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68)화 (68/95)

68화.

“식기 사용법을 모르나?”

매일 식사를 묽은 수프로만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게 녹스의 단순한 의문을 떠올리게 한 근거였다. 어디서부터 알려 주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 들어 그가 이마를 짚었을 때, 제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왜?”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게 둘 모두에게 느껴졌다. 기 싸움이나 신경전 같은 종류의 다툼 같은 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제인의 신경을 자극할만한 말들을 꺼냈고, 그녀는 그저 대답하지 않는, 소통의 부재일 뿐이었다. 일방적인 오해와 일방적인 배려가 쌓여 만든 단단한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메뉴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녹스는 이미 바닥난 인내심을 바닥까지 긁어 참고 있었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군.”

계속되는 묵묵부답에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불규칙한 박자의 둔탁한 소리가 점점 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아까와는 다른 부드러운 음성이 음식을 바라보고 있던 제인의 고개를 들게 했다. 드디어 마음을 열었다든가 하는 이유로 빳빳한 목을 든 건 아니었다. 여태 자신을 속여 먹었던, 그 목소리가 가증스러워 멸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반항적인 태도가 그를 얼마나 거슬리게 할지 겁이 났다. 그러나 ‘조만간 팔아치울 상품’을 놀려 먹고 있는 저 파렴치한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입을 다물면….”

혼자만의 대화에 지쳐버린 녹스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더 이상 이런 의미 없는 지껄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그가 내려 두었던 나이프를 잡았다. 차게 식어가고 있는 고깃덩어리를 썰려고 든 건 아니었다. 한 손에서 능숙히 나이프를 돌려 쥔 모양새가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예절도 아니었다. 나이프를 짧은 단도처럼 바짝 잡은 그가 그대로 음식이 담겨 있는 접시를 내리쳤다.

“말을 해야 내가 안다고, 말했을 텐데.”

단단한 자기로 만든 접시가 뭉툭한 나이프의 끝에 부딪혀 산산이 박살 났다. 녹스의 손은 어딘가에 베였는지, 음식물과 함께 옅은 핏물이 보였다.

“당신이랑….”

다른 건 몰라도, 공포에 지배당한 적이 있었던 제인은 눈앞에서 벌어진 과격한 장면에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입을 열었다. 떨떠름한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랑 밥 먹기 싫어요, 그게 이유예요.”

접시 하나를 박살 내고, 손에 상처까지 내서야 기껏 들은 말은 혐오가 담긴 의사 표현이었다. 더 화를 낼 줄 알았던 녹스는 대답을 들은 후에 더는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제처럼, 무어라 말을 듣고 싶었던 것뿐인데, 오히려 더 먼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

애써 아무렇지 않게 꾸며 낸 대답이 측은했다. 녹스는 음식과 함께 마련되어 있던 냅킨에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입도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식어 버린 지 오래였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도록 노력하지.”

음식물이 묻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제인의 곁으로 다가간 그가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고, 홀로 식당을 나섰다. 제인은 그의 회한이 담긴 뒷모습을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 * *

자신이 오래전 좌천된 줄 알았던 해일러는 매번 중요한 회의의 참석자 명단에 제 이름이 껴있는 이유를 몰랐다. 루이스는 좌천이 아니라고 위로했지만, 심부름꾼이라며 구박을 하고, 제 자리에 헤티아를 앉혀 놓기까지 한 시점에서 이미 해일러의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다. 쓸모도 없는 저를 왜 필요하다는 것처럼 구는지 대장의 의도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도 오전부터 회의가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령에 따라 졸린 눈을 비비며 숙소에서 성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해가 짧아져 원래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인데도 주변이 어슴푸레했다.

“해일러 님.”

낯익은 실루엣이 해일러에게 뛰어왔다. 꽤 살갑게 반기는 눈치였지만 이름을 부른 사람과 그녀는 그렇게까지 친분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비예단이 반쯤 울상인 얼굴을 짓고 있었다. 해일러는 그가 뭔가 도움을 요청하려 찾아왔다고 짐작했다.

“그냥요, 성에 혼자 있는 느낌이라 외로워서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안 좋은 일이라면 이미 모두 겪은 것 같은데요?”

침울한 표정과 젖은 목소리는 비예단의 착잡한 심정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위로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의심이 들었다.

왜 하필 나를 찾아왔지? 라는 당연한 의구심.

“해일러 님도 이 대륙 사람이 아니지 않나요? 저도 엑젤리스에선 외지인이니까….”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자연스레 변명거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걸로는 의구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같은 동질감을 느끼고 싶다면, 그의 부모와 고향이 같은 셰이단보다 제격인 사람이 또 있을까. 해일러는 그 구차한 변명을 뒤로하고 용건을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대화할 사람이 있었으면 해서요.”

“제가 말주변이 없습니다.”

“음,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나마 형은 제 말을 들어 줬었는데….”

잘해 주는 사람에게 유독 더 꼬리치는 강아지, 비예단이 그 모습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동정을 사기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감성팔이에 아무리 감성 풍부한 해일러라도 역하다는 기분을 받았다.

“가족이 없어진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거라, 자꾸 약해지게 되네요.”

해일러는 그 말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려는 것이고, 환심을 사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거짓과 진실이 조화롭게 섞여 있어 어디까지가 가짜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최근에 유일한 가족을 잃은 건 사실이고, 그가 불쌍한 처지인 것도 맞았으니, 그가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헛소리는 아니었다.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형님을 방관한 저희의 잘못입니다.”

“아니에요, 모두 최선을 다해 주셨는데도 일이 이렇게 된 거겠죠, 저희 형이…. 워낙 마음이 약하니까….”

해일러는 그가 가족을 팔아서라도 자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뭘지 고민했지만,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리타분한 성격 때문에 융통성 없다는 평가를 받는 데다, 대장의 측근이라는 자리에서도 쫓겨난 마당에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여유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가난한 노스어 빈민 출신에, 형의 죽음을 처음 알려 준 사람이고, 장례식엔 웬 붉은 꽃을 들고 나타났으니.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나요?”

거기까지 생각이 끝나자, 사실은 자신이 위로 받고 싶은 소년의 마음을 깎아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에스텔라’로 제인을 독살하려 했던,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비예단과는 별개로, 그는 아직 10대 후반의 어린 소년이었다. 조실부모한 아이가 그나마 의지했던 형까지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으니 얼마나 세상이 미웠을까. 해일러는 비예단의 의도대로 가지고 있었던 동정심을 잔뜩 내놓았다.

“곧 회의시간이라,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해일러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울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비예단은 그녀가 완전히 성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가벼운 미소를 살짝 걸치고, 서글서글하게 뜬 눈매. 옛날엔 의도하지 않고도 늘 지었던 얼굴이 이제는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해일러는 미리 와있는 루이스와 파수대 단장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함께 녹스를 기다렸다. 늘 제시간에 오는 편인 대장이 몇 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슬슬 무슨 일이 있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셰이단이 주방에서 가져온 찻주전자를 들고 녹스와 함께 들어왔다. 가면 때문에 표정까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처진 어깨가 피로해 보였다. 요즘 제인과 함께 돌아다니시더니, 잠이 부족하셨나. 그런 가벼운 잡념의 흐름에도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 따끔거렸다. 비예단이랑 다를 것도 없군. 그녀는 자학적인 농담으로 스스로 위안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녹스는 인사치레를 손으로 저지한 뒤, 책상에 있는 서류를 밀어내고 팔을 짚었다. 손등에 턱을 괸 그가 한껏 갈라진 목소리로 간결히 말했다.

“루이스, 보고하게.”

“아르모단의 승전 소식이 몇 건 있습니다. 점령당한 마을들 탈환을 시도했던 게 성공하여 노스어 군대를 국경 근처까지 밀어냈다고 합니다. 동서에서 치고 들어가는 양동작전을 통해 수월하게 진행됐다고는 하지만, 노스어의 일부 병사들이 자진해서 투항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투항 세력에 들지 않고, 양동작전에서 탈출하지 못한 잔류 인원들은 탈영병 세력에 힘을 더해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도 상황까진 알 거 없어. 본론만 말하게.”

“…탈영병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위험합니다.”

그 말에 집무실이 찬물을 끼얹듯 고요해졌다. 겨우 목숨을 건진 탈영병들이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남쪽으로 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차라리 배를 한 척 구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모를까, 점점 더 노스어와 먼 곳으로 도망가는 건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저…. 엑젤리스를 노리는 건 아니겠죠?”

세상의 끝인 것처럼 펼쳐져 있는 절벽 사이에 뚫린 거대한 공터,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협소한 입구. 이만큼 방어하기 좋고, 탐나는 지역이 없었다. 그래서 녹스도 굳이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만약 탈영병들이 자신만의 새로운 땅을 가지려고 남하한다면, 엑젤리스만큼 완벽한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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