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사실, 제 사랑을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본인이 뱉고도 부끄러운지 비예단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튀어나온 귀는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사랑…. 말입니까?”
“제인을 도망치게 해주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비예단이 들고 온 건 도와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었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해일러는 고민도 없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같이 도망칠까 그러시죠? 녹스 님께 도움도 안 되고, 제인만 데리고 도망칠까 봐.”
왜 자신이 엑젤리스에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그 말은, 비예단이 슬쩍 던져본 것이었다. 뭐로 쓰든 간에 제 능력이 유능한 건 맞으니 녹스도 자신을 필사적으로 데리고 있으려 할거라는 추측에서 나온, 얼추 정답에 근접한 말이었다.
“…….”
“한 번만 믿어주세요. 저 정말, 빼내 주시기만 하면…. 각하께서 죽으라 하셔도 죽을게요. 제인과 행복해지겠다, 뭐 그런 유치한 부탁이 아니에요. 그냥, 제인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새장에 갇혀서 날지도 못하고…….”
다시 감성팔이의 영역으로 돌아가 눈물로 애원하는 모습을 해일러는 힘겹게 거절했다. 눈물에 약하구나, 비예단은 눈물을 뽑아내면서도 그런 약은 감상을 했다.
“믿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전 같이 안 갈 거예요, 제인만 몰래 꺼내 와 주시면 저는 제 방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을게요. 그 뒤로 하루종일 감시를 하시던, 전혀 불평하지 않을게요.”
정중하게 고개 숙이고 사과를 전한 해일러는 비예단의 불쌍한 얼굴을 더 보고 있다간 마음이 약해질까 서둘러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비예단은 포기하지 않고 바짓가랑이 붙들 듯 해일러의 팔을 잡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성질의 갑옷이 손바닥에 난 땀에 닿아 미끄러졌다.
“제가 모두 책임질게요, 해일러 님이 그랬다고 절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을게요.”
“하…….”
만일 들킨다면 그저 혼나는 걸로 끝나는 사안이 아니었다. 추방당해 더는 엑젤리스에 발도 못 붙이거나, 어쩌면 녹스의 검에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예 못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을 빼내려면, 그녀를 데리고 가는 병사 혹은 기사가 필요했고, 멀리 가는 경우엔 투구를 쓰는 게 기본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체격은 건장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여자인 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 한 번 해 보자. 해일러는 제인의 상황이 부조리하고, 안됐다는 생각보단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해주는 심정으로 그들을 돕기로 했다.
“오늘 대장님이 황무지에 발견된 시체를 보러 가신다고 하셨으니, 오늘 밤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오늘 밤에도 녹스가 올 거라 예상했던 제인의 예상을 깨고, 그보다 조금 늦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해일러가 아직도 대장에게 불려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성의 경비인력들은 그녀가 늦은 시간에 성에 왔어도 별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인의 방을 지키는 경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해일러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위해 인사를 전했다.
“…….”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해일러가 인사를 했던, 갑자기 와서 끌고 갔던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제인은 영혼 없는 멍한 눈으로 낯선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 측은한 눈빛 때문이라도, 해일러는 그녀를 도와주는데 후회하지 않았다.
“따라오십시오.”
방문을 살짝 열자 유령처럼 걸어가는 제인의 걸음은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의심 받으면 어쩌나 했던 고민은 다 쓸데없었다. 해일러가 느끼기에는, 제인은 모든 걸 체념한 것 같았다.
“정지, 신분을 밝히십시오.”
투구까지 쓰고, 손님을 데리고 나오니 여간 수상해 보인 게 아니었는지, 성문 앞의 경비대가 해일러를 멈췄다. 그녀의 뒤에 따라오고 있던 제인을 주변 시선들이 힐끔대며 보고 있었다.
“저게 그 3층의…….”
“인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쑥덕대는 소리는 숨길 생각조차 없었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바로 들려왔다. 해일러가 등 뒤로 제인을 감추면서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대장께서 모셔오라 명령하셨습니다. 지체되어 혼이라도 나게 되면 당신들 탓을 해도 되는 겁니까?”
대장이 황무지로 나가 있다는 말을 낮의 경비대와 교대하면서 들은 바가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을 받을 구석은 없었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유의 떨림까진 멈출 수 없는지라 해일러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제인은 그녀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말을 타고 갈 생각이시다면, 마구간 지기는 지금은 자고 있을 겁니다.”
경비대는 대장의 이름이 나오는 즉시 성문을 열었다. 녹스와 제인이 밤마다 만난다는 건 이미 성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니, 그들은 해일러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둘은 의심 없이 빠져나왔다. 해일러는 거리가 한참을 떨어지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사용인들이 다 잠들면, 성문 밖으로 제인을 데리고 나와 주세요. 그거면 돼요.’
‘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에 제인을 풀어 주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아뇨,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요. 그분의 거처로 제인을 옮길 거예요.’
비예단은 분명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저 여자일 줄이야. 신전 사람이 도움을 주러 나올 거라 예상했었던 해일러는 멀리서 보이는 분홍색 마차를 보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쩐지 그 ‘믿을만한 사람’이 누군지 절대 말해 주지 않더라니. 믿을 사람이 없어서 저런 여자를, 제인을 데리고 다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안 가고 뭐 하세요?”
뒤에서 들리는 가식 섞인 목소리가 역겨운 복숭아 향을 타고 흘렀다. 율리나, 녹스에게 폭언하던 이 여자에게 해일러는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애께서는 염탐하는 취미도 있으신가 봅니다.”
“염탐은 무슨, 전 계속 여기 있었는걸요. 당신이 방금처럼 돌아갈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입으로 꺼낸 적 없는 생각을 읽혔다는 게 불쾌했다. 독심술이라도 쓰나, 해일러가 뒷걸음질 치며 제인을 보호하려 했지만, 제인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전혀 협조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뿌리박힌 듯 뒤로 살짝 밀었는데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 이종, 내 별장에 묵기로 했어요. 그 사제가 어찌나 부탁하던지.”
율리나는 거침없이 다가와 제인의 손목을 거칠게 쥐었다. 이 여자를 정말 믿는 건가? 비예단의 계획이 엉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율리나가 끼어들 줄은 전혀 몰랐던 해일러는, 여기까지만 관여하자고 내적 갈등을 갈무리했다.
“데려가십시오. 비예단에게도 말했듯,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마지막 입단속을 시키고 돌아가려는 때, 율리나가 마차로 향하다 말고 뒤돌아 말했다.
“그 사제한테 전해요, 추천서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율리나와 비예단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해일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다른 지옥으로 향하는 마차에 태워 제인을 보내고 말았다.
* * *
제인이 정신을 차린 건 반나절은 지난 후였다. 눈을 뜨자 펼쳐진 깜깜한 어둠에 덜컥 공포심이 느껴졌다. 구부러진 팔다리가 단단한 판자에 가로막혀 펼쳐지지 않았다. 팔꿈치와 무릎이 까슬한 것에 쓸려 따가움이 느껴졌다.
성의 없이 구겨져 수납된 자세가 불편해 몸을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조금의 여유 공간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죽어서 관에 드러누운 걸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먹먹해진 귓가에 말발굽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녹스가 자신을 도로 팔아 치워서 다른 주인에게로 이동 중이라고 짐작했다. 다 가지고 논 장난감을 도망가지 않게 잘 포장해서 어딘가로 배달 중이겠거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어차피 의지대로 흘러가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삶에 생각을 가지면 괴로운 건 자신 뿐이었다.
제인은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벽에 머리를 박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보는 풀린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 관을 닮은 상자에 잘 어울리는 산송장이었다.
“어머, 우리 아가씨 일찍 오셨네요!”
제인이 실려있는 자라는 서너 시간을 달려 마치 휴양지에나 있을법한 백색 벽돌의 저택 앞에 멈췄다. 오래전, 이 지역이 황폐해지기 전에 누군가가 사용하던 별장이었다. 벽에 금이 가고, 담쟁이덩굴이 건물을 뒤덮은 채 삭아 있었지만 율리나에겐 행운을 불러다 주는 사랑스러운 별장이었다. 전 주인이 못 쓰는 건물이라 여겨 헐값에 구매한 데다, 사업에 도움이 될만한 노예까지 구하고, 사랑해 마지않은 피앙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니! 이만큼 완벽한 별장이 없었다.
“응, 유모! 여기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매입한 뒤 처음 와보는 별장은 메말라 가고 있는 작은 호수를 끼고 있었다. 그것마저 율리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어차피 녹스에게 쫓겨날 걸 예상하던 그녀는 이왕 여기서 지내는 거 즐겁게 지내자며 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