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뻔하군.”
“탈영병들이 저지른 게 확실합니다. 저희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좀 더 강력하게 방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셰이단이 말을 얹었다. 방어를 더 견고하게 하자는 의견은 당연히 옳은 소리였지만, 엑젤리스엔 그만한 병력이 부족했다. 녹스가 그간 무수하게 쌓아 올린 악명과 지리적 이점으로 넘보는 사람이 없어진 엑젤리스의 고질적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셰이단의 기도가 통했어.”
‘노스어 탈영병들이 내려오고 있는 병사들을 싹 쓸어 버리길 기도하는 방법도 있겠죠.’
셰이단은 수도의 서신을 전달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이마를 짚은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봐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야. 운이 좋았네.”
“제 기도가…. 번번이 운이 따르는 편이긴 하죠.”
“자네가 내 행운의 부적 노릇을 하고 있었나 봐. 죽기라도 한다면 머리통을 잘라 트로피를 만들던가 해야겠어.”
책상을 두드리는 박자가 점점 빨라졌다. 비록 이름뿐이지만, 엑젤리스의 책임자인 그는 늘 큰 문젯거리에서 해결의 주체가 되는 걸 꺼려왔다. 이번에도 그는 회피하는 걸 선택했다.
“시체엔 손대지 마. 황실에서 해결하게 두고, 우린 모르는 일인 걸로.”
“수도에 보고해야 할 사안 아닙니까?”
잘 못 들은 게 아닌지 헷갈리던 단장이 의견을 고수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이었다.
“직접 가서 본 후에 다시 생각하지, 셰이단은 기다리고.”
셰이단은 그의 외출을 도우려고 곧바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녹스의 명령에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파수대 단장은 그래도 대장의 밑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집사더러 남으라 했으니, 어떻게든 해결할 방도를 모색하려는 것이라 여겼다. 그나마 염려되는 마음을 갈무리하고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주인님. 곤란한 상황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감히 의견에 첨언하자면…….”
문이 닫힌 걸 확인한 후 셰이단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녹스에게 다가갔다.
“첨언은 나중에. 그보다 구해올 게 있어.”
서랍에서 꺼낸 종이엔 매주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에서 장사를 허가받은 상인들의 목록이 적혀있었다.
“동화책을 판매하는 장사꾼이 있더군.”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 셰이단이 안경을 치켜세우고 다시 물었다.
“동화책이 지금…. 무슨 상관인 거죠?”
“제목은 ‘천사의 밤’. 최대한 서둘러 구해 와.”
막무가내로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할 말도 못 하고 쫓겨난 셰이단의 속이 썼다. 처음엔 작은 막사로 꾸려나가던 엑젤리스가 이렇게 커졌으니 녹스도 어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길 바랐지만, 그가 왜 부담을 느끼고 불편해하는지 알고 있어 감히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대로 엑젤리스가 없어지길 바라시는 건가.
셰이단이야 녹스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이니,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지내는 마을 주민들, 녹스를 믿고 따르는 기사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 *
율리나는 어제 못다 한 분풀이를 엉뚱한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
“그 계집은 대체 언제부터 끼고 살았던 거죠?”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분풀이의 대상은 비예단이었다. 고분고분 그녀의 불평을 들어주고 있는 그는 날이 갈수록 늘어난 연기력 덕에 율리나의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모두 공감해 줄 수 있었다.
“저야 이미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라 걱정할 건 없지만, 이러다 녹스 님의 위신이 떨어질까 문제네요.”
떨어질 위신이라는 게 있나, 싶었지만 비예단은 철저히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율리나의 말에 모두 동의를 표했다.
“전혀 몰랐어요, 약혼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을 안 꺼내셨으니….”
율리나가 양산을 건네준 하녀를 멀리 물리고, 양산을 몇 번 돌리다가 이내 접어 버렸다. 쨍쨍한 햇빛에 율리나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희게 반짝였다. 치켜뜬 눈매가 비예단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잠시 가문 간의 문제 때문에 냉전 상태인 것뿐이에요. 녹스 님과 제 사이를 의심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저는 곤경에 처하신 듯 하여 도움을 드리려고…….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연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비예단이 그녀의 책망에 눈망울을 촉촉이 적시며 사과했다. 몇 걸음을 걷던 그들은 근처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역시 사제님이셔서 그런지, 마음 씀씀이가 유달리 친절하시군요.”
유독 비예단에게 바짝 붙어 앉은 율리나가 아까의 매서운 말투는 어디 가고, 수줍게 비예단을 칭찬했다.
“네…? 아, 아뇨.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얀 사제복 위로 율리나의 말랑한 손이 올라왔다. 가깝게 앉은 이유가 이거였네, 비예단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지만, 율리나는 그 웃음이 그저 부끄러움에서 나온 것이라 착각했다.
“겸손함까지 갖추시다니, 제가 아버지께 부탁해서 신전에 추천서를 써 드릴 수도 있어요, 물론 수도에요.”
“그러실 필요는…….”
비예단은 사제복이 긴 팔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역겨운 가식 덩어리 여자의 손이 피부에 닿을 뻔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엉덩이를 슬슬 옆으로 빼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는 그에게 율리나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 여자, 거슬리는데. 어떻게 좀 도와 주시겠어요?”
“……. 그 여자, 사실 인간이 아니에요.”
비예단은 그간의 일들에 거짓을 잘 버무려 전달했다. 제인은 사실 인간이 아니며, 녹스가 그녀를 불법으로 빼앗아와 성의 모두가 수군거릴 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것, 제인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는 것, 그러기 위해 성에 잠복하고 있다는 말까지.
“인간도 아닌 계집이라면, 역시 제가 우세하겠네요. 괜한 걱정이었어요.”
“도와주시겠어요? 제인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줄 수 있도록.”
“안타깝지만, 전 자선 사업가가 아니랍니다. 이깟 시골 동네 귀족에게 노예를 돌려 준다고 하더라도 보상이 변변치 않을 텐데, 제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여요.”
그러나 율리나는 제인이 이종이라는 사실에 더 안도하고 있었고, 굳이 그를 도와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비예단이 결국 비장의 수를 꺼냈다.
“그 이종의 눈물과 피는 모두 보석이 되거든요, 원래 주인도 그 덕에 꽤 큰 부를 쌓으셨습니다. 보상이라면 섭섭지 않게 챙겨 주실 거예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다. 수도에서 보석 사업을 하고 있던 율리나의 눈에 의욕이 담겼다.
“그렇다면……. 도와드릴 수 있을 듯한데, 계획은 있는 건가요?”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요. 그분께 부탁해 그 여자를 몰래 빼 올게요, 그 뒤에 아가씨께서 안전한 곳에 데리고 있어 주세요. 제가 늦지 않게 도착해서 원래 주인께 되돌려 드린 후, 다시 아가씨께 돌아가겠습니다.”
율리나로부터 제인을 건네받은 후,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던 비예단은 여태 제 팔에 올려진 율리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침 주변에 별장을 하나 구매해 두었어요. 거기로 데려가면 되겠네요.”
“대략 어디쯤인가요?”
“안전하게 도착하게 되면, 사제님께 추천서를 보내도록 하죠. 제 별장의 약도가 그려져 있을 거예요.”
그토록 아끼고 싶었던 제인을 무기로한, 그녀와 함께 도망칠 계획은 율리나 덕분에 차곡차곡 준비되어 갔다. 사랑과 돈에 눈먼 두 명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 * *
좌천된 바람에 기사 숙소에서 쫓겨나고, 성 밖의 병사 숙소에서 지내고 있는 해일러는 오늘도 먼 길을 쓸쓸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한 번 기사의 자리까지 올라본 그녀를 환영하는 병사들은 없었다.
“해일러 님.”
“여기까진 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장에게 대들었다고 낙인찍힌 해일러에게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덕분에 오늘도 대화라고 할 만한 걸 전혀 하지 않았던 그녀는 비예단이 내심 반가웠다.
“그냥요, 지나가다 보이시길래 반가워서.”
지나가다가?
병사 숙소와 내성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곳에 아무런 연고 없는 비예단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저번에도 찾아온 게 수상하더니, 대체 도움이 필요한 게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 잘 지내고 계십니까?”
해일러는 알면서도 딱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뭐든 간에 그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볼 생각이었다.
“저야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죠, 요즘 제인을 못 본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요.”
애달픈 웃음이 그가 제인에게 가지는 호감을 드러내 주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에 해일러도 웃음으로 보답했다.
“어? 웃었다! 저 기사님 웃으시는 거 처음 봐요!”
“예? 저 이제 기사님 아닙니다. 잘렸습니다.”
“잘렸다고요? 뭐 때문에요?”
“제가 워낙 사고뭉치라.”
둘은 길거리에 서서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곧 갈 줄 알았던 비예단이 자신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게 아무래도 수상했던 해일러가 드디어 본론을 물었다.
“사제님께서 제 도움이 필요해 오셨다는 건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선에서 말씀해 보십시오.”
비예단이 짧은 손톱을 뜯으며 수줍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