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둘만의 무도회가 화려하게 끝난 다음 날에도 녹스는 제인을 찾아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잊은 사람처럼 또,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나?’ 하고 태연히 물었다. 매일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제인이 모진 말을 해도, 당신은 미쳤다며 소리를 질러도 녹스는 당장 그 상황에서 벗어난 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멀쩡해졌다.
제인의 식사는 녹스와 함께했던 지난 식사 자리처럼 매일 성대했다. 매일 깨끗이 세탁된 옷이 제공되었으며, 밤마다 양초도 제공되었다. 비록 아무도 만날 수 없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혼자 지내야만 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풍족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매일 밤이면 찾아오는 녹스라는 악몽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제인이 수척해질수록 녹스도 점점 피폐해졌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느껴졌을 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인간관계라곤 수직적인 관계가 전부였던 녹스는 제인과 가까워지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제인이 그의 속내에서 점점 커지는 집착에 더욱 부채질했다.
제인이 그 덕에 더없이 풍족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맞았고, 그에게 제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도 맞았다. 처음부터 무너져 있었던 그녀와 무너지고 있는 그. 둘 사이는 아무런 득도 없는 독과 같았다.
서로를 피 말리게 하는 이 사이는, 누가 먼저 지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녹스는 점점 망가져 가는 관계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손을 대면 부서져 버릴 거 같아서, 이대로 지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던 셰이단은 녹스의 제인을 향한 동정, 동질과 비슷한 감정들이 집착으로 변화하는 걸 지켜보며 걱정스러웠다. 물론 주군의 건강과 정신 상태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그가 돌보지 않는 엑젤리스에 대한 걱정도 한 무더기였다.
수도에선 가올테 백작의 사망과 관련해 병사들이 내려오고 있고, 주변엔 노스어 탈영병들이 가득한, 누가 봐도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녹스는 그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녹스가 무너지기 전에 엑젤리스가 먼저 무너질까 염려스러웠다. 이곳은 수도의 귀족들에게 매일 목숨을 위협당하는 제 주인을 감싸 주는 마지막 방어책이었다. 이마저도 무너지면 그는 지금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제인은 악몽을 꾸었다. 꿈이라면 늘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거나, 과거 고향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내용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저번, 둘만의 무도회 장면이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녹스의 얼굴이 흐리멍덩하게 일그러져 그가 녹스가 맞는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찌르고 싶다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거야.’
손에 들린 검은 그때와는 달리 이미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벌벌 떨고 있었던 몸도 꿈속에선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의 도발에 순순히 응해줄 용기가 났다. 있는 힘을 다해 가슴을 깊이 찔렀지만.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저 공기를 가르는, 평범한 느낌이었다.
‘난 그대를 믿어. 아주, 많이.’
녹스가 입가에 피를 묻히며,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승리의 쾌감, 이제 드디어 해방이라는 만족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한 기분이 들어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손이며 팔에 피가 흥건히 묻어 있어 사지를 털어냈다. 녹스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희미한 미소, 가련해 마지않는 눈이, 꼭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끌어냈다.
‘이제 그대도 나를 믿을 마음이 조금은 생겼나?’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벌떡 몸을 일으킨 제인은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손에 묻어 있던 끈적이는 피는 모두 사라졌는데도 찝찝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눈앞에 죽어 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차피 제 손으로 그를 죽일 기회는 두 번 다시 없겠지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부터 불쾌한 꿈을 꾼 제인은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료한 시간을 그 불쾌한 기분과 싸우며 보냈다.
할 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잡념을 떨쳐낼 만한 수단도 없는 호화스러운 방에서 제인은 침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다가온 저녁 식사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절반도 먹지 않은 식사가 치워지고, 제인의 방엔 또 새로운 하녀가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인형 놀이를 하듯 제인의 옷을 갈아입히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옷 치수를 재 갔던 부부가 새로운 드레스를 가득 보내 미어터질 것 같은 옷장에 제인이 평생 가져본 것보다도 훨씬 많은 옷이 들어있었다.
“가벼운 밤 산책에 어울리는 옷으로 골라 드릴게요.”
하녀는 제인이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터라 능숙하게 혼잣말을 하며 옷장에서 흰 드레스를 꺼냈다. 단정하게 재단된 그 드레스는 목을 감싼 레이스를 제외하면 별다른 장식 없이 수수했다.
몇 번을 마주해도 잘 꾸며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해가 지면 검은 늑대가 찾아오고, 또 의욕 없이 끌려다니겠지. 제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데 끈질기게 찾아오는 녹스가 참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계속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아챘거나.
‘뭐, 못된 취미가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마음이 약해질 때쯤이면 비예단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눈이라도 멀어서 그 늑대의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작 괴롭힘당하는 사람은 자신인데도, 아픈 얼굴을 하고 있던 녹스가 마음에 걸렸다. 못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기엔 그는……. 그런 얼굴을 마주할 때면, 그의 표정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이 들었다.
제인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환경과, 인간으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점점 나아지는 주변 환경과 비례하여 초췌해지고 있었다. 마음의 상처가 사람을 망쳐 버린다는 걸 제인은 알고 있다.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죽어간 사람을, 델단을 알고 있으니까. 비예단의 말이 아니었다면 제인은 또 녹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버렸겠지만, 의미심장하게 남긴 말이 마음을 굳게 먹도록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약한 마음으론 오히려 내가 상처를 받겠구나. 좀 더 독하게 굴자, 다시 팔려 가는 것보단 차라리 늑대의 손에 죽는 게 낫겠다. 가냘픈 주먹이 굳세게 쥐어졌다.
“제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그가 찾아왔다.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녹스가 마네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다정히도 물었다. 요즘 들어 늘, 이 방에 들어서면 인격이 바뀌는 것처럼 제 모습을 꾸며냈다. 제인은 질린다는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정한 미소를 늑대 가면 대신 걸고 있는 그를 보자, 꿈에서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애달픈 미소와 지금의 미소는 전혀 달랐다. 제인이 대답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던 그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제인은 손을 잡는 것 대신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그냥 따라갈게요.”
늘 별말 없이 붙잡던 손이었는데, 오늘따라 거절하는 게 아쉬웠지만 녹스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좋을 대로 해.”
그러나 자신에게 말을 해 주었다는 걸로도 충분히 만족한 녹스는 제인을 꼬리처럼 붙이고 성 밖을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이젠 제인에게도 익숙한 장소인, 절벽 위의 그곳이었다. 요즘 들어 그와 있을 땐 꽤 능동적으로 움직이던 제인이 자연스레 절벽의 끝으로 가 섰다. 옛날에는 앉아라, 일어나라. 일일이 말해주지 않으면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가 조금이나마 달라진 게 썩 즐거운 그는 제인과 차분히 대화하고자 옆에 서서 말을 붙였다.
“오랜만에 오지?”
둘 사이를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벽이 녹스의 말을 튕겨 내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절벽 아래의 풍경에 넋을 빼놓고 있었다. 아까 말을 하길래, 오늘은 조금 다를까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여기 처음 왔을 때, 되게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요즘 식사는 어때? 신경 써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거든.”
답은 없었지만 꿋꿋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녹스가 이젠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싫다는 데도, 굳이 찾아와 자신을 괴롭히는 이 사람의 심리를 도대체가 가늠할 수 없었던 제인은 시선을 더 멀리 두며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