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73)화 (73/95)

73화.

“여전히 쑥스러움이 많으시네요.”

율리나는 이제 마음을 빼앗겼던 약혼자가 떠났다고 방에 틀어박혀 울고만 있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악하게 자랐고,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었으며, 가문을 방패 세워 사람을 휘두르는 법도 익혀냈다.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란 투지가 불타올랐다.

“괜한 소리 집어치워. 그대와는 용건만 나누는 거로도 피로해지니.”

양산을 들고 있는 율리나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 하나도 안 변했네. 오히려 싸늘한 반응들이 더 반갑기도 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나만의 피앙세, 나만의 약혼자.

자신이 없는 동안 그 누구도 이 남자의 단단한 철옹성에 다가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까칠한 모습에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정조를 지키는 동안 당신도 지켜왔군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이 율리나의 마음을 맴돌며 배를 간지럽혔다.

“멀리서 온 약혼녀에게 차 한잔 대접하는 게 어려운 일인가요?”

양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음 짓는 율리나는 녹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양산을 접고, 보닛의 리본을 한 번 매만진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객에게도 물 한 잔은 대접할 수 있잖아요?”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통에 깊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뒤를 돌아 성으로 향했다. 협곡에 있던 모두가 녹스의 눈치를 보았음에도, 율리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짙은 복숭아 향기가 남아 있었다.

“식사도 괜찮았는데. 멀리서 오느라 챙겨 먹는 게 변변치 않았거든요.”

찾아오는 손님이 드물어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응접실의 가구들은 모두 손때 하나 타지 않은 새것들이었다. 율리나는 새 가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파의 팔걸이를 손으로 쓸며 촉감을 즐겼다.

“뭐, 나쁘지 않게 하고 사네요. 동네가 좀 후미진 데에 있는 거 빼곤.”

오는 길 내내 주변을 관찰하던 그녀는 차를 따라 주는 하녀를 빤히 보기도 하고, 찻잔을 주의 깊게 살피기도 했다. 그 이후에 내린 소감은 까다로운 율리나의 기준으론 후한 편이었다.

“모래 먼지가 피부에 안 좋을 텐데, 하녀들을 데려오길 잘했네요. 먼 길이라 두고 올까 생각했었거든요.”

지치지도 않는지, 율리나는 끊임없이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녹스는 못마땅하다 못해 아예 관심이 없는 자세로 몸을 소파에 기대 있어서 눈만 감고 있었다면 자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제 하녀들이 사용할 방을 내주세요. 제가 쓸 가구들도 주문해야 하고, 성은 제 마음대로 손봐도 되나요?”

그러나 그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할 만한 말들이 계속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율리나의 주제가 점점 이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성을 네 마음대로 손본다?”

“네, 저 이제 여기서 살까 해요. 녹스 님도, 이곳도 마음에 들어요.”

듣다 듣다 기가 찬 소리에 녹스는 그만 웃고 말았다. 미쳤나? 하고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눈치가 없다는 건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장점이었다. 율리나는 사교계에서 자신의 기를 죽이려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종종 눈치 없는 척 굴었고, 그건 매번 잘 먹혀들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녹스의 웃음에 따라 웃으며 거절의 뜻을 못 알아듣는 척 능청을 떨었다.

“저와의 대화가 즐거우신듯하니 먼길을 온 보람이 있네요.”

녹스가 삐딱하게 기대 있던 자세를 일으켜 바르게 앉자 율리나가 소파 끝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궂은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부드러운 손끝이 검은 가면에 닿았다.

“이 가면은 대체 언제 벗어 내실 건가요? 마음에 상처가 그리도 컸던가요?”

턱 부분을 잡고 벗겨 내려던 손이 녹스에게 붙들렸다. 조심하겠다는 생각조차 없는지, 우악스러운 힘에 율리나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여태 분홍색 드레스와 잘 어울리도록 애교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표독스러워졌다.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게, 마치 동등하거나 낮은 자를 대우하는 모습이었다. 율리나는 녹스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뻔뻔스레 반응했다.

“제가 사랑에 빠졌던 그 시절 녹스 님과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기뻐요.”

율리나의 갈 곳 잃은 손이 검은 재킷의 선을 따라 움직였다. 녹스는 그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을 참지 않고 쳐내었다.

“그대도 역겨운 건 여전하군.”

그도 이제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도발을 피하지 않았다.

“약혼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소문나면 안 좋지 않겠어요?”

율리나가 한참 떨어져 문 앞에 서 있는 하녀에게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아직도 망상에 빠져 지내는 것도 여전하고.”

“망상이라뇨, 여기 이렇게 우리 사랑의 징표가 있잖아요?”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에 무리하게 낀 반지가 빛났다. 약지에 끼던 약혼반지가 작아지자 새끼손가락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우스워 보였다.

“지금 꼴이 웃기다는 건 아무리 철면피인 그대라도 알고 있겠지.”

“배고파요, 식사했으면 좋겠는데. 이곳에서 나는 포도주를 곁들여서요.”

능청스레 대화 주제를 바꾼 율리나는 식당으로 곧장 가겠다는 말도 덧붙이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 땅을 둘러보게, 포도주 한잔이라도 겨우 담글 포도가 자라는지.”

“… 버려진 땅에 버려진 당신이라니, 이런 걸 보고 낭만적이라고 하던가요?”

“낭만이 다 얼어 죽었나, 쓸데없는 망상 때문에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알아들었으면 꺼져.”

그나마 표면적으로라도 갖추고 있던 예의가 순식간에 뜯겨 나갔다. 무엇이 방아쇠가 되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늘 침착했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폭언까지 하시다니, 키만 더 자라신 줄 알았는데 매력도 늘었어요.”

남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대화를 끌고 가려는 그녀의 화법은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아 당해낼 자가 없었다. 녹스가 살짝 두통이 일어날 즈음, 구세주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루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접실에 있다는 건 손님이 와있다는 건데, 기다리지 않고 시간이 괜찮냐고 묻는 걸 보니 셰이단이 시킨 모양이었다. 녹스는 그를 얼싸안고 쾌재라도 부르고 싶어졌다.

“잘생긴 기사님께선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율리나는 응접실로 걸어들어온 루이스에게 애교 넘치는 콧소리를 넣으며 가벼운 인사를 전했지만, 그건 기사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었다. 어림잡아 짐작한 상황으로는 그녀가 그리 환영 받는 손님이 아닌듯하여 루이스는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율리나의 말을 무시했다.

“대장님, 방금 복귀했습니다. 편한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다시 보고드리러 오겠습니다.”

“대장?”

루이스의 보고에 대답한 건 녹스가 아닌 율리나였다. 대장이라는 호칭에 잘 걸렸다 싶었는지, 무시당해 무안했던 기색은 싹 사라지고 여유가 넘쳤다.

“가문도 버리고, 저도 버리시더니 여기서 재미난 소꿉놀이를 하고 계시네요.”

둘의 신경전은 루이스가 왔음에도 계속되었다. 중간에 뻘쭘히 자리 잡은 루이스가 속으로 대장을 응원했다.

“레이스 가문이 졸부가 됐다더니, 남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늘었나?”

“그래요, 저희 가문은 느닷없이 돈벼락을 맞았답니다. 그럼 뭐 어떤가요? 사람은 자고로 돈이 넘쳐야 여유가 생기지 않겠어요?”

“돈으로 인품까지 살 수는 없나 보군그래.”

“이런 촌구석에서 기 싸움 해 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요, 흙먼지 그만 마시고, 그 바보 같은 가면도 벗고 저와 수도로 돌아가요. 아버지께서 몹시 기다리고 계세요.”

“아버지?”

“레이스 백작님을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이제 수도에선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큰 힘을 가지게 됐어요. 녹스 님에게도 분명 저희 가문이 도움 될 거예요.”

“그래. 지금 생각해 보니 레이스 백작이 도움을 주긴 했지.”

처음으로 긍정의 대답을 받자 내심 반가웠는지 얼굴에 화색이 돋아났다.

“백작에게 얻어맞은 뒤통수 덕에 큰 교훈을 얻었으니 말이야.”

“…녹스 님께서는 한때 공작가의 도련님이었던 기억도 아직 못 잊으셨나 보군요. 제 가친께 예의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

“아, 장사꾼이 다 되었다 들어 교양도 팔아 버린 줄 알고 내가 실례를 저질렀군.”

율리나가 가까이 다가온 만큼, 녹스 또한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투는 감미로웠으나, 내용 자체는 멸시였다.

“그대도 하나 잊고 있는 게 있어. 전쟁에서 돌아와 추방 재판까지 동안은 로드게릭스 공작이었네, 도련님이 아니라. 레이스 백작이 크게 파티를 열어 내 즉위를 축하해 주지 않았나?”

녹스는 목을 물고 늘어지는 개처럼, 율리나가 몇 년을 상처로 안고 지내던 그 일을 꺼냈다. 아버지의 배신으로 약혼자가 추방당하는 탓에 몇 날 며칠을 울었던, 가슴 아픈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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