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녹스가 제인을 뒤에서 안아 주고 있는 모양새에 단단히 화가 난 율리나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매섭게 쏘아 붙었다. 녹스는 오해를 풀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지, 제인을 떼어 놓지 않고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쾌한 표정은 가면에 가려져 율리나는 제 약혼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여겼다.
“어떻게 가진 거라곤 불명예밖에 없는 남자를 기다려 준 제 마음에 대못을 박을 수 있나요!”
멀리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율리나의 하녀까지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언성이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아직도 안 갔나?”
율리나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처 난 자존심을 어떻게든 메꾸고자 분노의 표적을 바꿨다.
“당신인가요? 이미 혼처가 정해져 있는 남자를 홀리는 게, 꽤 솜씨가 좋은가 보군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이 덜 된 제인이 눈을 끔뻑이며 녹스와 율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떤가요, 달콤한 꿈이라도 꿔 본 경험이? 녹스 님은 당신이 넘볼만한 분이 아니니, 주제를 안다면 제가 무슨 수를 쓰기 전에 손 떼는 게 좋을 거예요.”
제인을 한 번 훑어본 율리나가 협박과도 비슷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말들을 많이 들어본 제인이 상처 받은 낌새도 없이, 시선을 깔며 회피하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율리나가 기어코 손을 들었다.
“패악은 그대의 아비한테나 통하지.”
제인의 뺨을 후려치려던 손이 녹스에게 붙들려 멈췄다. 하도 세게 잡아 피가 안 통할 정도였는데도 율리나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변했다.
“지, 지금…. 제 손을 잡아 주신 건가요?”
녹스가 더러운 것 놓듯 잡아챈 팔을 집어 던졌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 율리나가 딱 그런 족속의 사람이었다.
“율리나.”
녹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빨갛게 변한 얼굴이 황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녹스 님.”
“경박하게 굴지 마, 내가 얼마나 봐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여자 앞에서 자신을 무시했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으로 느껴진 율리나가 기어코 해선 안 될 말까지 꺼내 놓기 시작했다. 녹스에게 압박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옆에 멍청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이 남자의 또 다른 면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안 봐주시면, 절 죽이기라도 하실 건가요? 이 위선자, 배신자!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히고 얼마나 잘살 수 있을 것 같나요!?”
혈육의 피….
그에 대한 세간의 소문 같은 건 한 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제인은 어느 정도 그의 과거를 예측할 수 있었다. 마네를 죽인 게 이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겠지만 녹스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긴 탓이었다.
대체 이 사람의 밑바닥은 어디일까, 나 따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왜 어제 죽이지 않았던 걸까. 손만 놓으면 바로 죽어 버렸을 텐데, 굳이 자신을 살려준 이유가 이깟 꽃놀이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잘살고 있어. 그대만 없다면 더 잘살고 있었을 텐데.”
약점을 찔렀는데도 담담한 녹스의 태도에 율리나는 좀 더 그의 일면을 파고들었다.
“죽어서도 지옥에 갈 당신이 안타까워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제게 너무하시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대는 내 지옥 길동무이지 않나?”
“당신의 가족은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텐데! 왜 제 눈에서도 눈물 흘리게 하시는 거예요, 정말!”
선을 넘은 비난에 태연하게 대응하는 녹스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겨있는 제인은 미세하게 떨리는 그 감정의 균열을 알아챘다. 녹스는 참고 있었다.
“대장님!”
가다듬지 않은 율리나의 비명 섞인 화풀이가 녹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무렵, 이제 슬슬 참아 내고 있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를 무렵. 멀리서 녹스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방금 막 타오르기 시작한 싸움의 불꽃을 다시 식혔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횃불 같은 붉은 머리, 해일러였다. 뻔히 오늘 방문한 손님과 대화 중인 것을 아는데도 용건이라곤 고작 인사밖에 없던 해일러가 다급히 녹스와 제인의 곁으로 달려왔다. 해일러는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행동임을 아는 것인지 민망해하고 있었다.
“이 무례한 여자는 뭔가요, 또? 옷 입은 꼴이 경박하기 그지없군요.”
훈련이 모두 끝난 시간이라 갑옷 차림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던 해일러는 일반적인 평민 여자의 복장이 아닌,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사실이 수도의 고리타분한 백작가의 영애에겐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내 기사에게 불쾌한 언사는 참아주게.”
정중한 부탁이었지만, 그마저도 해일러의 편을 든다고 생각한 율리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좋아요, 가족들을 모두 지옥 구덩이에 던져 놓고도 여자와 노는 게 즐겁다면, 그리하세요. 손에 묻은 피는 절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녹스 님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이 율리나,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자 초석을 다지고 있던 율리나의 앞에 해일러가 나섰다.
“뭘 어떻게 알고 계신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대장님께선 영애가 생각하시는 그런 잔악무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도의 귀족들, 황실과의 불편한 관계, 대륙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신의 오명, 엑젤리스라는 무거운 짐.
모든 것들을 고려했을 때, 율리나를 험하게 대하면 안 된다는 자신의 위치가 답답했던 녹스는 제 편을 들어주는 해일러가 내심 고마워졌다.
“이곳 모두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라고 이해하는 문제를 약혼녀이신 영애께서 그렇게 헤집으시면, 그것도 예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내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도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영애가 대장님께 저지른 무례를 갚아 드리는 겁니다.”
다른 여자를 품에 끼고 있는 약혼자, 그편을 들고 있는 기사, 멀리서 쑥덕대는 하녀들. 불쾌한 기색을 담은 시선이 모두 율리나를 향했다. 이곳에서 녹스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을 반드시 이루고 싶은 그녀는 상한 자존심을 외면하고 그들에게 백기를 들었다.
“이런 입씨름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 아니겠나요, 이곳에 귀족은 나뿐인 것 같으니, 교양 있는 제가 물러날 수밖에 없겠군요.”
녹스는 율리나가 몸을 돌리고 나서야 제인을 놓아 주었다. 괜한 설전을 벌여 혼날 거라고 생각했던 해일러는 자신의 걱정보단 안색이 창백해져 그의 품에서 풀려나는 제인이 더 걱정되었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 너무 연약해 보여서, 대장에게 품고 있는 연정보다도 그녀에 대해 안쓰러움이 더 컸다.
* * *
“대장님!”
아침부터 찾아온 파수대 단장이 곧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집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할 녹스는 단장의 호들갑에 애먼 짜증을 부렸다.
“아침부터 나를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할 줄이야.”
평소라면 대장의 정 없는 목소리에 당장 자세부터 바로잡았을 단장은 그럴 겨를도 없는지 거친 숨을 뱉으며 책상에 들러붙었다. 문을 열어준 셰이단도 단장의 호들갑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문을 닫는 게 한참 늦어졌다.
“…. 숨결이 불쾌한데, 조금만 뒤로 가주면 고맙겠군.”
“차라도 한 잔 내오는 게 좋겠습니다, 진정이 필요하겠어요.”
“지금 차나 홀짝일 때가 아닙니다!”
녹스가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 마찰음에 단장이 최면이라도 걸렸는지, 포효하던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를 통해 전달하지 않고 직접 그 먼 파수대에서 달려올 정도면 꽤 급한 건이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찾아올 불행이 너무나도 많아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수도에서 파견된 기사들의 시체가, 분명 황제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크게 심호흡한 단장이 상황을 주절거렸다. 황무지에 정찰을 나간 대원들이 엑젤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제의 깃발과 나뒹구는 시체 몇 구, 불탄 마차를 봤다는 내용이었다.
“시체 보는 게 처음인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녹스는 좋게 말하면 침착하게, 나쁘게 말하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금 시체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만 해도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단장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걸 보면, 지나가는 사용인들도 문제가 심각하구나, 여길 법했지만, 엑젤리스의 대장은 책상만 두드려대며 귀찮음이 가득한 말로 단장을 타일렀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어차피 엑젤리스에 당도했다면 그대의 손에 죽었을 놈들인데.”
계속해서 대화 초점이 엇나가는 느낌에 단장의 속에 답답함이 응어리졌다. 요점은 수도의 기사들이 죽었다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위협이 될만한 무리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황실의 기사들을 상대로 목숨을 빼앗았다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