를 손톱이 파고들었다. 손가락과 손톱 사이에 선홍빛 피가 스며들어 작은 알갱이가 들러붙었다. 제인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고작 이런 게 아프니?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는데.”
손톱 아래에 박힌 붉은 보석을 음미하듯 씹어버린 율리나는 독기 가득한 뱀의 눈을 하고 있었다. 먼지 한 줌만큼도 남지 않은 제인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아, 난 이제 이 사람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겠구나.
아슬아슬한 마음은 결국 뱀의 권력에 순종하고 말았다.
* * *
멜로디는 땅에 떨어져 있는 오래된 깃털들을 하루 내 잔뜩 모았다. 살아있는 생명을 찾기 힘든 이 불모의 땅에서 깃털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천사’를 위해서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언제쯤 틈을 타 다락방에 올라가면 좋을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유모님이고 경비병들이고 모두 새로 온 지 얼마 안 된 이 별장에 적응하기 바빠 보였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멜로디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창 어른들의 관심이 고플 나이인 멜로디는 종일 심부름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말도 붙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서운했으나,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었다.
“저, 안녕하세요.”
제인이 있는 다락방은 한 층 더 더러워져 있었다. 먼지 쌓인 바닥에 찍히는 발자국을 보고 으으, 하고 이상한 신음을 낸 멜로디가 종일 처음으로 웃었다.
“천사님, 이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인은 자신이 천사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바로 곁에서 살갑게 다가오는 멜로디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싫지 않니?”
델단이 떠올랐었다. 어째서 이 작고 왜소한 아이에게 그의 모습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멜로디가 지어준 미소는 그처럼 따뜻하고 편견이나 가식 따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천사님이 왜 싫어요?”
오히려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멜로디는 반박하기 시작했다.
“천사님은 착한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잖아요.”
그 반박을 듣자마자 이 아이도 델단처럼 힘든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겠거니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볼품없는 꼴을 한 노예에게 소원 같은 소리를 하면서 천사라고 부를 리 없을 테니까. 인간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지만, 이 어린애가 델단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제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천사가 아니야. 난 너와 다른 종족, 인간들이 노예로 부리는 것들이야.”
멜로디는 그 절절한 고백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난 천사가 아니야.”
그런데도 제인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그 아이도 고집을 꺾지 않고 아까보다 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제인은 더 아무 말도 꺼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애를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