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까마귀 죽이기 (67)화 (67/95)

67화.

엑젤리스 성에서 돌아다니는 인간과 이종 사이의 추문, 그 추문을 뒷받침하는 사실들. 모든 게 비예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비예단답지 않게 제인과 자신의 둘만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떼를 부린 것이었다. 겨우 얻은 소중한 시간에 어설프게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본인이 아군은 아니지만, 적 또한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저는 제인의 날개를 재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거, 알고 계시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말똥해진 제인이 되물었다. 최근 들어 종종 비예단을 봐왔지만 왜 찾아와 제 등에 손을 올리고 있는지 이유도 몰랐고,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을 살아온 그녀는 애초에 그 행위 자체에 의문을 두지 않았다. 뜻밖의 이야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인이 되물었다.

“네?”

“아, 모르셨어요?”

아주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여태 숙련시켜 온 거짓말의 기술을 선보일 시간이기도 했다.

“제 날개를요?”

이번에도 또 날 위해서….

그간 녹스가 자신을 위해 해 주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는 제인을 비참하게 만든 당사자였지만, 항상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애매한 행동이 제인을 헷갈리게 했다. 마냥 싫어할 수도, 그렇다고 속 좋게 고마워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다시 노예 시장에 매물로 잡힌 거 아직 모르셨어요?”

두 번 깜빡인 눈이 순수한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예전보다 꽤 능숙해진 거짓말은 연기 톤까지 곁들여 더 훌륭해졌다. 사람을 몇 번 상대해 보지 않은 제인에게 완벽히 먹혀들고 말았다.

“당신 같은 비행 종은 날개가 있어야 더 비싸게 팔리잖아요.”

태연하게 말하며 제인의 어깨에 신성력을 불어넣자 제인이 그 손을 쳐냈다. 그 예민한 반응에 비예단은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사실 제인에겐 그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판단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한차례 날개를 뜯기느라 받았던 그 끔찍한 고통이 환상통처럼 찾아왔다. 진정으로 그가 제인을 생각했더라면, 그런 거짓말을 해서 굳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 이유는 없었을 텐데. 비예단이 가지는 감정이 애정인지, 소유욕인지, 아니면 그 두 개가 섞인 비틀린 사랑일지 알 수 없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속이 썩은 사과도 겉으로 보기엔 탐스러웠고, 거짓말 또한 그랬다. 이 사람이 날 생각해 해주는 말이구나, 눈물겨운 그의 연기에 제인이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제인을 의도적으로 속이고, 매일 밤 찾아와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게 하긴 했어도, 어찌 됐건 그 검은 늑대는 그녀를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던 폐저택에서 꺼내 주었고, 매일 음식을 줬고,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바깥을 보여 주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선의이자 호의였다.

다시 팔아 버릴 짐승을 정성 들여 가꿀 리는 없을텐데, 비예단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제인의 시선에 의심보다 미약한 의문이 깃들었다.

“뭐, 못된 취미가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비예단은 방금 그녀의 못다 한 뒷말이 녹스를 변호한다고 생각해, 주워온 노예를 정성스럽게 치료해 되파는걸 ‘못된 취미’라고 일축했다.

“못된 취미요?”

“인간 중에선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신경 쓰지 않는 부류도 있어요, 죄책감이라곤 전혀 느끼지 않는 악마들이죠.”

제인이 알아들은 의미는 조금 달랐다. ‘마네’라는 이름을 자신이 멋대로 착각한 건 맞았어도, 그도 역시 자신이 ‘이 성의 주인’임을 숨기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인 척 접근해 신뢰를 사고, 결국엔 보란 듯이 속였던 게 즐거움이라면 녹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맞았다.

“하.”

제인이 코웃음을 쳤다. 여태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로 가득 차 계속해서 그를 두둔했던 머리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 맑아졌다. 남을 속이는 데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신뢰가 클수록 효과가 좋았다. 자신이 이렇게, 그가 해 주었던 것들을 읊으며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결국 재미었을 거라는 결론이 났다.

그럼 그때 보여 준 그 눈은 뭐지? 또 다른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머리에 담긴 정보가 온전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어디 한군데 마음을 정해 두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자신은 상품이니까, 주인이 팔아 치운대도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높게 뜬 달 밑에서 보여준 그 애달픈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보면서….

기억에 젖어 들 때쯤, 비예단이 방해하고 나섰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마세요. 여기에 제인, 당신의 편은 없을지도 몰라요.”

비예단은 그녀가 고민하고 있음을 알고,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도록 계속해서 몰아쳤다.

“당신은 아름답지만, 결국 인간들에겐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어요.”

다시 되팔기 위해서라면, 어째서 내 보석엔 관심이 없었지? 인간들에겐 비싸게 팔릴 텐데.

팔을 물어뜯어 상처를 낸 날, 그는 잇자국을 따라 피가 몽글하게 솟아오른 제인의 팔을 붙들었다. 마치 그만하라는 듯이.

“잘해 준다면 목적이 있을 거예요.”

갈등이 심해질수록 마음은 점점 건조해졌다. 어차피 주인이 무엇을 하던 노예인 자신이 어쩔 도리는 없었다. 타인의 파도에 따라 흘러가는 수밖에. 그곳이 암초 덩어리거나 소용돌이 속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목적이 뭐든 간에 당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겠죠.”

애초에 제인이 엑젤리스에서 지낼 수 있게 된 첫 시작은, 비예단이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어 보였기 때문에, 인질로 잡아 두려는 수작에 불과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비예단은 녹스가 처음부터 그녀에게 흑심을 가졌고, 제인을 제게서 뺏어가려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녹스에게 일말의 희망도 걸지 않길, 조금의 호감도 느끼지 않길,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 호감에 조금의 의혹이 깃들길, 불신의 씨앗을 심을 뿐이었다.

* * *

“제인.”

비예단이 나간 후에도 계속 그가 떠들었던 말들을 되새기며 스스로 상처를 주고 있었던 제인은 늦은 밤의 손님을 오늘따라 더 매몰차게 맞이했다. 마네의 낯짝을 한 검은 늑대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세 번의 노크 후에 곁으로 다가왔다. 직접 녹스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던 그녀가 택한 방법은, 그저 쳐다보지 않는 수준의 반항으로 그쳤지만, 그 작은 날갯짓에 녹스가 반응했다.

“오늘따라 더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보군.”

비예단의 말에 이렇게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어설픈 모함은 제인이 가지고 있던 의심의 편린을 건드렸다. 녹스가 제인의 턱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억지로 얼굴을 들게 된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전보다 수척해진 얼굴, 흠 한 점 없던 얼굴에 내려앉은 그늘. 제인은 순간 어디가 안 좋은 거냐고, 쓸데없는 걱정을 할 뻔했지만 참아냈다.

“오늘도 가고 싶은 곳은 없나?”

반복되는 질문과 반복되는 대답, 당연한 침묵. 이 숨 막히는 일련의 과정들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끔찍한 것인지, 녹스에게도 불편한 시간일지 궁금했다. 왜 이런 가슴이 저릿한 시간을 날마다 보내야 하냐고, 혹시 당신도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냐고 묻고 싶었다.

“오늘은…. 내가 아직 식사 전이라.”

그가 찾아오는 시간이 시간인지라, 한 끼를 더 먹을 수 있냐면 먹을 수 있었지만 제인은 그와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상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아직 입에 음식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지.”

녹스가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이젠 적응되는 온도의 시원한 느낌, 제인의 뜨거운 손이 그 냉기를 감쌌다.

녹스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곳은 거대한 홀에 고작 기다란 테이블 하나만이 자리 잡은 식당이었다. 처음부터 식사하러 올 계획이었는지, 테이블 위엔 식지 않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자연스레 의자를 빼 주었다. 매너나 예의 같은 걸 모르는 제인이 의자를 한 번 바라보고, 녹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앉아.”

짧은 명령은 개를 훈련하는 어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꺼내진 의자에 구겨진 모양새로 앉은 제인은 처음 보는 음식들에 군침을 흘렸다. 넘치게 흐르는 고소한 향기가 눈앞의 진미에 눈을 못 떼게 했다. 녹스는 그녀가 감탄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맞은 편 자리에 가 앉았다. 여태 입맛이 없어 점심도, 저녁도 거른 그는 어쩌면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입맛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허기졌다.

“들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그가 또 짧게 명령했다. 둘만 앉아 식사하기엔 사치스러운 크기의 식당에 식기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제인이 혹시 스테이크를 들고 씹어먹는 건 아닐지, 생선의 가시를 통째로 삼키는 건 아닐지 걱정된 녹스가 하루의 첫 끼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

예의상 한 마디를 얹은 녹스는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스와 마주보고 앉은 제인은 무슨 고문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갈망하는 눈빛을 하고 손에는 포크도, 나이프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에게 단순한 의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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