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74)화 (74/95)

74화.

전쟁에서 돌아온 날, 친목을 과시하기 위해 열었던 파티를 물밑으로 올리자, 율리나는 더 말싸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 파티에서 미래의 사위를 위해 가십을 늘어놓는 귀족들과 싸울지, 아니면 로드게릭스 가문을 배신하고 귀족들의 편에 설지 저울질한 건 명백한 제 아비의 잘못이었다.

둘의 말싸움은 항상 녹스의 승리로 끝이 났었다. 본디 이런 쪽은 사랑하는 쪽이 늘 패배를 가져갔고, 율리나는 그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 줄 수 있는 녹스에게 무기는 많았다. 가운데 낀 루이스는 자신이 잊힌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곧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 싸한 분위기가 흩어졌다.

“옛정을 봐서라도 내쫓진 않을 테니, 부끄러움을 안다면 어서 돌아가게. 멀리 나가진 않겠네.”

마지막까지 율리나의 마음에 쐐기를 박는 것도 잊지 않은 녹스는 그렇게 오래된 약혼녀를 혼자 둔 채 응접실을 떠났다.

“저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루이스가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물어봤지만, 녹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말도 꺼내기 싫은 눈치였다. 결국, 궁금증은 해결하지 못한 채 고생해서 긁어온 정보를 품속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바쁜 와중에도 정갈하게 정리된 정보들은 생각보다 내용이 많았다.

“검은자락 까마귀?”

가장 상단에 있는 글자를 읽고 녹스가 의문을 표했다. 처음 듣는 종족이었다.

“예, 오가며 들은 종족들은 많아도 처음 듣는 종이다 보니 조사에 차질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도 뜬소문은 다 배제하고 확실한 정보만 추려 왔으니 신뢰하셔도 됩니다.”

녹스는 그가 어딜 다녀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노예 시장, 세상 온갖 진귀한 것들의 배를 가르고 산채로 굳혀 파는 곳. 어지간한 인간들이라면 발길도 하지 않는 인간성을 잃은 장소에 다녀왔으니, 그가 고생이 많았을 거라 짐작했다.

「체액이 몸에서 떨어지면 까마귀족 자체의 신성력과 만나 단단하게 굳어 보석처럼 빛남.

저주가 스며들 수 있으니 평소엔 신성력을 제어하는 구속구를 이용해 관리할 것.

만들어진 보석은 경도가 약해 보관에 주의가 필요.」

“보석, 보석이라….”

그녀의 팔에서 떨어지던 붉은 보석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녹스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요컨대, 그 보석이 있었기 때문에 날개 없는 비행 종이 아직도 노예 구실을 하고 있는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피가 돈이 된다니, 그녀가 여태 무슨 못 볼 꼴을 당하고 살았는지 짐작이 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보석 때문에 값어치가 높은 건데, 몇몇 사람들은 그 보석이 불행을 불러온다고 꺼리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처음 까마귀족을 포획한 주인 내외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자다가 갑자기 불에 타 죽었답니다. 침대도 멀쩡한데 갑자기 사람만 홀라당 탔다나.”

루이스는 흥미로운 어투로 설명했다. 보고한 서류에는 없는, 완벽히 신뢰하기엔 어려운 괴담들이 주를 이루었다.

“뭐, 사실 희귀한 종족이다 보니 그 보석이 완벽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 보석이 저주의 매개체라면 노예를 죽여서 피를 뽑아내면 되지 않나?”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이야기를 꺼내는 녹스의 말에 루이스가 장난기 담긴 어투로 대답했다.

“평생 연금 보장인데, 죽이면 안 되죠. 죽을 때까지 써먹으려면.”

“인간들은 참 지독해, 돈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작자들 같으니.”

녹스가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 * *

율리나는 녹스의 매몰찬 행동들에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그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은 아니었기에 혼자 있는 곳에서만큼은 침울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피앙세를 이리 냉정하게 대하는 약혼자도, 바람에 섞인 모래 알갱이들도, 자신을 보며 쑥덕거리는 타지의 사람들도 다 꼴 보기 싫었다.

‘그래도 녹스 님은 나한테 화난 게 아니라, 내 가문과 아버지가 싫은 걸 테니까 나만 잘하면 될 거야.’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어 왔던 세월이 그녀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도, 녹스와 자신은 이미 어긋난 관계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결론이었다.

“내일은 더 공들여서 단장해, 녹스 님이 나한테 반하시도록.”

율리나가 뒤에서 양산을 들고 있는 하녀에게 신경질을 냈다. 하녀는 입버릇처럼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배운 것 없는 그녀조차 알고 있었다. 아가씨의 약혼남이 아가씨를 왜 좋아하지 않는지. 가문의 사정 따위야 알지 못해도, 매일같이 오지도 않는 답장에 편지를 수십 통씩 보내면 누군들 좋아할까. 오늘 쫓겨나 길바닥에서 노숙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참 주인 아가씨에게 잔소리를 듣는 동안 주변을 부산스럽게 둘러보며 딴생각할 거리가 있는지 찾던 하녀가 드디어 율리나의 관심사를 돌릴 수 있는 주제를 발견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야!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누구 앞이라고 큰소리야?”

투덜거리면서도 하녀가 보고 있는 방향에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율리나는 웬 누추한 옷차림의 금발 소년을 발견했다. 이쪽을 지나가고 싶은 눈치인지 어물쩍대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떨구는 그 소년은 누가 봐도 속세와는 거리가 먼 사제의 복장이었다.

“녹스 님이 언제부터 신을 믿었을까나?”

세상 사람 모두가 로테를 믿는다고 해도 절대 기도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 성에 사제를 두었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낀 율리나가 도망치려던 사제를 불러 세웠다.

“거기! 이리 와 봐요.”

높은 고음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딘 사제, 비예단이 섬찟한 느낌을 받았지만, 귀족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신전에서 일했던 경험대로 예의 바르게 자신을 불러세운 율리나에게 뛰어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신도들에게 지어 주는 온화한 미소에 율리나가 버릇없이 대답했다.

“날 보고 도망가길래, 기분이 좀 나빠서요.”

귀족이라 할지라도 신의 종인 사제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았던 율리나는 그깟 도의 따윈 지킬 마음이 없어 보였다. 비예단은 그녀의 언행을 보고 이 여자가 신의 축복이 필요해서 자신을 불러 세운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노고를 치하 받는 것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감사의 인사였고, 감사의 인사보다 더 짜릿한 건 용서를 구하는 말이었다.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모습은 율리나에게 늘 즐거움을 주었다. 깍듯한 비예단의 사과에 흡족하게 웃은 그녀가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녹스 님께서 종교에 뜻을 두신 건가요? 평생 신전에는 발길도 안 하시는 분이 곁에 사제를 두었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비록 냉담한 사이였지만 약혼자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다 알고 싶은 마음에 물은 질문은 비예단이 요즘 심란했던 이유 중 하나, 녹스가 제인과 가깝게 지낸다는 걱정을 자극했다. 그녀의 입에서 ‘녹스’라는 이름이 나옴과 동시에 그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에 비예단은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함과는 거리가 멀어 그녀가 녹스와 무슨 관계인지 에둘러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덜걱대며 굴러가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기라도 했는지 말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예단을 기다리다 못한 율리나가 먼저 주도권을 가져갔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 녹스 님과 정식으로 약혼한 결혼 상대에요. 워낙 속내를 꺼내 놓지 않는 예비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궁금할 뿐이니까요.”

제 입으로 술술 비예단이 궁금했던 점을 말해 준 율리나는 내심 녹스와의 약혼반지가 보이게 머리를 쓸었다.

“각하께서 약혼을…?”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놀라 토끼 눈을 뜬 비예단이 자기도 모르게 앞에 서 있는 율리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분홍색 보닛과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겹겹이 쌓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누가 보아도 녹스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유치한 드레스, 입술을 강조한 색조 화장이 눈에 들어왔다. 유행하는 드레스나 화장같은 것은 일절 모르는 비예단의 눈에도 그저 촌스러워 보였다. 그런 감상을 떠올리고 있을 때, 비예단은 문득 자신이 감히 귀족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괜찮아요, 녹스 님이 말하지 않았나 봐요.”

기억을 되짚어 봐도 녹스의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하물며 약혼녀의 초상화조차 그의 집무실엔 걸려 있지 않았다. 비예단은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뭐, 괜찮아요. 워낙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여자라곤 나밖에 없었어요.”

은근히 자랑스러움이 묻어있는 말투에 아까부터 굴러가고 있던 그의 머리가 비상한 결론을 도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