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70)화 (70/95)

70화.

“오늘 준비한 게 있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

녹스가 내리던 명령보다 마네의 부탁이 제인에게 더 잘 먹혀들어 갔다. 높은 구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일어난 그녀가 먼저 문 앞에 나섰다. 함께 노을을 보러 갔을 때처럼, 정원을 보러 갔을 때처럼 누구의 눈총도 없이 나갈 생각을 하니 기대 마저 됐다. 손등 위로 껴 맞췄던 깍지가 풀리고 둘의 손바닥이 다정히 맞물렸다.

녹스는 제인을 배려하기 위해 복도와 계단의 사용인들을 모두 물렸고, 도착한 거대한 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모두 커튼 뒤에 숨겨 두었다. 높다란 천장과 부딪힌 음악이 웅장하게 퍼지다가 다시 가녀린 현악으로 변했다.

“여긴….”

“마음에 들어?”

녹스가 질색하는 바람에 만들기도 눈치 보였던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인 각종 디저트와 수 병의 샴페인이 즐비해 있는 테이블은 장난감을 쌓아 둔 것처럼 아기자기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매혹당한 제인이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천천히 홀의 중앙까지 다다른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녹스가 정중한 자세로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도회 같은 걸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제인은 마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천천히 따라오면 돼.”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겹친 제인은 허리에 느껴지는 그의 손길에 잠시 경직되었다.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녹스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면서 제인의 나머지 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넓은 홀 안에서 그들을 위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인은 자연스레 그를 따라 엉성한 춤을 추었다. 왼팔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반걸음 옆으로 걸어갔다 다시 두 걸음 뒤로 가고. 가까이서 보면 그들에게만큼은 즐거운 시간이더라도, 멀리서 보는 모습은 괴상했다.

주인과 노예, 구원자와 피해자, 인간과 이종. 그들을 각각 지칭하는 단어들은 서로 너무나 상반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의미조차 상반되었다. 광기 같은 집착과 망상 속의 상대. 그들의 춤사위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 듯했다.

녹스도, 제인도 지금 이 시간들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사실이 고개 들지 않도록 짓누르고 있는 중, 허무함에서 먼저 깨어난 건 제인이었다.

“…이게 다 무슨 짓이에요?”

제인의 현실을 일깨우는 말에, 마네를 흉내 내느라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단숨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에게 바싹 붙어 뒤로 젖혀진 허리를 지탱하던 손이 떨어졌다. 제인이 차마 붙잡을 것도 없이 뒤로 넘어가는데도 녹스는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윽…!”

볼품없이 나자빠진 제인이 잔뜩 구겨진 드레스 자락 위에 주저앉아 마네의 껍데기를 닮은 녹스를 노려보았다. 녹스 또한 좋았던 분위기를 깬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신경전이 벌어지는 사이 음악이 끝났다. 이 거대한 홀에 녹스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댄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한탄이 담긴 목소리는 제인을 탓하고 있었다.

잘 흘러가던 분위기를 느닷없이 박살 낸 제인이 원망스러웠는지, 녹스의 눈에 노여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인에게 그 눈빛은 경고와 다름없었다. 몸이 차갑게 식으면서 오한이 들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다리를 휘감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녹스는 제인이 시시각각 창백해지는 꼴을 관람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려다보다가 마지못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

아까는 잘만 잡았던 그 손이 이제 와선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지, 제인은 꿋꿋하게 못 본 척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뾰족한 굽이 바닥에 미끄러져 끼이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결국, 그녀는 엎드려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항해 봤자 제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 그랬던 것처럼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걸 알면서도 제인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의 이중성이 역겨워서, 손을 잡았다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대체….”

제 딴에는 열심히 기어간 것 같았지만, 기껏해야 한두 걸음이었다. 녹스는 금세 그녀를 따라잡아 열심히 빗질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긴 머리카락이 밧줄처럼 늘어나 제인을 붙잡았다. 두피가 뜯어질 만큼 아팠는데도 입술을 씹으면서 겨우 비명을 참았다.

“대답해, 대체 뭐가 문제인지.”

녹스가 네발로 기어가고 있는 제인의 눈높이에 맞췄다. 쥐고 있던 머리카락도 모두 놓아 주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그녀보다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괴롭히는 사람은 그면서, 그 또한 괴로워 보였다.

수준 높은 식사와 아름다운 음악, 화려한 드레스, 단둘만의 무도회. 모두 소용없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잡아당겨 진 두피가 아파서든, 넘어질 때 부딪힌 꼬리뼈가 아파서든 뭐든. 이유를 가져다 붙일만한 건 많았으니 참지 않고 눈물을 보였다.

“왜 울어?”

대리석 바닥으로 고체가 된 눈물이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녹스는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럴수록 울음은 하염없이 커졌고, 녹스가 그녀를 품에 안아서 달래 주려고 할 때, 제인이 그 팔을 저지했다.

“날 못 믿는 거겠지, 그렇지?”

그렇게 말한 녹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다. 비틀린 눈썹이 산을 그리며 찡그려졌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연보라색의 눈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화가 난 걸음으로 벽에 붙은 장식용 검을 빼 들었다. 장식용이라곤 해도 충분히 남을 해칠 수 있을 만한 날카로움에 홀의 조명이 비춰 반짝였다. 제인은 그가 자신을 찌를 것으로 생각했는지 점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대 힘으론 죽일 수 없겠지만, 죽을 만큼의 상처는 낼 수 있겠지.”

자신의 목을 내리치던, 배를 관통하던 할 거라 예상했던 그 검은 대리석 바닥을 큰 소리가 나도록 튕기며 빙글빙글 돌다가 제인의 발 앞에 멈춰 섰다.

싸우자는 건가? 지금? 나랑?

머리가 검이 나뒹군 것처럼 핑글핑글 돌았다. 상황을 전부 납득할 순 없어도, 본능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난 그대를 믿어. 아주, 많이.”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선 녹스가 무방비한 자세로 제인을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로 보이진 않았다.

“찌르고 싶다면 있는 온 힘을 다해야 할 거야.”

진검보다 훨씬 가벼운 검은 제인이 들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을 거머쥔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이 사람이 밉나? 이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이 사람을…….

“뒷일은 걱정하지 말게, 그대를 벌하지 않겠다 약속해.”

검 끝이 어딜 겨눠야 할지 헤매다 녹스의 목에 다가왔다. 아무리 장식용 검이라지만, 있는 힘을 다해 목을 찔린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텐데도, 녹스는 여유롭다 못해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인을 더 화나게 했다.

아, 이 사람. 내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날 믿는다는 거구나.

이것도 그가 꾸미는 장난의 일종이라 여긴 제인은 검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부릅뜬 눈에선, 그가 꾸민 광기의 장난에 동조한 광증이 느껴졌다.

“어서 해, 시간 끌수록 망설임만 커지니까.”

양팔을 벌리고 있는 녹스가 제인을 도발했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마음이 요동쳤지만 결국 검을 든 손엔 힘이 빠졌다. 또다시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빙빙 돌고 있는 검을 발로 잡아 멈춘 녹스가 떨어진 검을 들었다.

“그대를 믿는다고 했지.”

“…….”

이번엔 녹스가 제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 여겨 도망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그대도 나를 믿을 마음이 조금은 생겼나?”

“당신은 미쳤어요….”

제발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녹스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그 말을 하면서도 잔뜩 겁먹은 제인은 추워서 떨고 있는 사람처럼 온몸을 떨어댔다.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미친 장난을 해대는 것도, 원래의 자신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마네인 척 다정하게 구는 것도, 지금의 무표정한 얼굴도 너무 무서웠다.

미친 사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제인에게 그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꾹 참고 있던 속마음이 원래부터 불편했던 녹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표정 없는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그 또한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평생 보석이나 뱉어 내는 괴물로 살게, 짐승보다 못한 가축처럼. 그렇게 사는 게 어울려 보이는군.”

그의 흰 얼굴, 눈 밑과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낸 녹스는 그 엉망인 표정으로 제인에게 폭언을 퍼붓고 자리를 떠났다. 다시 시작된 현악이 고요했던 홀을 채웠고, 제인은 이 거대한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제인의 삶을 좀 더 풍족하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인 순수한 의도였지만, 받아들이는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게 그저 미친 짓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의 이중인격적인 태도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이 이질적이었고, 무서웠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눌 기회가 없었던 둘은 각자에게 더 깊은 상처만 내고 말았다. 상처가 옮고, 곪아 녹스와 제인 사이에 부술 수 없는 벽이 점차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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