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화초처럼 자란 아가씨께서 이런 곳에서 지내실 수 있으실지,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됩니다.”
유모라고 불린 중년 여자는 율리나가 마차에 내리자마자부터 줄곧 그녀의 옆에 들러붙어 종알거렸다. 건물 앞에 다다른 율리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유모, 마차 의자 밑에 노예 하나 들어 있어요. 우리 사업에 아주 중요한 거니까 깨끗이 씻겨서 내 방 옆에 가져다줘요.”
“예, 준비해 놓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어서 가서 쉬세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율리나가 별장에 들어갈 때까지 인사를 하고 있던 유모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싸늘하게 고개를 들고 다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엔 율리나와 함께 엑젤리스에 갔었던 하녀가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휴, 망할 년. 뭐가 있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꼭 일을 두 번 하게 한다니까.”
“그러니까요. 계시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어요?”
“별일은 무슨, 저 망할 년이 또 유난 떨어댈까 봐 허리 부서지게 청소했더니 삭신 쑤시는 거 말곤 일도 없어.”
마차 앞엔 마부가 앉아 있었는데도 하녀와 유모는 자연스럽게 주인 아가씨인 율리나의 험담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저도 가서 고생은 죄다 도맡아 했어요. 그 옷 있죠? 분홍색 드레스.”
“맞아, 그거 입고 갔었지? 귀족만 아니었으면 마을에 머리 꽃 달고 돌아다니는 미친년이랑 다를 것도 없다니까.”
유모의 농담에 과장해서 웃던 하녀가 혀를 차더니 그간 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드레스가 어렸을 때 약혼자 처음 만난 날 입었던 거랑 같은 디자인이라면서요?”
“응. 아마…7살이었나?”
율리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돌봐왔던 유모가 한참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그렇게 아끼면 간수 좀 잘하지! 제 잘못으로 드레스에 뭐가 묻었는데, 오밤중에 저보고 그걸 세탁해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가뜩이나 추워 죽겠는데 밤새 찬물로 빨래했다니까요.”
하녀가 어젯밤의 피로가 쏟아지는지 턱이 빠지게 하품했다.
“어머, 진짜 미친 악덕 주인이 따로 없다니까. 그나저나 뭘 가져왔다던데, 뭔지 알아?”
“아, 의자 밑에 있어요. 열어 보세요. 약혼자가 데리고 있던 노예인데…말도 없이 가져와서 괜찮으려나 모르겠어요.”
유모가 의자 밑쪽으로 손을 넣고 뭔가를 잡아당기자 의자의 윗부분이 덜컥 소리를 내며 틈이 생겼다.
“그 약혼자도 완전 미친놈이 따로 없던데, 미친년이랑 잘 어울리겠네.”
짐을 다 챙긴 하녀가 먼저 들어간다고 저택으로 향하고, 열린 틈에 손가락을 넣고 뚜껑을 열던 유모는 갑자기 꽥 소리를 질렀다.
“엄마, 깜짝이야!”
안엔 기괴한 자세로 구겨져 있는 제인이 마른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미약한 숨이 몸을 조용히 들썩이지 않았다면 시체로 오인할 정도였다.
“어휴, 시체인 줄 알았네.”
유모는 가슴께를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제인의 엉키고 설킨 머리카락을 한 줌 가득 쥐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두피를 잡아당기는데도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곧 죽겠구먼.”
혼잣말을 중얼댄 유모가 억척스러운 힘으로 제인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겨우 의자 밑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똑바로 걸어, 어디서 이런 망측한 걸 주워 와선.”
겉보기엔 인간 같아 보였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 보니 이종이 맞다고 여긴 유모가 거친 말투로 제인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있어라.”
오래 사용하지 않은 호스로 연결한 물에선 녹슨 물이 쏟아져 나왔다. 붉고 누런 물이 제인의 벗은 몸에 들이부어 졌다. 비린 쇠 냄새가 풍겼다.
“뒤돌아.”
그저 시키는 대로 팔을 들고 한 바퀴 돌고, 머리를 숙였다. 물이 차가워 온몸을 할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제인은 아프다는 생각조차 머리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파랗게 변하며 덜덜 떨리는 입술만큼은 그녀가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변했다. 제인을 다 씻긴 유모는 그녀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버린 뒤 때가 덜 타는 갈색 원피스를 입혔다. 참 볼품없는 모습이 누가 봐도 천하게 대할 법했다.
따라오라는 말에 기척도 없이 유모의 뒤를 따라간 제인은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다락방을 배정받았다. 율리나는 제 옆 방에 데려다 놓으라 했지만, 몰래 데려온 노예라는 소리를 듣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기려는 유모의 노력이었다.
주변에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어 다락방의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은 경치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제인의 흥미를 당기지 못했다. 그녀는 유일한 취미였던 바깥 구경도 잊고, 그저 구석에 주저앉아 넋을 놓은 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 * *
제인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녹스가 성으로 복귀하자마자 밝혀졌다. 복귀하는 인원에 제인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경비대 중 한 명이 녹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한 새벽에도 낮처럼 밝혀진 엑젤리스 성의 모든 인원이 동원되어 제인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마차의 바퀴 자국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도망치듯 떠난 율리나와 사라진 제인, 당연히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해일러는 해가 뜨자마자 비예단에게 율리나의 소식을 전했다.
‘추천서는 없었던 일로 하겠답니다.’
비예단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로 제인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알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임무는 제인을 성 밖으로 데려다주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눈치챘다. 비예단에게 장소를 알려주기로 한 율리나는 배신했고, 제인의 행방이 모호해졌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투구를 쓴 병사가 제인과 함께 밤 중에 나갔다 했으니 당연히 모든 병사가 심문을 받았다. 그 중엔 해일러도 있었지만,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모른 척을 했다. 붉은 머리를 투구로 꽁꽁 감추었으니 범인이 자신이라는 걸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들키지 않을 거란 예상은 결국 녹스의 앞에선 오만이었다.
“해일러.”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있는 그는 수많은 병사들을 심문하는 동안 가면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에 적대감이 보였다. 해일러는 이실직고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지, 꿋꿋하게 입을 다물었다. 결국, 녹스가 먼저 운을 떼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측근의 목을 베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대가 비예단과 함께 있는걸 봤다는 정황이 꽤 많아. 비예단과 율리나가 함께 있었던 걸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 비예단이 멋대로 찾아온 것뿐입니다.”
“제인을 도망치게 한 것도 자네 멋대로 벌인 일인가?”
이미 용의자가 아닌 범인으로 해일러를 상대하고 있었다. 살의가 느껴지는 냉대에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이 지난 잘못을 후회하고 있었다.
금세 들통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비예단과 대화 몇 마디 했다는 걸 증거로 잡기엔 그저 심증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볼까. 해일러는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귓가에 따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책상 위에 있던 촛대가 어느샌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해일러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정신도 없이 녹스의 검이 어디 있는지를 떠올렸다. 집무실이니 검을 차고 있진 않을 것이다.
당장 죽지는 않겠구나. 그 순간만큼은 녹스가 검이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미 헤티아가 제인을 뒤따라갔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제인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헤티아는, 이미 어젯밤 녹스의 책상에 짧은 쪽지를 남긴 채 제인을 뒤쫓았다. 해일러는 그제야 지난 밤, 제가 무슨 쓸모없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내가 그대를 더 봐줘야 할 이유가 있나?”
“……. 없습니다.”
대장님이 소문처럼, 제인을 사랑하게 되신 걸까.
해일러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헤티아는 꽤 유능한 기사였으니, 그녀가 따라갔다면 반드시 제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비예단도 제인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울며불며 녹스에게 매달릴 것이고. 제인도, 비예단도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이렇게 분노할 이유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자신이 잘못을 안 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감정은 순수한 분노라기엔 어딘가 겸연쩍은 부분이 있었다.
슬픔, 절망, 후회……. 다양한 것들이 느껴졌다.
해일러를 쫓아내다시피 내보낸 뒤에도, 녹스는 불편한 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의자에 기대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셰이단이 조용히 집무실로 들어와 인기척을 냈음에도 녹스는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주인님, 지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셰이단이 수심에 잠긴 녹스 앞에 작은 동화책을 내밀었다. 어쩌면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위기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고 저지른 행동이었다. 색이 다 벗겨진 남색의 동화책은 커다란 달이 하나 그려져 있었고, 제목은 칠이 벗겨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