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인의 방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말도 없이 찾아온 이방인에 그녀는 드디어 날 팔아치운 건가 싶었지만, 그들이 하는 짓을 보니 그래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제인을 당장 끌고 가긴커녕, 이사라도 들어올 셈인지 한참이나 고용인을 독촉해 방에 상자를 한 아름 쌓아 올려 두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부산스럽게 등장한 우아한 올림머리를 한 여자와 단안경을 낀 남자는 과분한 호칭으로 인사를 하면서 부담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엑젤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의상실의 주인 부부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래봤자 10년도 채 안 되는 역사였지만, 그들은 그게 무척 자랑거리인 듯 몇 번이나 강조했다.
“가만 보자, 머리카락이 검으니까 옷감은 좀 강렬한 걸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럼 너무 옷만 둥둥 떠다니지, 흰색이나 가벼운 하늘색이 어울릴 것 같은데?”
둘은 방안을 가득 채운 상자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옷감을 꺼내며 제인에게 둘러 보기도 하고, 머리 위에 얹어 보기도 하는 등 부산을 떨며 서로 입씨름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제인은 설명을 요구할 용기는 없어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제인의 종족들도 의복을 입고 다니니 당연히 이 행동들이 옷을 만들기 위해 치수를 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자신의 치수를 재가는 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옷이라도 만들 생각인 건가…. 지나쳐가는 생각 중 정답이 있었다.
“이 정도면 완벽해! 치수는 다 쟀습니다, 아가씨. 피곤하셨죠?”
“…….”
“일단 저희 의상실에 있는 옷 몇 개를 챙겨 오긴 했어요. 최대한 빨리 제작해서 보내 드릴 테니까 당분간은 준비해 드린 걸로 입으시면 될 것 같아요.”
“…….”
“금액은 후불로 청구 드릴게요! 누구한테 전달하면 될까요?”
여자가 높은 높은음으로 활기 넘치게 떠들었지만, 제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계속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청구는 제게 해 주시면 됩니다.”
셰이단이 벽 모서리에 파고 들어가 있는 제인을 소파에 앉혀놓고 부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저 아가씨는 누구…….”
부부는 방앗간의 참새처럼 셰이단을 둘러싸고 곤란한 질문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직 성안에서만 도는 추문인데, 이러다 마을까지 퍼져버릴까 염려된 그는 노련하게 부부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아직 식사 때는 아니라 간단한 디저트를 대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시간이 되시는지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엑젤리스 성에서 다과까지 즐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부부는 흔쾌히 셰이단의 제안에 응했다. 하녀를 시켜 응접실로 부부를 보내버린 셰이단이 잔잔해진 방에서 제인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히 안내해 주었다.
“성에서 지내시기엔 옷이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 주인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미리 가져온 기성복은 하녀에게 시켜 옷장에 정리해 두라 일렀으니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멀쩡히 입혀서 팔려는 건가? 그깟 옷 좀 멀쩡하게 입힌다고 가격이 더 오른다 생각하는 건가? 인간들의 생각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방 바깥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소음이 윙윙 울려댔다. 일정을 미리 알려 주었어도 그녀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저 통보받은 대로 하녀가 옷장을 정리하러 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이번에 온 하녀는 이전처럼 성심이 못돼먹은 아이는 아니었다. 아직 성에 온 지 얼마 안 됐는지, 허둥대는 모습이 제인의 눈에도 귀여워 보였다. 어떻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저 비싸 보이는 옷을 만졌다가 더러워진다고 구박받을까 걱정되어 그만두었다. 그저 가만히, 주름 하나 없이 정돈된 침대에 앉아 하녀가 옷장 가득 드레스며, 구두를 채워 넣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다 정리했어요!”
활기차게 말하는 하녀는 정리를 다 끝낸 게 뿌듯한지, 제인에게 칭찬을 바라는 모습으로 앞을 알짱거렸다. 제인도 어떻게 해야 기분 상하지 않게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 끝에 몇 번 손뼉을 쳤다.
짝짝짝.
힘없는 박수 소리가 텁텁했다. 그 별 것 아닌 반응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하녀는 제인을 일으켜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저번처럼 치렁치렁한 드레스 안에 제인을 욱여넣고, 한참 높은 구두를 발에 신겼다. 예전처럼 뒤꿈치가 까질 만큼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하녀는 뭘 해도 가만히 있는 제인을 입혀 주고, 신겨 주면서 그녀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애들 만나면 알려 줘야지, 하녀는 겉으론 친절했지만, 속으론 모리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제인에겐 손길이 거칠지도 않았고, 놀라지 않게 뭘 하면 한다고 예고해 주는 친절함까지 겸비한 좋은 사람이었다. 전체적으로 저번처럼 숨 막히는 순간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어두운 보라색부터 시작해 내려갈수록 점점 연해져 발치에 가서는 결국 하얀색을 띠는 드레스는 제인의 흰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어깨선부터 소매까지 장식된 레이스 무늬도 고급스러워 제인이 입만 다물고 있다면 누가 봐도 귀족으로 보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제인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드레스가 아름답다는 거였지만. 하녀는 제인의 개털 같은 머리카락도 공들여 빗어 탐스럽게 바꿔 주었고, 창백한 입술에도 색을 입혀 주었다. 점점 꾸며갈수록 제인의 내면이 불안해졌다.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거지? 이런 꼴로 노예 시장의 철장에 들어가면 웃길 것 같은데. 그녀의 처지에서 가장 비관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 * *
태어난 이래로 가장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제인은 우스꽝스럽게 방을 뒤뚱뒤뚱 돌아다니며 걷는 연습을 했다. 보다 못한 하녀는 결국 제인을 소파에 앉혀 주었고,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제인은 아이가 나가던, 말던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 틈새로 방금 나간 하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바보 같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걷지도 못해!”
문 앞에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둘이 까르르 웃으며 제인의 험담을 하는 게 새어 들어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알았는데도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하녀가 친절하다고 인간에게 기대했던 건 아니었으니,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다. 잘 꾸며진 제인은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올 때까지.
“제인.”
단 두 글자의 이름을 듣는데도 숨이 막혔다. 어제 있었던 일이 오늘 다시 문제가 될까 봐 덜컥 걱정되었다. 녹스의 그림자가 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가리자, 심장이 죄어오는 기분에 가슴이 답답했다. 잔잔했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디 아파?”
녹스는 오늘 무슨 작정이라도 한 것인지, 마네처럼 말하고, 마네처럼 행동했다. 옷마저도 검은 늑대의 새카만 제복이 아닌, 마네가 매번 입고 왔던 흰 셔츠의 차림이었다. 가슴께를 쥐어뜯으며 숨을 몰아쉬는 제인의 앞에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신기하게도, 아니. 끔찍하게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쿵쾅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을 되찾았다. 제인은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의 걱정스러운 눈을 마주했다. 마네가 내 망상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 숨 쉬는 망상 속 인물이 애석해 마음이 아팠다. 델단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아팠다.
“괜찮아요…….”
호흡이 고르지 못해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다시 원래 색을 찾았다. 마네가 제인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그녀의 손이 모두 가렸다.
“안 좋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내가 그랬잖아. 나한텐 별거 아니라고.”
눈앞의 남자가 사실은 녹스라는걸 알면서, 이 남자한테 농락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깍지 사이 사이로 시원한 촉감이 파고드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인은 녹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고, 녹스는 그런 제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가 완전히 진정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