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72)화 (72/95)

72화.

“오늘 무척 아름다워, 진심이야.”

“…….”

“……춥지는 않고?”

계속되는 침묵이 돌아왔다. 쓴 것을 집어삼킨 듯 쓰게 웃은 녹스가 혼자 떠드는 것에 지쳐 말을 멈추고 한숨을 뱉었다. 제인은 그 한숨 소리에 눈치가 보였지만, 이를 악물고 모른 척했다. 자신을 농락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마네 로드게릭스.”

떨떠름한 한숨 뒤에는 제인의 관심을 끌만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목덜미를 쓸어 만지는 녹스는 그 이름이 여간 꺼내기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만년필에서 봤었던 그 이름에 단단한 통나무처럼 굳어 있던 몸이 삐걱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 이름….”

“내 형이야, 나랑 똑같이 생겼지.”

배다른 형제인데도 꼭 닮아 말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건, 그가 노스어 전쟁에서 귀향한 뒤, 가문에 친족 살해범이 나왔다는 불명예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세상에 밝히고 나서부터였다.

의절한 어머니가 세상 밖으로 꺼낸 진실을 알 수 없는 오명. 굳이 그런 사사로운 가정사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녹스는 구질구질한 뒷이야기는 배제하고, 적당한 사실들을 추려 골라내었다.

“형은 친절한 사람이었어. 나한테도 좋은 형이었고.”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 본 게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고, 형이 어떻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 모두에겐 재밌는 가십거리였지만 제 입으로 밖에 내 본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하게 나쁘면서도 후련했다. 제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지 달싹대는 입술이 보였다. 녹스는 그녀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죽었어, 형은.”

형의 모습을 하고선 형이 죽었다고 말하는 녹스는 오랜만에 가족의 죽음을 실감했다. 마음이 찢어진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다시금 그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감정을 숨기는 게 능숙한 녹스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

얼굴도 본 적 없는 이의 죽음에 적잖이 충격받은 제인은 떼려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인데, 오래전에 죽었다는데 왜 이렇게 아쉽고 쓸쓸한 기분이 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녹스가 꾸며낸 그 모습이 마네라고, 단단히 착각했던 것 때문에 벌어진 감정이었다. 이 남자는 죽은 제 형을 가지고도 장난칠 때 써먹는구나, 여태 쌓아왔던 인간들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한 층이 더 쌓였다. 잔인한 인간, 그녀에게 녹스는 그런 인간이었다.

“내일은 꽃 보러 갈까? 바람이 많이 불어서, 꽃잎 흩날리는 게 꽤 예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대로 해가 떠 버릴지도 모를 만큼 길고 긴 정적.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당연하게도 녹스였다. 제인이 내내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길래 어떻게든 가벼운 화제를 바꾸고자 꺼낸 말이었는데, 제인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없었다.

“같이 맛있는 걸 먹어도 좋고.”

“…….”

“마을에 놀러 가도 좋고.”

“…….”

그는 슬슬 답답한 경지를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경멸하는 이유가 뭔지, 끔찍해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난 네게 최선을 다 해주고 있어. 머리가 마비된 것처럼, 그녀에게 하고 싶은 무수한 할 말들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제인이 앞으로도 줄곧 이런 태도를 고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퉁명스럽게 굴 것이었고, 늘 자신을 미워할 것이었다. 매번 제 호의를 밀어내고, 건네는 말에 대답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녹스의 모든 걱정과 연민과 후회가 단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나고야 말겠지.’

그녀를 잡아 두기 위해선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줄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 외엔. 녹스는 제인이 기억하고 있던,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너무 희미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슬픈 얼굴이었다.

“우리 내기를 하나 할까?”

내기를 말하는 그는 아까의 처연한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분노를 품고 있었다.

“……,”

“네가 이기면, 내일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약속해.”

솔깃한 제안에 구미가 당긴 제인이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들었다.

“내일 꽃을 보러 가겠다고 말하게 될 거야, 그게 내기야.”

“…. 안 가고 싶어요.”

“내기에서 이기려면, 안 가고 싶다고 하면 돼.”

너무 쉬워 의심이 갈 만큼 우스운 내기였다. 녹스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내는 눈초리에 한 번 웃어주고는, 제인을 벼랑 끝으로 떠밀었다.

“지금 뭐 하는…!”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땅에 짚고 있는 제인이 녹스의 옷깃을 붙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당연히 죽을 것이다. 아득한 절벽 아래가 깊은 구렁텅이처럼 어두웠다.

“난 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가?”

이 사람, 정말 미쳤어.

눈빛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따라, 목선을 따라 서서히 올라와 숨통을 눌렀다. 점점 숨이 막혀오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서서히 땅을 짚고 있던 발이 공중을 부유하고, 그의 옷깃을 잡은 손이 떨어졌다. 다시 팔려갈 바엔 그의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면서, 죽음이 다가오니 또 삶이 간절해졌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마네라는 가면을 벗고 광기를 숨김없이 드러낸 녹스는 그녀에게 위협, 그 자체였다. 그는 세간에 도는 소문처럼, 그녀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미친 사람’이라는 별칭이 딱 어울렸다. 냉혈한처럼 굴어도 늘 제인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는 소문의 전쟁귀가 따로 없었다.

“무슨 말이던 좋아, 목숨을 구걸하는 거라면 뭐든.”

당장 떨어트리겠다는 협박인지, 그는 목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풀어 갔다. 다급해진 제인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 그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가녀린 목을 움켜쥐고 있는 그가 제인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절벽 끝에서 벌어진 이 연극은 오로지 내기를 위한 것이었다. 제인은 제 목숨 줄을 잡고 있는 단단한 팔을 붙들고 감히 발버둥도 치지 못했다. 발끝으로 간신히 땅을 짚으며, 들이쉰 숨도 마저 뱉지 못한 채 순응할 뿐이었다. 목이 졸려 죽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거나, 아니면 그에게 복종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살…려…주……세요….”

겨우 다섯 음절을 뱉는 동안, 흰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그는 팽개치듯 제인의 목을 놓아 주었다. 바닥에 너절하게 쓰러진 제인이 콜록대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내일은 꽃놀이를 갈까.”

또다시 마네의 탈을 뒤집어쓴 녹스가 그놈의 꽃놀이를 꺼냈다. 제인은 기침을 하다가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느닷없이 내기를 하자 하더니, 결국은 이러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제인의 등을 쓸었다. 또다시 다정한 연기를 했다. 다정한 미소. 다정한 눈빛. 다정한 말투. 전부 그의 것이 아닌데도, 그는 잔인한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 준 다음엔 늘 다정함을 흉내 냈다.

제인은 몸에 닿은 그 손길이 소름 끼쳐 우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곁을 지켜주던 따뜻한 마네가 그리워 눈물이 났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는데도. 사람을 믿은 대가는 가혹했다. 결국, 옆에 남은 건 죽어 버린 제 형을 모방하는 끔찍한 괴물뿐이었다.

내기에서 이긴 녹스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일으켜 세웠다. 내일 만나,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이 끔찍하게 역겨웠다.

* * *

바람 협곡에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화사한 분홍색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가문의 인장에 협곡을 지키는 파수꾼이 긴장하며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황제의 깃발을 든 자들과 노스어 병사들만 공격하라는 명령만 있었기에 잡아당긴 시위를 놓는 일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마부와 출입 명단을 관리하는 기사가 한참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마차에 탄 아가씨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통행증이라도 된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녹스 님!”

성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녹스는 율리나가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결국, 그는 가면을 집어 들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을 나섰다. 탈영병 놈들이 결국 그녀가 타고 온 마차를 습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율리나.”

레이스가 가득 붙어있는 연분홍색 드레스는 모래 먼지가 휘날리는 엑젤리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드레스와 비슷한 분홍빛 머리 위에 얹어진 보닛이 바람에 휘날렸다. 녹스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짓이기듯 내뱉었다.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늘 편지에 답이 없어 잊으신 건 아닐까 무척 걱정했었답니다.”

탐스럽게 빛나는 입술이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발그스레한 광대가 살짝 올라가면서 곧은 치열이 보였다.

“매번 내 기분을 언짢게 하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둘은 녹스가 수도에서 추방당한 뒤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찬 바람이 불었다. 쌀쌀맞은 대답에 율리나의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금방 미소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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