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80)화 (80/95)

80화.

“용케도 구해왔네.”

“…네.”

애써 수고했다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참았던 분노가 모두 열기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그는 차가웠다. 낮게 가라앉은 그 느낌에 셰이단은 감히 위로할 생각조차 못하고, 얌전히 그의 곁을 지켰다.

녹스가 동화책 표면을 쓸자 손가락 끝에 물감이 묻어났다. 검정과 가까운 그 남색의 오래된 물감에 제인이 떠올랐다. 도망가면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고 했는데, 기어코 또 내 손에서 벗어났구나. 마음을 얻기도, 곁에 두기도 참 번거롭다. 손에 묻은 물감처럼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렸을 적에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 다 커서 읽는군.”

피식 웃는 그 웃음은 건조했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자 먼지가 일고, 조잡한 삽화와 함께 멋들어진 필체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 어느 먼 옛날, 지상에 내려가 세상의 모든 걸 살피라는 신의 뜻을 따른 순백의 천사가 있었어요.

처음 디딘 땅은 촉촉한 흙냄새와 향긋한 풀 내음이 가득했고, 광활한 하늘엔 눈부신 태양이 떠 있었죠. 해가 떠 있는 세상은 너무나 따뜻하고 밝아 살아있는 모든 것이 태양을 좋아했고, 아름다움을 찬양했어요. 천사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낮 동안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태양이 산등성이로 가라앉았어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밤이 찾아왔죠, 어둡고 추운 밤에는 커다란 달이 떠올랐습니다. 달은 ‘안녕.’하고 인사했어요. 그러나 모두 달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달은 매일 인사를 전했어요. 외로웠거든요. 처음 달을 본 천사는 물었어요.

넌 누구니?’

달은 덤덤하게 자신을 소개했어요.

‘난 달이야, 태양처럼 밝은 빛을 내지도 못하고, 햇볕처럼 따뜻하지도 않아. 모두가 날 좋아하지 않아.’

천사는 달을 위로했어요.

‘난 널 좋아하게 될 것 같아. 넌 태양보다 아름답고, 햇살보다 눈 부셔.’

달과 천사는 둘도 없는 친한 사이가 되었어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걸 살피라는 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일어나게 된 천사는 순백의 날개와 태양을 닮은 눈을 잃는 벌을 받게 되었답니다.

‘나 때문에 네 하얀 날개와 따뜻한 눈을 잃었구나.’

‘괜찮아. 대신 밤하늘을 닮은 날개와 눈이 생겼어.’

하지만 달은 천사가 색을 잃어 볼품없어진 날개를 보며 낮 동안 눈물로 지새운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달은 천사가 슬퍼할 때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천사는 늘 달과 있을 땐 행복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달은 천사에게 선물을 주었답니다. 천사의 눈물이 떨어지면 행복해지는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선물을요……. 」

녹스는 동화책을 읽고 나서야, 제인이 ‘이 램프에 백 일 동안 소원을 빌고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 이뤄 줄게요.’라고 한 말의 뜻을 짐작했다.

* * *

멜로디는 레이스 가문의 하녀장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3년 전부터 하녀가 되었다. 추천서를 써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했던 그녀를 레이스 백작이 거둬준 덕이었다. 그러나 멜로디는 그에 대해 하나도 감사한 마음이 없었다. 매일 이를 갈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고용인이었다.

평범하게 나고 자란 그녀가 귀족의 권위에 도전한다던가, 계급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20년을 넘게 레이스 가문에 헌신한 어머니가 아프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결국에야 병으로 사망했다는 참으로 신파적이고 진부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하녀장이었음에도, 멜로디는 일손이 똑 부러지지 못해 늘 잡일을 하는 처지였다. 오늘도 주방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을 때쯤, 평생 주방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하던 아가씨가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도 복수 같은 건 꿈에도 못 꾸던 멜로디는 아가씨의 등장에 깍듯하게 인사했다.

“으응, 혹시 칼…같은 거 좀 줄 수 있니?”

율리나는 대뜸 칼을 찾았다. 종종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아가씨께 당연히 그런 위험한 물건은 주면 안되지만, 멜로디는 잠깐 고민하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흥, 이참에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날이 잘 선 과도를 건네주며 든 생각은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리고 다락방에 있는 노예한테 밥 좀 챙겨 줘, 대충 남은 거 가져다주면 될 거야.”

율리나는 그 말을 남기고 과도를 챙겨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떠났다. 그녀의 등장으로 찬물을 끼얹듯 싸해진 주방이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락방에 있는 노예한테 밥을 챙겨 주라는데요?”

다듬던 채소 바구니를 들고 주방장에게 율리나의 말을 전하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건넨 접시는 줘도 안 먹을 감자 껍질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멜로디는 밥을 가져다주기 전에 농땡이를 필 요량으로 인기척이 없는 곳을 찾아 헤맸다.

수분이 촉촉했던 감자껍질은 바깥바람을 쐬면서 점점 건조해졌다. 여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제인에겐 불행이었지만, 멜로디는 그녀의 사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노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감자 껍질을 받아 챙길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멜로디는 구석에 숨어 몰래 훔쳐놓은 간식거리를 꺼냈다. 늘 입고 다니는 하녀복 안쪽에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쿠키 같은 게 있으면 챙겨 넣곤 했는데, 먹을 때쯤이 되면 모두 바스러져 있지만, 맛은 달콤해 주방에서 일하는 게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일과 후 이불 속에서 만끽할 한 입을 남겨둔 멜로디는 가루가 낀 손을 털어 정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락방으로 향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별장의 분위기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음산해졌다. 다락방은 꼭대기 층 가장 마지막 구석, 인원이 부족해 청소하지 않은 방 중 하나였다. 인기척이라곤 없는 방 앞에 문이라도 열었다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멜로디가 앞치마에 연신 손을 닦으며 갈등하고 있었다.

‘어차피 노예라며? 그럼 한두 끼 정도는 굶어도 되잖아. 혹시 밥을 안 준 게 들통나면 혼날 텐데….’

여러 갈등이 지속하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밥…. 이요.”

고개를 빼꼼 열고 그릇을 던져둔 채 돌아가려던 멜로디가 닫으려던 문을 미처 닫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제인을 쳐다봤다. 감격, 감동, 감명…. 멜로디가 제인을 본 첫 감상은 그런 장르였다.

“천, 천사다…!”

대뜸 천사라고 소리 지른 멜로디가 몸으로 문을 밀치고 기듯이 들어와 제인의 앞에 무릎 꿇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 하얀 피부, 무엇보다 아름다운 외모. 어린 시절 어머니가 늘 읽어주시던 동화책 속 천사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빛내는 멜로디는 제인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천…사님?”

앞에서 떠드는 말들을 듣고 있지 않은지 눈동자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제인의 시간은 홀로 멈춘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모조리 바스러질 모래성 같은 모습에 멜로디가 뒤로 물러났다. 감자 껍질이 수북이 담긴 그릇이 발꿈치에 부딪혔다.

“앗, 이거….”

천사에게 대접할 식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누추한 그 그릇을 발로 더 밀어 문 앞에 내몰아 둔 멜로디가 속주머니에서 바스러진 과자 한 조각을 꺼내 제인의 앞에 두었다.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임에도 스스럼없이 주는 모습이, 이제 12살이 된 멜로디가 제인과 만남을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천사님, 날개는 어디 숨기신 거예요?”

천사라면 응당 있어야 하는 날개가 아무리 둘러봐도 없자 의아하게 물었다. 이미 그녀가 옛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천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제인의 어깨 양쪽을 두리번거리던 멜로디의 눈이 자연스레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제인의 손으로 향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손바닥 위엔 오늘 아침 감자를 깎을 때 썼던, 주인 아가씨에게 드렸던 작은 과도가 올라가 있었다.

“이게 왜 여기…?”

다시 멜로디의 눈에 천사의 얼굴이 비쳤다. 퀭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초췌한 얼굴엔 어머니가 알려 주셨던 화사한 미소 같은 건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쌕쌕거리는 얕은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은 게 아닌지 오해할 뻔했다.

“천사님?”

위험해 보이는 칼날을 멀리 치우고 손바닥에 과자 조각을 올려놓자 제인이 드디어 눈알을 굴려 멜로디를 올려다보았다. 생기라곤 전혀 없는 죽은 눈이 싸늘하게 느껴져 등골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 싸늘한 눈과 마주친 잠깐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진 멜로디는 다급히 방을 떠났다.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나가는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뒤로 멜로디는 종일 바깥을 돌아다니며 깃털을 주웠다. 천사가 다시 날개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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