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닐걸요?”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온 율리나는 절대 귀가 얇은 편이 아니었으나, 비예단의 애매한 대답을 들으면서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마음이 용광로에 데워진 쇳조각처럼 달궈졌다. 오랜 세월을 녹스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율리나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배신감에 지성을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어머, 아가씨.”
그녀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비예단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고였다. 하녀는 자주 있던 일인 듯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손수건을 꺼내 율리나에게 건넸다. 졸지에 귀족 아가씨를 울려 버린 비예단이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떠올린 대사를 읊었다. 그의 깜빡거리는 눈이 당황한 사람의 표정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정부를 두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 정도의 가벼운 사이일 거예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정부? 녹스 님을 10년 넘게 기다려온 내가 있는데, 나를 두고 정부라고요? 그 여자가 대체 누구죠?”
태양의 열기가 잦아들고, 따사로운 빛만 남겨질 때쯤이 되자 양산을 접은 하녀가 은근히 비예단을 노려보았다. 빨리 해결하라는 재촉이었다.
“저도 잘은 몰라요. 성에 소문이 파다해서 저도 모르게 확실하지도 않은 내용을 말씀드렸네요. 부디 잊어주세요.”
“말해 봐요, 어디 가문 여자인지, 대체 뭐로 녹스 님을 홀렸는지!”
녹스가 처음 만났을 무렵부터 자신에게 벽을 세웠던 건 알고 있었다. 짝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안을 줬던 적도 많았고 남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것도 다 참아왔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성에게 관심이 없어서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율리나는 언젠가 녹스가 14년을 기다린 사랑을 알아주리라 믿었다.
녹스 님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되려고 여태 노력했는데, 마음이 식지 않도록 늘 녹스 님을 떠올렸는데. 여태 보냈던 그 무수히 많은 편지에 답장이 없었던 이유가 다 그 여자 때문인가? 오늘날 반기지 않은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인가? 녹스를 좋아하는 것이 의무이자 목적이 된 율리나가 얼굴도 모르는 ‘내연녀’에게 분노를 드러냈다. 인생의 절반을 공들여 노력해 지켜 온 마음이 버려질까 두려웠다.
율리나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걸 옆에서 계속 달래던 비예단은 헤어질 무렵, 그 둘이 저녁에 성 근처에서 자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면서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어주었다.
비예단은 방으로 가는 길이 즐거워 보폭이 점점 넓어졌다. 그에게 약혼녀가 있을 줄 몰랐다. 여태 자신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각하께 질투의 감정을 느끼는 게 무척 괴로웠는데 모처럼 잘 해결될 것 같아 근래에 계속 우중충하던 표정이 밝아졌다.
* * *
루이스가 가져온 정보는 녹스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보만 주겠다는 의지가 훤히 드러날 만큼 간결했고, 그 외에도 노예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두로 들은 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한 노트도 함께 전달해 주었다. 스크래치가 잔뜩 나 있는 갈색 가죽을 매만지던 녹스가 가면을 벗어 내고 미간을 문질렀다. 누군가 봤다면 피곤해 보인다 여겼겠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저 단장됐는데 뭐 선물 없습니까?’
막 햇병아리 시절을 끝내고 단장 자리에 앉은 루이스가 손가락으로 코 밑을 문지르며 멋쩍게 뱉은 말이 떠올랐다. 선물이라며 던져 줬던, 안 쓰던 노트를 루이스는 여태 쓰고 있었다 생각하니 싫은 사람을 상대하느라 빠진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너덜거리는 종이를 몇 장 들추자 책갈피가 꽂혀 있는 페이지가 보였다. 줄에 맞춰 쓰진 않았지만, 별표와 물음표가 가득한 내용엔 루이스의 노력이 엿보였다.
‘관련 동화책이 있음. 천사의 밤.’
시선을 끄는 글자에 손길이 멈췄다. 동화책이 있다는 내용은 보고서에 따로 적혀 있지 않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도 동화책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따로 메모해 둔 다음, 마저 페이지를 넘겼다.
‘제이나 숲. 개체 수 알 수 없음.’
다시금 그의 손을 멈춘 대목은 제인의 종족이 사는 지역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부분이었다. 제이나 숲, 몇 번을 곱씹어 보던 녹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에게 갈 참이었다.
* * *
“밤에 보는 꽃도 좋아하나?”
“…….”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 재낀 문 뒤엔 제인이 하염없이 창문을 내다보는 뒷모습이 있었다. 슬슬 날이 추워져 창을 열어놓은 방에 냉기가 돌자 녹스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제인의 어깨에 둘렀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그녀는 어깨에 손가락이 조금 스쳤을 뿐인데도 떨고 있었다.
“방이 꽤 춥나 보군.”
가면의 틈새로 밝은 눈이 방안을 훑었다. 양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방은 무섭도록 깜깜했다. 추위 때문에 떠는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말한 그는 버려진 나뭇가지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제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더 늦기 전에 가지.”
단순히 꽃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단, 조금 더 급한 용건이 있는 사람 같았다. 저항할 기력도 없이, 휩쓸리듯 따라 나온 그곳은 녹스가 자주 찾았던 장소였다.
훈련소 뒷길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거대한 나무 밑, 동그랗게 솟은 무덤 두 개. 꽃놀이라기엔 초라했지만, 엑젤리스에 있는 그 어떤 나무보다도 거대한 나무의 줄기 근처에는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제인은 눈앞의 꽃나무보다도 무덤 두 개에 먼저 눈길이 갔다. 묘비도 없이 세워진 무덤 앞엔 시든 꽃잎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쓸려가고 있었다. 제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망토가 스르륵 내려가 겨우 한쪽에만 걸쳐져 있었지만, 다시 주워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나무에서 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황색을 섞은 흰색의 꽃잎이 마치 밤하늘의 별똥별 같았다.
“꽃잎이 다 떨어지면 돌아오는 여름까지 볼품없어져, 구경하려면 지금이 제일 볼만해.”
녹스는 머리 위에 꽃잎이 붙은 것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흐드러져가는 꽃을 보러 온 것인지, 무덤의 주인에게 애도하러 온 것인지 분간도 안 될 만큼 그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옆에 제인이 있다는 이유로 곤두섰던 신경도 가라앉았다.
제인은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충이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 죽었다던 마네의 것이 확실했다. 나머지 하나는 누구지? 굳이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다. 말 섞고 싶지 않은 게 더 큰 이유였다.
“겨울이 오면 꽃들도 다 질 테니…. 정원에 가서 구경하겠나?”
어제의 일을 잊은 듯 구는 녹스의 모습은 제인에겐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가려질까,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벼랑 끝에서 제 목숨을 쥐고 흔들던 그였다. 이깟 꽃을 보기 위해.
녹스도, 이 꽃나무도 모두 끔찍했다.
“저녁엔 바람이 차.”
녹스는 흘러내린 망토를 다시 제대로 걸쳐 주었다. 맨살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자 차가운 감촉에 몸이 떨렸다. 이 미치광이의 손이 몸에 닿는 것조차 싫다는 듯 표정이 구겨졌다. 녹스는 그녀가 불쾌해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모른척했다.
“사실, 오늘은 궁금한 게 있어.”
질문이 있다는 녹스의 말에도 제인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
“제이나 숲, 거길 알고 있나?”
무던한 목소리였다. 마치 가벼운 안부 인사를 묻듯, 그런 사사로운 음성. 하지만 그 순간 제인이 오래 사용하지 않아 녹슬어 버린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렸다. 다물고 있는 입술이 이에 짓눌려 있었다.
“거긴…왜….”
제이나 숲, 그곳은 그녀의 고향이자 수많은 이종의 보금자리였다. 인간들은 제이나 숲에서 포획한 이종들에게 모두 ‘제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수많은 ‘제인’들 중 하나인 그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냐고 묻긴 했지만, 그 전부터 머리엔 불길한 생각이 들어차 있었다. 동족들을 더 잡아 와 팔아 치울 생각이구나, 그런 생각들. 그가 뭘 궁금해하는진 몰라도 절대 인간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진 않겠다고, 자신의 고향에 불행의 씨앗을 뿌릴 바엔 입이 찢어져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핏기 없이 창백해진 입술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굳은 결심과는 달리 온몸이 경직되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머리를 돌고 있던 피들이 몽땅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녀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해 준 녹스는 그 노트에 적혀져 있는 ‘제이나 숲’이 그들이 사는 지역이자 제인의 고향이 맞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극적인 반응을 보일 리 없으니.
“괜찮나?”
제인은 녹스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힘에 부치는지 몸을 들썩이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그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는 듯 무심하게도 말했으나, 여전히 원망스러운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녹스 님!”
제인의 한이 담긴 눈빛과 녹스의 미묘한 시선이 엇갈리는 그때, 멀리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녹스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율리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