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곧이어 형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것이 꿈임을 다시 자각했다. 마치 저주처럼, 망령처럼, 형의 목소리는 자명 시계의 종소리같이 꿈에 빨려 들어갈 때쯤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아버지!’
형이 처음 보는 화난 얼굴로 아버지를 불렀다. 우는 게 아니라 화난 거였구나. 몇 번이나 꿨던 꿈인데 이제야 형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늘 울상, 아니면 웃음만 짓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지금의 녹스와 더 닮아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형의 얼굴을 기억한 녹스는 이제 곧 악몽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다가옴을 짐작했다.
하지만 꿈은 깨지 않았다. 새로운 시점이 보였다. 잊고 싶었던 기억의 파편이 억지로 맞춰졌는지, 아니면 그 당시의 녹스의 눈엔 그뿐이 보이지 않았는지, 시야엔 검은 풍경에 자신과 형,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목에 검을 겨눈 병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노스어 병사에게 날아갈 거라 여겼던 형의 화살은 곧장, 과녁처럼 빛을 내는 눈알에 박혔다. 나와 똑같은 연보랏빛의, 아버지의 눈에. 아마 활쏘기를 연습 중이었다면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 멀리서 저 작은 걸 맞췄냐고, 분명 칭찬을 들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슨 생각이었는진 모르겠으나 녹스는 그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단숨에 아버지에게 달렸다. 검을 쥔 손에 핏줄이 드러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희게 샌 짧은 은발의 남자, 마네와 녹스의 아버지는 왼쪽 눈에 화살이 박힌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입에서 피를 토했다.
‘아버지….’
얼굴을 밑으로 떨구니, 자신의 검이 아버지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끈적이고 뜨거운 피로 덮인 아버지의 손이 제 손을 감쌌다. 그는 이미 의식이 흐려진 듯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녹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으로 죽고자 하는 그 마음이 대체 뭔지, 어린 녹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조언이자 유언을 읊조렸다. 꿈에서 들리는 이명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때려대는 이명이 점점 커지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사방에서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던 전쟁터에 고요가 가라앉았다.
녹스는 검은 풍경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몸뚱이였던 시체가 자작하게 피로 덮인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 박혀 있던 화살이 땅과 부딪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귀에 다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배에 꽂힌 검을 끝까지 쥐고 있다 매몰차게 뽑아냈고, 수십 년을 여러 전쟁터를 군림하던 디에스 로드게릭스는 아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 영웅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 하극상을 만들어 낸 녹스는 아버지의 피로 손을 적셨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형이 평생을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린 마음에, 그런 기억을 담고 산다면 머지않아 말라 죽을 것이었다. 검을 쥐고 뛰어갈 때부터 이미 결심했었다. 형을 대신해 미치광이가 되자고. 무자비한 괴물로 살자고. 형과 다르게, 난 짐승으로 태어났으니.
밤새 실컷 땀을 흘리고 나서, 새벽부터 샤워를 끝마치고 집무실에 도착한 녹스는 일찍 눈뜬 게 후회스러울 만큼 안 좋은 소식을 접했다. 어젯밤 셰이단이 두고 간 것인지 책상 위엔 두통을 일으키는 복숭아 향기의 분홍색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밤새 괴로워했었는데 눈을 뜨니 또 악몽의 시작이었다. 편지지를 뜯어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15년 전, 율리나가 자신에게 처음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것과 같은 편지지였다.
찢어 버릴까.
눈살을 찌푸린 그가 짧게 고민했지만, 편지 봉투는 이미 한 번 개봉이 되어있었다. 셰이단이 확인한 흔적이었다. 굳이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둔 이유가 있겠지, 녹스는 지겨운 얼굴을 하고 더러운 것을 만지는 듯, 검지로 봉투를 살짝 들어 편지를 꺼냈다.
「 사모하는 녹스 님께.
어느새 불쑥 가을이 다가왔네요. 녹스 님을 만나지 못한 세월 동안 제 마음도 시간에 날아가 버릴뻔했지만, 오로지 사랑이라는 고결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냈답니다.
수도에선 종종 녹스 님의 이야기가 들려와요. 별 시답지 않은 소문으로 녹스 님을 헐뜯는 멍청한 귀족들을 보면 가서 머리채를 다 뜯어 버리고 싶어요.
그래도 로드게릭스의 안주인이 될 제가 그런 교양 없는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요. 늘 참아내느라 속이 모두 타 버릴 지경이에요. 하지만 이 괴로운 마음도 조만간 녹스 님을 만나면 눈 녹듯 사라지겠죠, 조만간 만나게 될 거예요.
사랑을 담아, 율리나 레이스 」
녹스는 긴 내용을 눈으로 한 번 훑고는 당장 찢어 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 정략 결혼한 사이치고는 퍽 다정해 보이는 내용이었으나, 그건 율리나의 일방적인 애정이었다.
아직도 정을 못 뗐나.
손을 탈탈 털면서, 율리나가 징그럽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작위를 잃은 게 지금만큼 한탄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레이스 가문을 떼어 내려 해도, 추방당한 신세인 녹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는 길에 율리나가 탄 마차가 사고라도 당하길 비는 수밖에.
* * *
4층으로 옮긴 제인의 새로운 방은 예전보다 훨씬 공들여 꾸민 티가 났다. 여느 귀족의 방과 다를 것 없이 푹신한 침대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티 테이블, 화장대와 커다란 옷장 등 필요한 가구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림색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과회에 초대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비예단을 감시하기 위한 경비병들,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 함께 온 의사까지 총 다섯이 앉은 소파는 몹시 비좁아 보였다.
비예단은 말과 행동을 모두 지켜보는 사람들 때문에 감히 허튼짓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이 컸는지, 결국 못 참고 자신의 속내를 말했다.
“모두가 보고 계시니, 너무 불편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그 투덜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전 모욕을 당했다고 여겨 한 번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적이 있었던 그는 결국, 셰이단까지 호출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복도에 나와 있는 비예단을 달래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묵은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태 숨겨 왔던 능력이 공개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세상에 아는 사람도 몇 없는 비밀인데 어떻게 저 많은 사람 앞에서 제인을 치유하라고 하냐, 등등. 짜증 섞인 불만은 대부분 일리가 있었지만, 그의 성격에 이렇게 제 불만을 털어놓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셰이단에겐 이 상황이 번거로웠다.
“누군지도 모르는 일개 병사들이 알았다가 제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눈이 두 번 깜빡였다. 그의 자연스러운 습관을 몰랐던 셰이단은 그가 예민하거나, 엑젤리스의 사람들을 불신한다고 여겼다.
“주인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거라 제 권한으론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마음으로는 치유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될 거예요.”
주인의 명령이라고까지 들먹였는데도 비예단의 완곡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흠, 이를 어쩐다.’ 하고 중얼거리는 셰이단의 모습에 비예단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반쯤 넘어왔구나, 조금만 더하면 되겠어. 할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각하께서 부탁하신 일을 망치고 싶지 않은데….”
물론 수십 년 경력의 집사가 그 불쌍한 얼굴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사람 속내를 못 들여다보는 건 아니었다. 이런 실랑이를 계속 지속할 수도 없었고, 어차피 비예단이 또 제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의사가 함께 있었기에 괜찮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럼 딱 30분만입니다.”
“감사합니다!”
눈에 띄게 기분이 나아진 비예단이 바로 방으로 들어와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앉아 있는 경비병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방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인은 저도 나가야 하나 싶어 슬그머니 일어났다가 방문이 쾅 닫히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제인은 안 나가도 돼요.”
“아, 네….”
비예단은 그녀가 요즘 녹스와 자주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도 그가 독점하는 층으로 옮겨진 데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잘 구비되어 있고, 마치 그의 집무실을 떠올리게 하는 깔끔한 방은 누가 보아도 녹스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